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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52화 (52/221)

052화 그녀다운 농담

부드럽고 다정한 말투였다.

“자네는 내가 뭔가를 잘못했다고 보는가? 나는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내 사람인 시녀장을 고개 숙이게 했네.”

그녀를 조금이라도 경험한 사람들은 가증스럽다고 할 것이다.

진상을 모르는 사람들이 듣기에는 그녀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이의 권위가 가문의 권위라고 생각하니까.”

자신의 사람을 고개 숙이게 함으로 남편의 측근을 더 우선시해 줬다.

남편의 권위를 세워 주면서 자신을 낮췄다고 볼 수 있다.

“가신들의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한 것이 아닌가.”

또한 가신들에게 강압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해 주는 듯한 느낌을 줬다.

이야기로 듣는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지 않지만 직접 이 모습을 보지 못하면 알기 어렵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정말로요.”

그녀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정말 자연스러워서 알면서도 속을 뻔했다.

“그리 말해 주니 기쁘고 부끄럽군. 칭찬은 그것으로 충분하네. 안주인으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아니겠는가.”

너무 떳떳해서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세베루스도 사람인지라 그 행동과 말에 있는 의미를 말하며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따져 봤자 그에게 손해였다.

공작부인이 아니라고 잡아떼면 끝이다.

대화만 들으면 문제될 것이 없었으니까.

대화만 들으면 사려 깊고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겉이 완벽했기에 공작부인을 모함하려고 했다고 역공을 펼칠 수 있었다.

공작의 측근을 상대로 그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나 그녀는 그만한 힘이 있다.

작정하고 물고 늘어진다면 세베루스가 물러나게 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그러면 이제 물어봐야겠군. 누구에게 먼저 가겠는가?”

부드럽고 다정한 말투였다.

숨이 막히는 긴장감이 방을 엄습했다.

세베루스가 한마디를 하려던 순간이다.

그녀가 우아하게 웃었다.

“농담이에요. 그이가 불렀으면 응당 그이에게 가야지. 어서 가 봐요.”

우아한 말투와 웃음은 농담이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농담을 한 것인데 이리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꼴이라니 참 재미가 없는 사람들이다.

어떻게 단 한 명도 자신의 농담이 농담인지 아는 사람이 없는지 모를 일이다.

‘명색의 공작의 보좌관이라는 작자가 저리 담이 작아서야 쯧!’

속으로 혀를 찼다.

능력은 좋을지 몰라도 그릇은 작은 듯싶었다.

좋은 말로는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는 뜻이니 측근으로는 딱 맞을 수 있다.

오직 그녀만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제외한 모두가 그녀는 농담이라고 하는데 농담이 아닌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번 한번만 넘어가 준다는 의미가 담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특유의 진중한 분위기가 한몫했다.

귀족들은 흘러내리는 땀을 닦지도 못하고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공, 공작부인, 감사합니다.”

“부인의 배려에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공작 가문의 안주인다우신 배려심이옵니다.”

비굴함을 한껏 담은 몸짓과 눈짓, 말투는 세베루스를 찡그리게 만들었다.

공작 가문에 충성하는 가신들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모습이었으니까.

“그이 온 기념으로 환영회를 열 계획이니까 그때 꼭 오시고요.”

이 공간에서 환영회에 올 만한 인물들은 별로 없어 보였다.

각 가문과 가주에 대한 자료를 보고 확정을 지어야겠지만 지금의 심정은 그러했다.

“물론입니다!”

그들은 지옥에서 살아서 돌아온 병사처럼 애절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지옥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이만 가 보겠어요. 세베루스 그이를 잘 보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녀가 세베루스의 어깨를 살짝 두들기며 지나쳤다.

아무래도 자신과 그이의 보좌관은 서로 웃음 포인트가 너무 다른 듯싶었다.

남들은 잘만 웃던 유머가 통하지 않아서 약간 당혹스러웠다.

누구라도 진담으로 받아들일 말이었지만 오랫동안 최고의 자리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던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겉으로는 당혹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실리, 가자구나.”

“네.”

세베루스는 손에게 느껴진 차가움에 소름이 돋았다.

* * *

페루제 공작부인이 실리와 함께 집무실로 향해 갔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실리가 말했다.

“어찌하여 그러신 것인지요?”

“무엇이 말이냐?”

그녀는 앞만 보며 되물었다.

“그들을 놓아주신 것 말입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실리는 불만이었다.

“가문에 적응하는 것은 저희뿐만이 아닙니다.”

지금은 공작가문 안에서 세력을 확장해야 할 때였다.

“공작가문의 가신들과 그 부인들도 새로운 안주인에게 적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작과 노선이 다르기에 독자적인 세력이 필요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혼인한 것이기도 했다.

가문의 안주인이 힘을 발휘할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가문의 주인이자 남편의 총애였다.

가문의 주인이 든든하게 받쳐 주니 두려울 것이 없다.

단, 그 총애가 끝나면 그 힘도 끝난다.

어차피 공작과 한바탕한 공작부인이다.

이 방법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쓸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녀 성격상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타인의 힘을 빌리는 것보다 그 힘을 빼앗는 것을 선호했다.

다른 하나는 안주인 그 본인이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본인이 흔들리지 않는 한 무너지지 않는다.

당사자가 힘을 가진 경우가 드물어서 그렇지 그것이 가장 좋았다.

“부인께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까 봐 걱정이옵니다.”

세력 확장을 하기 편한 상황은 세력의 축이 이쪽으로 기울어졌다고 믿게 하는 것이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것이 만연한 세상에서 가신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강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다.

실리는 공작보다 그녀가 우위에 있음을 보여줌으로 가신들이 스스로 그녀에게 오도록 하려고 했다.

“이 일로 공작 각하께 밀려서 그런 것이 아닌지 하는 어리석은 말이 나올까 우려스럽기도 합니다.”

공작과 공작부인이 서로 기 싸움을 벌였다.

한번의 싸움에 승리했다고 승자가 결정 난 것은 아니다.

가신들도 그들 중 누가 우위에 있는지 판가름하고 움직일 것이다.

그런 중요한 때에 이렇게 공작의 눈치를 보며 물러나는 듯한 모습은 좋지 못했다.

누가 보면 하찮은 일로 별걱정을 한다고 푸념할지 모른다.

그러나 권력싸움이란 생각하지 못한 작은 일로도 판세가 갈리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멈췄다.

그동안 뒤도 돌아보지 않던 그녀가 실리를 바라봤다.

“실리, 실망이구나.”

그녀는 뭔가 심기가 불편한 얼굴이었다.

실리는 아차 싶었다.

“그동안 나와 네가 있던 세월이 얼마인데 아직도 그런 말을 한단 말이야.”

방금 그녀가 했던 말들은 공작부인이 패배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둔 것처럼 느끼게 할 수 있었다.

도대체 자신을 어찌 보고 감히 그런 불안감을 보이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측근인 실리부터 이런 말을 꺼낸다면 남들은 어찌 생각하겠는가?

부정적인 감정은 전염성이 강하다.

하나가 불안해하며 그것이 주변으로 퍼진다.

자신의 최측근이라는 사람이 그런 짓에 앞장을 서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았다.

실리가 당당하게 승리를 확신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아랫사람들도 공작부인인 자신이 아주 괜찮음을 알 것이니까.

실리가 그런 언짢음을 눈치채고 움찔했다.

그녀에게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내정을 장악했어도 남들의 눈과 귀를 완전히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새로운 곳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기존 세력과 불협화음 없이 합쳐지게 해야 했다.

쓸모없는 것들은 미리 제외시키고 알짜배기인 가신들을 포섭할 판세를 깔아두는 것도 해야 한다.

저번 밤에는 공작이 밀렸으나 다음에도 그럴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해야 할 일은 많았고 대비해야 할 일도 많았다.

신경이 곤두세워져 있다 보니까 말이 잘못 나온 것이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입장에서는 변명일 뿐이었기에 실리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내 측근이라는 사람부터 이러다니…….”

페루제 공작부인은 짜증이 난 듯 보였다.

이러다가 화풀이라도 할 것 같았다.

몸을 빠르게 돌리고는 다시 걸어갔다.

“다시는 그런 언행으로 나를 불쾌하게 하지 말거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 * *

시간이 흘러서 란델리노가 왔다.

그는 한껏 상기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머니.”

그는 가정교사들에게 배운 것처럼 최대한 우아해지려고 노력하면서 걸었다.

그러나 눈가에 매달려 있는 눈물까지는 정리하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밀리셨다는 이야기가 성에 파다해요.”

“밀려?”

페루제 공작부인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그녀는 이게 무슨 헛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자신이 언제 그이에게 밀렸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 어머니의 손님들을 아버지에게 속수무책으로 빼앗겼다고요.”

그는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아름답고 지혜로운 어머니를 만나고부터는 좋은 일만 생겼다.

좋은 친구도 생기고 나쁜 아이들을 혼내 주고 실력이 있는 가정교사들에게 좋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에게 어머니는 신의 대리자이자 완벽한 존재였다.

고용인들의 해이해진 기강이 바로 세워졌다.

자신을 무시하는 작자들은 없었다.

본연의 책무에 흔들림 없이 충실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시녀들이 동요하고 있을 때에 물어보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말이다.

공작가문의 후계자임에도 처절한 약자였기에 눈치가 빨랐다.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더 강하신 건가요? 아버지가 원하시면 어머니를 언제든 쫓아내시는 건가요?”

란델리노도 알았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척을 지고 있다.

공작이 입성한 날, 밤에 있었던 일은 누가 봐도 공작과 공작부인이 서로 대립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아버지는 무장이었다.

적이 약해진 틈을 놓칠 리 없었다.

그는 두려웠다.

어머니의 사랑을 이제야 받으며 살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가 없는 삶 속에서 고통 받기 싫었다.

아이의 울먹이는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페루제 공작부인은 말했다.

하나 양보했을 뿐인데 란델리노는 그녀가 완전히 패배한 장수인 것마냥 서러워했다.

“일단 진정하고 이리 앉으렴.”

무표정한 얼굴로 말투만은 다정했다.

란델리노는 언제나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훌쩍이는 아들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어머니가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도 수건으로 닦아 주며 곁에 있어 주니 불안했던 마음이 나아지는 듯했다.

“네가 하는 오해를 정정해 줘야겠구나.”

실리도 그렇고 란델리노도 그렇고 왜 이러는지 알기 어려웠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인데 왜 자신이 밀렸다는 소리를 하는 것인가?

“오, 오해요?”

“그래.”

그녀는 그의 눈을 마주하며 천천히 말했다.

‘아이의 무지함을 깨우쳐 주는 것이 어머니의 역할이겠지. 란델리노는 아직 어리니까. 게다가 이것은 실리마저 실수하고 자신의 기분을 언짢게 만들지 않았던가.’

“말해 주기 전에 먼저 질문을 하마.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이 동시에 있었을 때에 너는 어느 일을 우선시 할 거니?”

“공적인 일이요.”

란델리노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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