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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53화 (53/221)

053화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

공적인 일은 귀족의 책무이고 사적인 일은 단순히 개인의 생활이었다.

책임을 다하지 않는 자는 권리를 누릴 수 없는 법.

귀족이라면 응당 귀족의 책임을 다해야 마땅했다.

“그래, 귀족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건 귀족의 자격이 없는 쓰레기지.”

우아한 말투에 우아하지 않는 표현이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하니까 너무 잘 어울렸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쓰레기’라는 말도 귀족적으로 만드는 여인이다.

“그러면 가신들이 연회에서의 일로 나에게 사죄를 한다는 ‘개인적인 일’이 공작께서 가신을 불러들이는 ‘공적인 일’보다 우선시 되는 것이 맞겠느냐?”

가주의 호출은 공적인 일이었다.

이에 반해 가신들이 자신에게 방문한 것은 부인들의 무례에 대한 사과, 즉 그들 간에 생긴 개인적인 일에 대한 것 때문이다.

개인의 일로 인해 가문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어찌 가문을 드높일 수 있겠는가?

조롱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자신은 사적인 감정에 좌지우지되어서 실수하는 패배자가 아니다.

자신은 사적인 일보다 공적인 일을 우선시하리라.

그것이 가문을 위한 선택이었다.

“아니요.”

“그래. 우선시 되어야 할 일을 먼저 하라고 한 것이 잘못은 아니지.”

그녀는 차를 마시며 말을 계속했다.

오랫동안 방치와 학대를 당해서인지는 몰라도 아직 어리숙하고 귀족적이지 못한 면이 있다.

“그리고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 일로 이렇게 감정을 내비치지 말거라. 귀족적이지 못할 뿐이다.”

귀족적이지 못하다는 말에 란델리노는 얼굴이 사과처럼 익어버렸다.

란델리노는 창피했다.

꿈 덕분에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는 했으나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귀족으로 갖춰야 할 소양을 더 쌓아야 마땅했다.

이번의 경우도 그 소양이 부족하여 생긴 일이다.

어머니의 말씀이 맞았다.

주변의 말만 듣고 그것을 진실인 것처럼 행동했다.

어머니처럼 귀족은 완벽해야 한다.

한 치의 흠도 없어야 했다.

날카로운 이성으로 우위를 장악해야 한다.

그는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기대뿐 아니라 자신이 자신에게 가진 기대조차 만족시키지 못했다.

“내가 너를 보호하고 있더라도 네가 계속 이렇게 당당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어머니의 곁은 안전하다고 생각했음이다.

“어머니 덕분에 저는 후계자로의 권리를 찾은 것이 아닙니까?”

란델리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말은 그가 그녀가 없던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음을 내포하고 있었으니까.

겨우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찾기야 했지. 그러나 그것을 지키는 것은 너의 몫이다.”

그녀는 담담했다.

아들이 다시 학대를 당하게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너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싶어 하는 이들이 포기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냐? 그들은 더더욱 너를 노릴 것이다.”

자신은 너무 강하고 무서우니까 차마 노리지 못할 것이다.

동시에 자신이 란델리노를 통해 다음대 공작가문의 권력까지 차지하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다.

“너의 약점을 잡아채기 위해서, 나조차 이겨 내지 못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무슨 뜻인지 알았니?”

아무리 자신이 보호하려고 해도 후계자인 란델리노가 ‘심각한 하자’가 있다면 쫓아내는데 반대만 할 수 없다.

그녀는 그의 친어머니가 아니었으니 더더욱 말이다.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대체품을 찾아야했다.

“그들은 너의 나약함을 놓치지 않을 테니까 너도 그 나약함을 숨겨야 한단다.”

나약함은 불안함과 비슷했다.

강한 자는 불안해할 일이 없으니까.

불안함은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고 그 문제는 약점으로 이어진다.

자신보다 약한 란델리노를 주시할 세력들은 그 약간의 흔들림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잘 알았다.

그녀라도 그럴 테니까.

굳이 쉬운 길이 있는데 어려운 길을 갈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늘의 말을 잘 새겨들으렴.”

“네, 알겠습니다. 어머니.”

이 티타임의 대화는 감정을 보여서 굳이 약점을 스스로 드러내는 짓을 하지 말라는 훈계였다.

숨 막히는 티타임이 끝나고 란델리노는 처진 어깨로 방을 나서려고 했다.

“란델리노, 아까 내가 뭐라고 했니?”

그녀가 말을 꺼내지만 않았다면 나갔을 것이다.

“약함을 드러내지 말라고요.”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미소를 지으며 가려구나.”

“네, 어머니.”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에 따라 란델리노는 얼른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 웃음을 보이며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아들이 보이지 않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참으로 이상하지? 저번에 아이들과 부인들에게 당당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

특이한 꿈 덕분에 성숙해졌다고 해도 아직 아이였으니까.

그 ‘특이한 꿈’에 대해 모르는 그녀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아들이 귀족아이들의 다리를 무참하게 때리면서 완전히 달라졌다고 여겼었다.

“영식께서 가진 힘이 부인에게 나오는 것이니까요. 불안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가? 그럴 수도 있지.”

실리와 짧은 말을 나누고 차의 향을 음미했다.

* * *

한동안 벨로나 공작부부는 서로 마주치지도 않았다.

같은 성에 있으면서도 말이다.

고용인들도 공작부부의 관계를 알았다.

“공작각하와 부인께서는 아직도 서로 얼굴도 보지 않으신다며?”

“그렇다니까. 저번에 두 분이 복도를 걷다가 마주쳤는데 서로 못 본 척 다시 왔던 방향으로 가 버리더라고.”

“그래도 두 분이 만나서 싸우지 않으시니까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렇기는 한데 나는 나중에 큰일이 생길까 걱정이야.”

기묘한 기류가 성안에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안도감과 불안감이 공존했다.

마치 폭풍이 오기전의 고요함처럼 느껴졌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그 고요함 끝에는 태풍이 있었다.

“공작각하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되었네. 내가 알아서 하지.”

“부인?!”

시종이 먼저 공작에게 페루제의 방문을 알리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무시했다.

무례는 그것만이 아니다.

문에 노크도 하지 않았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미리 언질도 없이 남의 집무실에 오는 것은 무슨 무례지?”

발렌티노 공작이 갑자기 집무실에 쳐들어온 자신의 부인에게 차갑게 말했다.

그는 자리에 앉아 있었고 시선은 서류를 향하고 있었다.

부인의 얼굴조차 보기 싫어하는 듯했다.

그 무심함 혹 그녀에 대한 경멸에도 페루제 부인은 다정한 눈빛으로 그를 봤다.

“부부 사이에 너무 남처럼 그러면 섭섭하죠.”

“부부? 이렇게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는데?”

혼인하던 날, 첫날밤의 그 모습들은 모두 거짓이었다.

자신의 가문도 세탁하여 숨기고 이 가문에 들어왔다.

고모님을 속이고 공작 가문에 불리한 조건들로 가득한 계약서를 얻었다.

그에게 그녀는 가문을 잡아먹기 위해 온 악귀였다.

겉으로는 아름답지만 세상 그 무엇보다도 흉측한 악귀.

“이 세상에 믿음과 사랑으로 부부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되겠어요.”

그녀가 공작의 말을 듣고는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귀족들 간에 신의가 있고 사랑이 있었다면 세컨드를 두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랑이 부부의 조건이었다면 정략혼이라는 말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혼인은 철저한 계산이다.

서로가 가진 것을 주는 물물교환의 명분이었다.

그것이 돈이 되었든, 가문 간의 동맹이 되었든, 몸이 되었든 말이다.

그런 삶이 당연한 귀족이 ‘믿음’을 언급하는 것이 웃겼다.

“제가 온 것이 그렇게 언짢았다면 당신도 이렇게 오는 것을 한번은 허락해 드릴게요.”

네가 나처럼 하는 것을 한번은 허락한다.

한번은 허락한다.

허락의 뜻이 무엇인가?

청하는 일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허락하지 않는 일을 한다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자신이 허락하지 않는 짓거리를 한다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대는 나에게 존중을 바란다면서 정작 나를 존중하지 않는군.”

공작이라도, 남편이라도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말에 그가 짜증이 난 말투로 말했다.

“제가 저지른 무례에 대한 사과해요.”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는 사과였다.

남편이 기분이 나쁘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은 진심을 담아서 사과했으니까.

생각해 보니까 자신이 너무 과한 면이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남편을 편히 생각한 모양이다.

그것은 공작보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우월감이 만든 편안함이었다.

“당신이 너무 편하게 느껴져서요.”

“그게 아니라 내 머리 위에 있다고 여겨서겠지.”

“설마요. 저는 남편과 가문을 위할 줄 아는 여인인걸요.”

부부간에도 지켜야할 예의가 있었다.

하여튼 상대가 원한 적 없는 대가로 퉁치려고 했으니까.

받기 싫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투였다.

“그리고 당신이 나를 존중해야 저도 당신을 존중하죠.”

“당신이야말로 존중받을 행동을 하고 그딴 말을 하지.”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공작을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절묘한 한숨이었다.

한숨조차 감정이 없이 뭔가를 예견하는 듯한 느낌에 가까웠다.

완벽한 연극의 배우처럼 해냈다.

아니, 배우들도 감탄한 완벽함이었다.

한숨조차 아름다우며 우아함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행동 하나에도 나름의 의미를 부여했다.

“용건만 말하고 일어나죠. 환영 연회를 원하시는 날짜를 알려 주세요.”

“하? 뭐라고?”

그제야 공작은 서류에서 시선을 떼고 부인을 올려다봤다.

“당신을 위한 환영 연회를 열겠다고요. 저번부터 말했잖아요. 당신 일 때문에 미뤄졌지만요.”

벨로나 공작이 부인을 바라봤다.

그녀는 공작의 개인적인 것에 관해 관심이 없었다.

오직 이곳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쌓는 것에 집중했다.

그 증거로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 아는 것이 없었다.

부하들을 시켜서 서류상으로 보고를 받았을 수 있다.

명령을 내렸는지 아닌지는 알기 어려웠으나 직접 그에게 확인한 적은 없었다.

서로 만나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의 심신이 어떤 상태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공작으로 어떤 움직임을 보일 지와 그 움직임에 자신이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지가 중요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한 명의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를 한 명의 ‘공작’으로 봤다.

그녀에게 남편은 사적으로 정서를 교류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귀족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치였다.

벨로나 공작가문을 손아귀에 쥐려고 온 것부터 공작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 줬다.

다시 말하지만 부부 간에 신의는 처음부터 없었다.

“간만에 만나러 와서 무슨 일인가 했는데 그것 때문인가?”

남편이 찾지 않아서 외로움에 올 여인이 아니라고는 생각했지만 역시나였다.

“당신은 나의 감정보다 그게 더 중요하군.”

“이미 내가 당신의 환영 연회를 열겠다고 몇몇 귀족들에게 말해 놨잖아요.”

공작부인을 분노하게 만든 부인들의 남편들이 찾아왔던 날이었다.

남편의 업무를 위해 자신의 개인적 감정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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