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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48화 (48/221)

048화 페루제 루비로즈의 친구 (2)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의문은 강해졌다.

“너는 나에게 원하는 것이 없어? 왜 나에게 구경하라고만 해?”

“하고 싶다며?”

“뭐?”

“인간계를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이뤄준 것뿐이야.”

“왜?”

“그러게.”

그랬다.

에레보스가 “인간계를 직접 구경하고 싶었는데 아쉽다.”라고 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계약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망을 이룰 기회가 왔다.

그것을 잡기 위해 정령의 자존심을 버리고 애절하게 구는 ‘어둠의 정령’은 인상적이었다.

그것을 이뤄 주고 싶을 정도였다.

“자유가 없어 보여서?”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정령은 어디에나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에나 있다는 그 정령들은 자신이 원래 있던 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에 관한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곳을 갈 수 없고 자신의 의지대로 떠날 수 없다면 그것은 감옥일 것이다.

이상한 인간은 정말로 이상했다.

“너는 이상해?”

“뭐가?”

“다른 사람들에게 벽을 두잖아.”

그 어떤 인간에게도 자신의 진심을 보이지 않았다.

보여도 아주 옅었다.

대부분을 불신했고 의심했고 시험했다.

그녀 자신은 모르겠지만 그는 그것이 참으로 외롭게 느껴졌다.

“벽이요? 격식을 차린 것입니다. 생각해보니까 타나토스님에게 무례하게 굴었네요.”

“아니야! 그냥 지금처럼 해! 나는 그게 좋아!”

에레보스는 싫었다.

그녀가 자신에게도 벽을 세우는 것이 말이다.

그는 알았다.

그녀는 그를 편하게 생각했다.

본인에게 말하면 부정하겠지만 그녀는 자신을 ‘친구’로 여겼다.

“나는 지금의 네가 편해. 다른 인간들에게 하는 것처럼 굴지 마.”

“알겠어.”

그녀는 ‘격식’라고 표현했으나 그것은 완벽함이라는 자신의 무기였다.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게 만들 수단이었다.

* * *

“공간을 만들어줄 수 있어?”

“좋아.”

공간이란 시공간의 틈새로 그곳에서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실제로는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곳에서 엄청난 업무를 처리하곤 했다.

“그것을 너 혼자해? 다른 사람들은?”

“내가 다 확인을 해야 해. 내가 신경을 쓰지 않으면 뒤에서 허튼 짓거리를 할 것이니까.”

“횡령이나 그런 거?”

“그렇지.”

그녀가 혼자 확인하기에는 엄청난 업무량은 그를 놀라게 했다.

그것을 누군가와 나누기에는 그녀의 아버지는 무능했고 그녀의 동생은 자질이 부족했다.

* * *

“지금 소환하려고 하는데 와 줄 수 있어?”

“당연하지! 지금 바로 소환해 줘.”

“밖을 구경하면 어떤 이야기해 줄 수 있어?”

“물론이지! 나는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해!”

이것도 그녀가 그를 친구로 여긴다는 증거였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에게 물었다.

의사를 물어봤고 존중해 주려고 했다.

“나는 너와 이야기하는 것이 좋아.”

“그래. 나는 별로.”

“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나는 안다고.”

그녀는 ‘공간’에서 나와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농담도 하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나는 좋아했다.

이대로 쭉 좋을 줄 알았다.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은 없어.”

“응. 언제나 잘 되고 있어.”

내 친구가 그리 말하니 나도 믿었다.

나는 친구의 말만 믿을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리 믿었다고 해도 그녀가 모르는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자신의 친구가 워낙 고결해서 인간의 나약함과 추악함을 잠시 잊었다.

* * *

세월은 빠르게 흘렀다.

에레보스에게도 페루제에게도.

그녀는 열심히 달린 끝에 결국, 라스타 왕국의 최고 권력자 중 하나가 되었다.

“진짜 너는 대단해.”

“무엇이?”

“진짜 내 도움 없이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고 최고의 가문이 되었잖아. 솔직히 언젠가는 네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할 줄 알았거든. 계약했어도 정령은 그 명령을 거부할 권리가 있으니까. 해치지는 못해도 말이야.”

루비로즈 가문은 라스타 왕국의 최고 가문이 되었다.

라스타 왕국의 여러 가문을 없애고 얻은 부와 권력이었다.

인간들은 이상했다.

자신이 보기에 ‘인간’인데 남자와 여자를 굳이 나눠서 차별했다.

그래서 여인의 몸으로 이것을 이룬 것이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인간의 일이야. 당연히 인간이 해 낼 수 있는 일이지.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는데 말이야.”

“뭐가?”

그녀는 담담하게 인간의 일이기에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그동안 ‘어둠의 정령’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이룬 인간들은 정말 무능하고 가치가 없는 것들이었다.

“나랑 처음 만났을 때, 계약자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어? 거부할 권리가 있어?”

“어? 그, 그게 말이야.”

에레보스는 당혹스러웠다.

계약자의 요청을 거부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정령왕이기 때문이었으니까.

상급 정령인 ‘타나토스’로 속였는데 아직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것이다.

“뭐, 농담이야. 그때 네가 나랑 계약하고 싶어서 정신이 없었잖아.”

“맞아. 그때는 너랑 계약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거든.”

세월이 흘렀음에도 말하지 못한 것은 그녀와 동등한 친구는 자신뿐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믿는 그녀가 자신의 거짓을 안다면 더는 자신을 부르지 않을 것도 알았다.

그만큼 그녀는 그를 믿었다.

“루비로즈 가문의 격이 오른 것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 예정이야. 원래 오래 전에 했어야 하는데 왕국을 안정시켜야 해서 지금하게 되었네.”

“연회를 나도 가도 돼?”

“초대장을 줄 것이니까 구경 와.”

“그러면 너랑 있을 수 있는 거야?”

“그래. 시간이 되면 잠시 테라스로 나올게.”

“알았어.”

인간계를 구경하는 것은 좋았지만 그녀와 함께하지 못했다.

그녀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아주 적은 시간조차 쓰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소환이 되어도 모습을 감추고 그녀 곁을 구경할 때도 많았다.

물론 그녀의 동의를 받았다.

“정령왕이시여.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그럼. 밖에서 모습을 드러낸 나와 만나기로 했거든.”

“언제나 아쉬워하셨는데 정말 좋으시겠습니다.”

“응. 기대되는구나.”

정령들도 눈치를 챌 정도로 그는 기분이 좋았다.

정령왕은 초대장을 받아서 연회 홀에 오게 되었다.

남부 최고의 가문이 된 것을 알리기 위한 목적에 맞게 화려함 그 자체였다.

“예쁘다.”

어둠의 정령, 어둠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

인간계에서 밝은 빛은 멀리서 볼 수 있고 그 빛이 있는 곳에는 갈 수 없다.

오직 계약만이 그들을 빛에 다가가게 해줬다.

그래서 좋았다.

볼 수 없는 빛 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서 좋았다.

빛의 정령과 만날 수 있었으나 인간계에서는 만날 수 없었다.

인간계의 빛에 어둠의 정령은 다가갈 수 없으니까.

“인간들은 빛을 예쁘게도 꾸미는구나.”

그렇지만 그는 인간계의 빛이 좋았다.

인간들이 만들어 낸 빛이 말이다.

그는 계속 그녀를 바라봤다.

“또 바쁘네. 사람들이 지긋지긋하게 몰려들고 있어.”

그의 외모는 마치 예술품 같아서 시선을 끌었다.

그 시선이 싫어서 자신의 힘으로 존재감을 감췄다.

자신은 오직 페루제의 관심만 받고 싶었다.

그녀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테라스로 갔다.

강아지가 주인을 만나 기뻐서 꼬리를 흔드는 듯한 모습으로 그도 따라갔다.

“왔어?”

“응?”

“어때 인간들의 연회는?”

“화려하고 예뻤어.”

그들은 한참 아무 말도 없이 밖을 바라봤다.

어떤 대화도 하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같이 있었으니까.

저택의 빛에 밖은 옅은 어둠만 있었다.

“나랑 정원에 갈래?”

“인간들은 정원에서 교미한다며?”

“풋. 교미? 맞네. 정확한 표현이야. 그런데 내가 정원에서 그런 짓거리하는 것을 싫어해서 여기서는 하지 않을 거니까 괜찮아.”

이런 편한 표정도 나에게만 보여 준다.

소꿉친구라는 빅토르인가 하는 놈에게도 보여 줄지 모르겠지만 상상하기 싫다.

이런 웃음은 나에게만 보여 줬으면 좋겠다.

“정원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

“네가 정성껏 관리한 것이 잘 느껴져. 다른 정령들도 여기가 좋다고 말해 줬어.”

“어둠의 정령들이?”

“응. 맞아.”

“정령들이 좋아한다니까 뿌듯하네. 관리한 보람이 있어.”

그녀는 자신의 정원을 정말 자랑스러워하며 바라봤다.

모계쪽 조상대대로 이어 온 식물에 관한 지식들은 자신에게 정말 많은 도움을 줬다.

특히 독을 만드는 것에서는 최고였다.

“저 안쪽도 보여 줄게. 따라와”

“나야 좋지. 나무들과 꽃들에 관해 설명해 줄 거야?”

“네가 원한다면.”

그들은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정원 안쪽까지 들어갔다.

그녀는 기사들이 근처를 지키고 있었기에 안심하고 있었다.

그때, 한참 즐겁게 있는데 검은 옷을 입은 수상한 무리가 다가왔다.

그들은 그녀로 인해 모든 것을 잃게 된 귀족 가문의 생존자들이었다.

“웃기는군. 적이 얼마나 많은데 홀로 여기에 있는지.”

“너희는 누구지?”

“그게 중요한가? 중요한 것은 네가 죽는다는 것이지!”

그들은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는 그림자 기사들이 자신을 구해 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들의 칼은 그녀에게 닿지 못했다.

강한 분노를 느낀 에레보스가 막았으니까.

“감히, 감히 그녀를 해치려고 해?!”

“뭐, 뭐야!”

그에게 뿜어져 나오는 어두운 기운은 마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둠의 정령들이 쓰는 힘이었다.

“역시 추악한 악녀답구나! 악마와 계약을 했어!”

“이것을 어서 알려야 한다!”

그녀가 악마와 계획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그녀를 공격할 명분이 될 것이다.

라스타 왕국의 많은 이가 그들의 편에 서게 될 것이다.

이것을 알리기 위해 빨리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실패했다.

“누가 너희를 살려 준다고 했어?”

페루제를 모욕하는 말에 그는 그들을 자신의 그림자에 먹히게 했다.

자신이 여기에 없었다면 그녀는 그들에게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들을 처리하고 그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많이 놀랐지? 들어가서 쉴래?”

“아니야. 괜찮아.”

그녀는 충격적인 일에도 의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때였다.

기사들이 수상한 소리에 달려왔다.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어서 가서 확인해!”

그 소리를 들은 그녀가 그를 보며 말했다.

“미안한데 정령계로 돌아가 줄래?”

“곁에 있으면…….”

“미안.”

모습을 감춰서라도 곁에 있고 싶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계약자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했다.

그의 선택은 하나였다.

“알았어. 꼭 다시 불러줘.”

“응.”

놀란 그녀를 생각해서 티를 내지 않았으나 사실 그는 화가 났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인간의 일이니까 인간의 선에서 해결해야 해서? 그럴 수 없다면 죽을 생각이었던 거야?’

그녀는 자신이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어둠의 정령’인 자신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다.

살려 달라고 구해 달라고 하지 않았다.

“정령왕이시여, 무슨 일이십니까?”

“이상한 인간이야.”

정령들이 슬퍼하는 자신들의 왕을 걱정했다.

에레보스의 슬픔은 뒤로하고 페루제는 생각이 많았다.

“페루제 영애, 혹시 이번에 왕실의 납품 상단을 새로 뽑는다고 들었습니다. 저희에게도 기회를 주실 수 있는지요.”

“곧 공고를 낼 예정입니다. 필요 서류와 조건을 확인하시고 지원하시지요.”

그러나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알려진다면 그 파장도 컸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 파티를 주도했다.

* * *

파티를 마치고 그녀는 기사단장이자 소드마스터인 로빈을 비밀리에 불렀다.

“내가 암살을 당할 뻔했어.”

“예?! 괜찮으십니까?”

로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죽었을 때 생길 일들이 막 떠올랐다.

무엇이 되었든 최악이었다.

“당연히 괜찮지 않지요. 내가 기사들과 만나는 곳까지 도망을 치지 않았다면 죽었겠지요.”

기사들의 배치와 관리는 기사단장의 책임이다.

화를 낼만도 하건만 그녀는 시종일관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것이 상대를 더 두렵게 했다.

“어찌하여 흉수들이 여기에 침입할 수 있었던 거지?”

“죄송합니다.”

“나는 죄송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야. 이유를 듣고 싶은 것이지.”

“제 불찰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가 변명할 것이 없었다.

그 원인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이 일은 자신의 책임이었으니까.

그녀는 한참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빈이 의자에서 일어나서 허리를 숙이며 감사해했다.

“그대니까 이렇게 기회를 준 것임을 명심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가 봐.”

그가 나가고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홀로 말했다.

“인간의 일은 인간의 선에서 해결해야지. 설령 그리하여 죽을지라도 말이야. 그리 생각했는데…….”

자신의 친구이자 정령인 타나토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은 이유는 그녀가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인간으로서 자존심이었다.

정령이 없이도 어떤 난관도 이겨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기도 했다.

그래서였다.

친구인 그에게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한 것은 말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죽는다면 그것은 신의 뜻일 것이니 따르면 그뿐이었다.

“그래도 그에게 그리해서는 아니 되었어.”

다른 정령이었다면 작은 도움이라도 받았겠지만 ‘어둠의 정령’이었기에 그런 결심을 했다.

아무리 계약자라고 해도 ‘악마의 사역마’로 불리는 존재에게 도움을 받는 것은 에클레시아의 신도로 하기 힘들었다.

루비로즈 가문에 대한 자긍심과 에클레시아를 향한 믿음은 그녀를 지탱하는 삶의 요소였으니까.

“아무리 ‘어둠의 정령’이라고 해도 그는 나의, 나의 벗이니까.”

충격을 받은 듯한 타나토스의 모습을 떠올리며 눈을 떴다.

“더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해. 그들만 믿고 기다렸다가는 내가 죽을 수 있겠어.”

자신의 정령인 타나토스가 없었다면 자신은 죽었을 것이다.

기사들이 올만한 시간을 벌었다고 할지라도 로빈이 허튼 마음을 먹고 기사들을 보내지 않았다면 자신은 죽었을 것이다.

기사들의 배신으로 아버지가 밀려났는데 자신이 너무 나태하게 생각했다.

긴장감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역시 바쁘다고 미루는 것이 아니었어. 내가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을 얼른 가져야 해. 기사들에게 나의 안위를 온전히 맡기는 것은 어리석었어.”

자신을 지킬 방법을 찾다가 알게 된 것이 교황이 관리한다는 성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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