054화 부부 간의 내기
그녀를 찾아온 손님을 공작이 멋대로 빼내 가려고 했다.
공과 사는 구분되어야 하기에 가신들이 공작에게 가는 것을 승낙했다.
자신은 자기 나름대로 남편을 존중해 주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남편이고 뭐고 상관없이 다 뒤엎었을 것인데 참았다.
대신에 몇몇 가신들에게 환영 연회를 열 예정임을 말해 놨었다.
“내가 하겠다고 말한 것을 하지 않으면 가신들과 그 부인들이 어찌 생각하겠어요? 연회조차 열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죠.”
그녀가 비웃음을 지우고 무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에게는 그것이 전부인가? 명색이 가족인데 안부조차 물어보지 않는군.”
이 모습을 보라.
하다못해 간만에 만났으니 안부라도 물어보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가령 성안에 있는데 왜 찾아오지 않느냐, 식사는 잘 했는지 등 말이다.
그런 물음을 못해도 괜찮았다.
적어도 잘 지냈냐고 말이라고 했다면 이렇게 짜증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 가증스럽게 당신 안부를 물어보기를 원하나요?”
그녀가 의아해하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신이 잘 지냈는지는 고용인들을 통해서 들으면 되는 일이고 당신이 잘 먹었는지는 주방장에게 당신의 식사량을 물으면 그뿐이에요. 왜 그것을 당신에게 물어봐야 하죠?”
남편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차피 남편은 자신을 믿지 않았다.
물어봐도 거짓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다면 사실대로 말할 고용인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다.
왜 거짓된 대답을 듣기 위해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공작은 그 말에 황당해했다.
그렇게 따지자면 사람들 간에 대화는 왜 필요한 것인가?
그냥 잘 먹고 잘 사려니 하고 지나가거나 주변인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다.
그런 식이면 인간관계를 만들고 싶어도 만들 수가 없다.
“그렇게 대화를 싫어하는 사람이 사교모임에서는 어떻게 사람들과 대화를 하려고 하는가? 기본적인 대화조차 거부하는 사람이 말이야.”
그녀는 무심한 얼굴이었다.
남편의 적의에도 상처를 받거나 하지 않았다.
화살로 쏴 죽이려고 했던 일도 있었는데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제가 이용해야 할 ‘패’로 써야 하니까요. 당신은 아니잖아요.”
불경한 말이지만 ‘개가 짖나?’라는 표정일 수 있었다.
“저는 당신을 존중해요. 당신이 저와 대화를 나누길 원하지 않으면 저는 최대한 그것을 존중해 줄 거예요.”
그 와중에도 ‘내가 당신과 대화다운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은 전부 당신 때문이다’라는 말을 했다.
“저는 마음이 아주 넓은 여인이랍니다. 당신이 대화를 원한다면 언제든 응할 수 있어요.”
“핫!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
“혹시 제가 하찮은 것들처럼 오지 않는 남편에게 와 달라고 애원이라도 할 줄 알았나요?”
정말 남편에 대한 환상이라고는 한 줌의 재조차도 없어 보였다.
그녀는 남편이 주는 애정보다 공작을 이용해서 얻을 권력과 부가 더 중요했다.
그 권력과 부가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는데 쓰일 것이니까.
그것을 얻을 미래를 생각하면 황홀하다.
“당신한테 인간적인 기대를 한 내 잘못이지.”
그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페루제는 언제나 귀족적이다.
언제나 우아하며 흔들림이 없었다.
언제나 하찮은 감정 따위에 휘둘리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 모습에 치가 떨린다.
다른 누군가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니까.
공작은 치를 떠는 쪽이었다.
“모두가 당신을 두려워하고 경계할 것인데 그런 상황에서 여는 연회가 제대로 진행이 되겠나? 연회는 없어!”
단호한 반대였다.
“나를 존중해 주지 않는다면 나는 존중해 주도록 만들 수밖에 없어요.”
공작부인이 자신이 존중받기 위해서 할 방법은 결코 좋은 방법은 아닐 것이다.
가문에 해가 되거나 사람이 죽어나갈 것이 뻔했다.
페루제 부인이 공작가문의 안주인이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도 가문의 분위기가 차갑고 인정이 없어졌다.
“말은 똑바로 해. 그대를 존중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에게 굴복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지.”
“그렇게 오해를 하면 섭섭하지요. 오직 가문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요.”
가문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그녀와 은근히 보이지 않는 힘 싸움을 했다.
그 은밀한 싸움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그녀는 사람을 죽이는데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다.
대놓고 죽이는 것도 조용히 죽이는 것도 말이다.
온몸이 피곤해지는 기분이다.
전쟁터에서도 이러지 않았다.
그만큼 긴장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집에서 마음 편히 있지를 못했다.
“웃기는군. 당신의 악명이 북부에 다 퍼졌어.”
가신 가문의 부인들을 언제든 마녀로 몰아세울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악명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북부에는 가신가문만 있는 것이 아니야. 그 가문들의 부인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아? 환영 연회조차 강압적으로 느끼겠지.”
그는 자신의 반대에 물러날 부인이 아니었기에 머리가 아파졌다.
그런데 의외의 일이 발생했다.
그녀가 순순히 넘어갔다.
“알겠어요. 주변 가문들의 경계심을 받으며 환영 연회를 할 수는 없죠.”
물론 그냥 넘어갈 페루제 부인이 아니다.
“대신에 그 경계심이 없다고 판단이 된다면 연회를 열도록 해야 해요.”
“그럴 리는 없지만 그렇게 된다면 연회를 열지.”
그동안 벌인 일들을 생각하면 그녀가 사교계에서 친목을 다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확신이 있으나 괜히 찜찜해지는 발렌티노 공작이었다.
* * *
그녀는 흐트러짐이 없는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실리, 생각해 보니까 아직은 환영 연회를 하기에는 적기가 아닌 듯싶구나.”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음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가 절로 나왔다.
역시 남편은 생각이 깊었다.
이 대화가 오히려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러십니까?”
“그래. 뭐든지 완벽해야 하지.”
과연 그녀가 완벽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답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공작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이는 알았던 것이야. 지금 열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지…….”
공작은 그녀가 주도권을 쥐려고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연회를 통해서 자기 자리를 견고하게 만들고 사람들에게 인지도를 쌓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역시 부인이라고 나를 위해 주시는구나. 감동이야. 만약 밀어붙였어 봐 얼마나 웃겼겠니?”
그러나 그녀는 마치 공작이 그녀를 배려해서 ‘미룬다’는 식으로 말했다.
자신은 그에게 밀려서 한 발 물러선 것이 아니다.
그이의 말이 타당하다고 여겼기에 받아들인 것이다.
그이의 말이 맞았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그이는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해 준 것이다.
너무 만족스럽다.
나중에 뒤통수 맞은 듯한 얼굴을 보일 것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이렇게 부인을 존중하시는 분을 남편으로 얻으시다니 부인의 행운이십니다.”
“그렇지.”
실리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공작 각하와 하신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우아하게 웃었다.
“가신가문뿐 아니라 그 외의 가문의 부인들에게 호감을 사야겠지.”
너무 아름다워서 대부분의 사람은 속지만 자세히 보면 진심이 하나도 없는 차가운 미소였다.
“그러면 어디 북부 사교계의 중심이 되어 보도록 할까? 천천히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앞당기게 되네.”
이 대화를 나누기 전에 자신은 천천히 물이 땅에 스며들듯이 사교계의 지배자가 되려고 했다.
자신이 사교계를 원한다면 언제든 가질 수 있었다.
혼인 전에 자국의 사교계를 지배했던 자신이 어찌 한 지역의 사교계를 얻지 못하겠는가.
북부 지역 따위는 쉬웠다.
한 왕국의 사교계를 움켜쥐었던 사람다운 자신감이었다.
“내 말이라면 발도 핥게 만들어 주지. 실리.”
“네, 부인.”
“계획했던 일에 필요한 자료를 가져오렴.”
“당장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아니면 이미 사교계의 주인이 되기 위한 계획이 있었기에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차가움을 지우고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집무실로 들어갔다.
* * *
환영 연회를 건 내기를 한지 한 달이 흘렀다.
“이것들은 무엇이지?”
“북부의 가문들에서 온 서신입니다.”
공작은 의아하게 서신들을 봤다.
그는 이것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서신인 것을 몰라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다. 그대도 알잖아.”
귀족이 상대에게 보내는 서신은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업무와 관련된 서신, 사교적 모임(가령 초대)과 관련된 서신, 지극히 사적인 서신이었다.
그 서신들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서신이 담긴 봉투에 있었다.
봉투에 가문의 인장과 본인의 직인이 찍혀 있다면 공적인 서신.
봉투에 가문의 인장만 찍혀 있다면 사교모임에 관한 서신.
봉투에 받는 사람과 보낸 사람만 적혀 있다면 개인적인 서신이었다.
물론 모든 서신에는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써져 있었다.
사교모임에 관한 서신은 집사의 권한으로 먼저 읽는 것이 가능하다.
“이렇게 많은 사교모임과 관련 서신의 왜 내 앞에 온 적이 없어서 이러는 것이야.”
집사가 필요한 것만 택하여 보고하는 경우가 많았다.
영주는 그 서신들을 하나하나 읽을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지 않았으니까.
시간낭비를 줄이기 위함이다.
그리고 공작에게 전달된 서신의 봉투들은 모두 가문의 인장만 찍혀 있었다.
“어찌하여 이런 서신들이 왔을까? 왜 그대는 읽어 봤음에도 전부 가져왔고?”
집사가 자체적으로 거르지 않고 모든 것들을 가져왔다.
“감히 제가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닌지라 모두 가져왔습니다.”
공작인 자신이 결정해야 하는 사항이라 판단한 것이다.
사실, 공작은 페루제와 한 약조를 잊어버렸다.
그는 공작부인이 해낼 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의 내정은 안주인의 역할이다.
그것을 공작이 빼앗을 명분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성은 영주와 그 가신, 일족을 지키는 보루였다.
그런 중요한 요충지를 악적인 여자에게 준다는 것은 자신의 안위뿐 아니라 자신의 사람들의 목숨을 저당잡히는 꼴이었다.
그래서 한 달 동안 그녀를 견제할 만한 인력을 데려오고 성안에 심어 두는데 집중했다.
집사가 고민에 빠진 공작을 보고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칸나 백작부인께서 공작님을 만나기를 청하셨는데 어찌할까요?”
“내가 그분을 베어 버리지 않는 것으로 감사하며 살라고 해. 지금 만나면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죽일지도 몰라.”
공작은 고모인 칸나 백작부인을 이제 무가치했다.
일을 이따위로 만든 원흉이었다.
오죽하면 고모를 죽일까 싶어서 만나지 않겠는가.
그만큼 고모를 보면 화가 치밀어 올라서 무슨 짓을 할 것만 같았다.
“그 여자는 어떻게 하고 있지?”
“이제까지와 같습니다. 영지도 없고 재산도 없는 몰락 귀족가문의 부인들만 만나고 계십니다.”
성안에서 공작의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은 안주인의 영향력이 줄어든다는 의미였다.
본래라면 남편이 자기 사람들을 보내주는 것은 안주인 자리가 탄탄해진다.
그만큼 아내를 총애한다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의아한 것은 묘하게 미지근한 반응이었다.
“자신이 사교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만 만나는군.”
“아랫사람들이라도 많이 만들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겠지. 그런데 그녀가 아무것도 없는 여인들이 자신들을 따른다고 해서 사교계의 영향력이 생기는 것이 아님을 모를 여인이 아닌데 말이야.”
그들은 일반적인 부부가 아니다.
겉으로는 크게 거부하는 모양새였지만 찜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