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화 자기 성을 지키지 않는 장수를 따르는 머저리는 없다
페루제 공작부인의 짜증에도 정체 모를 사내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섭섭하게 왜 그러십니까? 하도 재촉을 하셔서 쉬지도 못하고 왔습니다.”
그가 허리를 굽신거리며 말했다.
그리고는 공작을 바라봤다.
공작은 그 사내를 경계했다.
“그대는 누구지?”
“아이코, 제가 소개를 미처 하지 못했군요. 죄송합니다.”
그 사내는 머리를 긁적였다.
공작부인과 달리 공작에게는 굽신거리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슬쩍 검을 뽑았다.
“발렌티노 공작 각하, 저는 공작부인의 기사단 ‘다섯 뱀’의 기사단장인 로빈입니다.”
“헉!”
모두가 경악했다.
왜냐하면 그가 쥐고 있던 검에서 오러가 맺혀 있으니까.
그것도 선명하고 안정적인 오러였다.
“소드마스터!”
병사 하나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고는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다.
“라스타 왕국의 로빈.”
소드마스터는 왕국의 국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양질의 기사들이 많을수록 소드마스터가 나타날 확률도 높았다.
그래서 각 왕국의 수뇌부들은 소드마스터에 대한 정보를 꿰고 있었다.
타국의 군사 동향을 파악하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그런 것들을 꿰고 있지 않아도 소드마스터는 워낙 명성을 날려서 자연스럽게 그 소식이 들렸다.
그것이 단교되었던 타국일지라도 그렇게 되었다.
“맞습니다. 제가 라스타 왕국의 소드마스터 로빈입니다.”
그가 씨익 웃었다.
주인을 닮아 웃지 않아야 할 상황에서도 잘만 웃었다.
“각하, 일단 진정하시고 내일 공작부인과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저희가 싸우면 서로 좋지 않습니다.”
“내가 그대를 못 이길 거 같은가?”
이미 열이 받을 대로 받은 공작이었다.
게다가 상대가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오러의 수준을 볼 때 자신보다는 아래였다.
승리할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아닙니다.”
소드마스터에도 격이 있다.
그러나 그 격차는 그렇게 많이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 격차는 승패를 결정짓게 하지만 온전한 승리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쉽게 이기시지는 못하시겠죠. 그만큼 타격이 클 것입니다.”
그리고 막상막하의 싸움으로 크게 피를 흘리게 될 것이었다.
로빈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성곽 위에 숨어 있던 궁수들이 공작과 기사들을 향해 활을 당기며 모습을 드러냈다.
“공작부인께서는 상대가 약할 때를 놓치지 않습니다.”
공작은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었다.
그는 성에 당도하기 전에 부단장에게 비밀리 서찰을 보냈다.
은밀하게 숨어 있다가 때가 되면 합류하라고 말이다.
그런데도 이런 상황에서조차 병사들을 이끌고 나타나야 하는 기사단 부단장과 다른 기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충성스러운 당신의 기사들은 도적 토벌을 위해 자리를 비웠답니다. 그래서 비워진 성의 수비를 위해 제 사람들을 데려다 놨어요.”
이것은 그들이 공작이 아닌 공작부인을 택했다는 의미였다.
도적 토벌은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냥 그들이 공작성에 없어야 할 합당한 명분일 뿐이었다.
“그리고 자기 성을 지키지 않는 장수를 따르는 머저리는 없어요. 여보.”
그 와중에 페루제 공작부인은 수도에만 있는 공작을 저격하며 조롱했다.
승자는 패자를 모욕할 권리가 있었다.
공작은 그녀에게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목을 베어 버리지 않으면 가슴 안의 울분이 자신이 몸을 태워버릴 듯싶었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할 수 없었다.
실패가 명확하게 보였으니까.
바로 근처에는 소드마스터가 있고 자신의 기사단의 반은 도적 토벌을 명분으로 성 밖을 나섰다.
게다가 그녀의 기사단과 사병이 데리고 들어와 그를 맞이한 상태였다.
자신이 가문의 주인이니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과 기사들로 싸우려고 한다면 할 수 있기는 하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렇지만 그녀의 말처럼 본성보다 수도에 더 오래 있는 자신을 따르면 얼마나 따를까?
예전이었다면 모두가 자신의 명을 따를 것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상황을 볼 때는 그 수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더 싸울까요? 저는 그래도 괜찮아요. 원래 부부 싸움을 통해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게 된다고 들었거든요.”
설령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로 반격을 한다고 해도 이미 모든 대비를 마친 그들에게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는 주먹을 힘껏 쥐고는 입을 열었다.
“내일, 이야기를 나누지.”
공작은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이에 그녀가 화살을 쏠 준비를 하던 병사들에게 눈짓하자 그들은 활을 거뒀다.
“네, 그러시지요. 내일의 대화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겠어요.”
공작부인은 승리를 감미로운 미소로 대답했다.
발렌티노 공작이 먼저 성으로 기사단장과 들어갔다.
* * *
그 모습을 빤히 보던 그녀가 무심한 얼굴로 명령했다.
“미리미리 연회를 준비하도록 해야겠어. 공작가문의 주인이 오랜만에 귀환하셨잖아. 가신들도 만날 기회를 얻기를 기다릴 거야.”
그 명령은 서로 죽이기 직전까지 간 직후에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연회 날은 그이도 좀 쉬어야 하니까 나중에 날짜를 정하는 것이 맞겠지.”
게다가 그 연회의 주인공인 공작의 의사는 전혀 물어보지 않았다.
벨로나 공작의 마음은 그녀에게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는 명령을 내리고 자신도 공작처럼 자신의 집무실을 향해 갔다.
“어떤 규모를 생각하시옵니까?”
실리는 그 명령이 지극히 자연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불참하는 가신들이 없을 정도로만 하렴.”
“알겠습니다.”
“설령 그이가 연회에 오지 않더라도 왔으면 좋겠구나.”
“그리될 것입니다.”
그 연회에서 중요한 것은 남편이 원하는지 아닌지가 아니었다.
“이 연회의 의미도 모르는 작자들이 있지 않겠지?”
“아쉽게도 있을 듯싶습니다.”
그녀를 보기 위해 오느냐 오지 않느냐였다.
오늘의 부부싸움에 대한 것은 해가 뜨기도 전에 북부 전역의 가신들에게 당도할 것이다.
그러니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이 연회가 공작의 허락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님도 알 것이다.
“하긴 어디에나 바보는 있는 법이니까.”
어느 무리에서나 아둔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아니면 신의를 지키는 사람이 있다든가.
그녀에게는 둘 다 멍청했다.
그 연회는 페루제 공작부인이 모든 가신을 한꺼번에 불러 모으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
공작부인이지만 남편의 가신들을 전부 볼 수 있는 기회는 적었다.
그녀가 공작처럼 전체를 소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공작의 고유권한이었다.
만약 그녀가 멋대로 가신들을 소집한다면 이는 공작의 영역을 침범하는 짓이었다.
전시 상황과 같이 남편이 부재한 급박한 상황이라면 모를까 말이다.
참고로 내정 업무와 연관해서 가신을 부르는 것은 가능했다.
내정은 안주인의 본분이었기 때문이다.
내정과 관련된 가신이 아니라면 가신들과는 인사만 하고 끝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가신들과는 제대로 만날 기회는 결혼식이 아니면 수확제와 같은 큰 축제 정도뿐이었다.
그 외에는 서로 만날 일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런 현실 때문에 결혼식에서 가문의 안주인이 가신들의 인사를 받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가신들의 인사를 받는다 함은 그녀가 진정한 가문의 안주인으로 인정받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그녀는 수도로 달려가 결혼을 하는 바람에 그 기회를 날려 버린 것이다.
가문의 안주인이라면 당연히 받아야 할 가신들의 인사조차 받지 못한 공작부인이라니!
공작부인의 권위가 훼손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마음이 원하는 대로 가신들을 소집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공작이 아니라 공작부인이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누구나 수긍할 명분으로 가신들을 불러올 수 있게 된 것이다.
공작의 귀환하는 연회에 초대하는 형식이지만 이것은 그녀가 하는 가신들에게 하는 명령이었다.
“어디 쓸 만한 사람과 버릴 사람을 결정해 놓을까?”
중히 쓰일 자, 그대로 놔둘 자, 쇄락의 길로 가게 될 자는 이미 나눠져 있었다.
자비로운 그녀는 이 연회에서 마지막 기회를 주려고 했다.
그녀가 망쳐 버리기로 마음먹은 가문들은 필사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다.
당사자들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 * *
공작은 집무실로 들어오자마자 가문 내에 보관된 혼인계약서를 가져오도록 명했다.
그는 내용을 읽기도 전에 경악했다.
“어찌하여 이 종이에 계약서를 쓴 것이야! 제정신이야!”
그는 계약서를 쓴 종이가 무엇인지 잘 알았다.
계약 내용 변경을 위해 양쪽의 합의와 함께 교황의 승인이 필요하도록 하는 특수한 것이었다.
페루제 루비로즈가 교단과 친밀하다는 것은 워낙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젠장! 그녀가 내용을 바꿔 주겠다고 해도 교황이 거절하면 아무 소용이 없어.”
그녀는 그가 요구하는 것은 들어 줄 수 있다.
알겠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교황이 허락하지 않았으면 이룰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생색내며 계약서 내용 변경을 허락하는 시늉만 하면 될 일이군. 사람 좋은 척하면서 말이지.”
공작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교황은 알펜 왕국의 국왕에게 원한이 있었다.
교황을 잡으려고 하는 바람에 그는 도망치는 굴욕을 맛봐야 했으니까.
폐하의 최측근인 공작의 편이 될 가능성은 하나도 없었다.
“주군, 진정하십시오.”
기사단 단장이 그를 걱정하며 말했다.
“자네라면 진정하겠나?!”
그 말에 기사단 단장이 말을 잇지 못했다.
누구라도 이런 일을 경험하면 분노하며 그 관련자를 죽여 버리고 싶을 테니까.
“내용은 아주 가관이야! 아예 이 공작 가문을 먹겠다는 심사가 가득하군!”
돌려서 말하고 있었으나 결국은 페루제 루비로즈가 이 공작 가문을 지배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나열해 놓은 것이었다.
가령 자신의 군대가 공작 가문 성안에 대놓고 들어와도 법적 문제가 없는 것이 있다.
“고모님을 믿었거늘. 이런 계약서에 동의했단 말이지. 고모님과 칸나 백작 가문에 관해 탈탈 털어와.”
“네, 알겠습니다.”
고모님이 그녀와 한편은 아닐지라도 그 계약서에 동의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것은 가문을 팔아먹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내용을 한 줄이라도 읽어 봤다면, 제대로 된 대리인을 보냈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가문의 적장자를 몰아내고 자신의 아들을 공작이 되도록 하기 위해 악을 쓴 여인의 말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수도에는 갈 수 없겠군요.”
수도에서 그의 귀환을 기다리는 왕 때문에 단장은 수도에 대해 언급해야 했다.
“폐하께는 죄송하지만 그 여자 때문에 여기에 묶여 있어야 해. 그 여자가 말하지 않았어?”
그 여자…….
공작과 공작부인 간의 거리감을 느낄 수 있는 말이었다.
그에게 페루제 공작부인은 부인이 아니라 적이었다.
그것도 가문을 먹으려고 수많은 준비를 하고 때를 기다린 까다로운 적이다.
“성을 비운 장수를 따르는 병사는 없다고. 맞는 말이야.”
그는 지금이라도 그녀가 빼앗은 주도권을 찾아야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탓에 단기간에 그녀가 성을 장악했으나 그는 가주였다.
안주인이 할 수 있는 일과 가주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는 차원이 달랐다.
그 권한을 사용하면 그녀가 장악한 곳의 일부는 찾아올 수 있었다.
발렌티노 공작은 그동안 자신이 너무 안일했음을 인정했다.
그녀의 예상처럼 해가 뜨기도 전에 격했던 부부싸움은 가신들에게 널리 퍼져 나갔다.
그것은 곧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