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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47화 (47/221)

047화 페루제 루비로즈의 친구 (1)

그날은 루비로즈가 18세였던 해의 어느 날이었다.

루비로즈 백작 가문을 그녀가 완전히 장악한 해였다.

그녀는 어떤 무늬가 있는 종이를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는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없는 자신의 서재에서 혼잣말했다.

“그래. 독실한 신자로 정령 하나 정도는 소환할 수 있겠지.”

신전에서 정의를 내리기를 정령이란 ‘정령계’라는 곳에 사는 존재다고 한다.

정령은 그 근원의 힘을 쓸 수 있었고 인간은 계약을 통해서 그 존재를 인간계에 불러서 쓸 수 있었다.

신전이 규정한 정령은 빛의 정령, 물의 정령, 불의 정령, 바람의 정령, 대지의 정령이다.

그녀가 본 종이에는 정령을 소환할 소환진이 그려져 있었다.

“정령과 계약한 신관이나 신전은 그만큼 신을 향한 믿음이 독실하다고 하니까.”

자신은 누구보다도 신을 경배하며 따르는 신자다.

자신이 정령과 계약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믿음이 부족했다는 뜻이나 그럴 리가 없다.

“나의 믿음이 부족하다면 더 노력하면 된다.”

물론 자신도 안다.

신전에서는 ‘믿음’과 소환 종이를 발동시킬 ‘마석’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믿음과 마석으로는 부족하다.

정령을 불러들일 수 있는 ‘친화력’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신전에서 침묵하고 있는 진실이며 신전의 도서관에 있는 자료의 내용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신에 대한 ‘믿음’과 ‘마석’, 정령에 대한 ‘친화력’이 필요하다.

“친화력이 부족하다면 그것을 가진 자를 내 사람으로 만들면 그뿐이지.”

사실 정령과 계약할 이유는 없었다.

가문을 드높이기 위한 자신의 계획에 정령은 처음부터 수단이 아니었으니까.

“일단 ‘내 평판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해볼까?”

아버지의 재혼을 환영하며 새어머니의 곁을 정성껏 모시는 의붓딸로 평판이 좋았다.

정령 하나와 계약하며 자신의 이미지에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평판은 좋으면 좋을수록 자신의 편을 만들기 쉽게 해준다.

신뢰감은 상대를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기 위한 좋은 요소니까.

그냥 정령 소환을 하는 이유는 한번 만들어 본 것이다.

“솔직히 그냥 궁금해서 하는 것이니까 ‘괜한 명분’을 만들 필요는 없나?”

그녀는 마석을 소환 종이에 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소환 주문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마크툽 카스트로폴로스.”

주문이 끝나자 소환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 빛은 점점 강해졌다.

그리고 무언가가 소환이 되었다.

“이제 되나 보네. 빛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니까 빛의 정령인가?”

자신이라면 정령 중 가장 상위에 있다는 빛의 정령이 어울리겠지만 다른 정령들도 괜찮았다.

빛의 정령이 가장 위에 있는 존재였고 다른 존재들은 다 같은 급이었으니까.

그래도 빛의 정령을 원했기에 마음이 기대감에 벅찬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진짜 빛의 정령이라면 그 어떤 등급이라고 해도 좋을 텐데 말이야.”

빛의 정령왕인 아후라마스타는 바라지도 않는다.

어찌 빛들의 왕이 계약하기를 바라겠는가.

그것은 과한 욕심이었다.

상급 빛의 정령인 헤메라도 좋았다.

책에 따르면 헤메라는 닭의 머리를 가졌으나 뱀의 목과 드래곤의 몸, 독수리의 날개, 물고기의 꼬리를 가졌다.

몸에서 나오는 빛은 매우 상서롭고 귀하여 존재만으로 주변을 풍요롭게 만든다고 한다.

“헤메라와 계약을 한다면 영지와 가문이 풍요롭게 되겠지.”

중급 빛의 정령인 벨레누스도 좋았다.

책의 그림을 보면 사자와 비슷했으나 달랐다.

사자의 몸을 가진 벨레누스는 빛나는 비늘이 몸을 감싸고 있으며 머리에 뿔이 하나 달려 있었다.

또한 겨드랑이쪽에 날개가 있어서 날 수 있다고 한다.

그 빛으로 상대가 옳고 그름과 진실됨과 거짓됨을 판단할 수 있다고 한다.

거짓된 자와 그른 자라 판단이 되면 저주를 걸 수 있다고 들었다.

“벨레누스와 계약을 하면 그 어떤 일도 오판하지 않고 실수하지 않을 것이니 그것도 좋아.”

하급 빛의 정령인 다그도 좋았다.

다그는 사슴을 닮았는데 뿔이 하나고 아주 아주 긴 꼬리가 있다고 한다.

그 꼬리에서 나오는 빛으로 아픈 ‘선한 인물’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한다.

“선한 사람만 치료할 수 있으니까 악한 놈들은 알아서 죽도록 할 수 있으니 이득이지.”

그녀답게 그녀는 ‘치료’에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흥미는 ‘나쁜 놈들을 자연스럽게 병사(병에 걸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사망한 경우)로 죽일 수 있음’에 맞춰졌다.

헤메라는 자신의 고유 능력뿐 아니라 벨레누스와 다그의 능력도 사용할 수 있었다.

벨레누스는 헤메라처럼 주변을 풍요롭게 할 수는 없지만 다그처럼 꼬리로 선한 인물을 치료할 수 있었다.

다그는 오직 치료만 가능했다.

“급한 상황에서 나를 보호하기 딱 좋고 말이야. 연약한 귀족영애로 나를 지킬 수단 하나는 있어서 나쁠 것은 없지.”

물론 그들 모두가 번개의 형상을 한 공격을 할 수 있었다.

위력은 달라도 인간에게는 엄청났다.

“게다가 하급이라고 해도 빛의 정령사라면 내 가치가 어마어마해지겠지. 내 사람들을 모으기도 훨씬 쉬울 거야.”

정령사는 귀한 존재다.

정령사가 되면 평생 먹고 살 걱정은 없다는 말이 있다.

그중에서 빛의 정령사는 극소수로 그 대우가 어마어마했다.

교황조차 예의를 갖춰야 할 정도로 귀했다.

기대감으로 물든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강렬한 빛은 점점 어두워졌다.

“뭐지?”

이상하게 일이 꼬였다.

잘못되었음을 알았으나 이미 소환진은 발동되었고 멈출 수 없다.

그리고 무언가가 소환되었다.

“이야! 이게 얼마만의 소환이야. 진짜 고맙네. 네가 나의 계약자?”

눈앞에 어떤 사내가 보였다.

자신과 같은 흑발과 사람을 빨아들일 것 같은 눈빛을 지녔다.

사람이라면 시선이 향할 수밖에 없는 외모는 사람을 현혹하는 악마처럼 느껴졌다.

그 정도로 매력적이다.

100만 중에 999,999명은 그의 미소에 빠졌을 것이다.

설령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아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인물이었다.

아쉽게도 그녀는 그에게 빠지지 않을 100만 중 하나였다.

어쩌면 천만 중 하나이지 않을까?

그녀는 껄렁거리는 말투에 양아치 태도를 보여주는 놈이 적어도 빛의 정령이 아닐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아니. 계약하지 않을 것이니 당장 돌아가.”

“그래. 계약? 응?”

그 존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자신을 깐 것인가? 그것도 자신을 보자마자?’

인간이 얼마나 시각적인 것에 약한지 알고 있다.

또한 자신이 그들의 눈에 얼마나 멋있는지 알고 있다.

“응? 다시 말해 줄래?”

“좋게 말을 하면 듣지 않는 존재구나. 알았어. 그러면 다시 말해 줘야지. 꺼져.”

그녀는 당당하게 꺼지라고 했다.

정령사가 된다는 것은 하늘이 내린 기회와 같거늘… 어찌 그러는지 모를 일이다.

“꺼지라고?”

“그래.”

그는 눈을 껌뻑거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한결같이 다정한 미소로 시작하여 다정한 말투로 끝났다.

“꺼져”라는 말이 착각처럼 느껴질 모습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그러는 것이야?”

“네가 누군지 모른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건 확실하다.

빛의 정령도 아니고 물, 불, 바람, 대지의 정령도 아니다.

정령왕을 제외한 정령들은 모두 하급, 중급, 상급 정령으로 나눠져 있는데 눈앞의 ‘저것’은 그 모습들과 전혀 달랐으니까.

“그런데 꺼지라고 한다고? 계약하려고 불러내자마자?”

“그래. 생각해보니 과했네.”

“그치?”

“시간 낭비를 하게 했구나. 미안하다. 그러니 지금 얼른 가렴.”

사내는 발을 동동거리며 소리를 쳤다.

“야! 내가 누군지 알지도 못하면서 꺼지라는 말부터 하는 것이 어디에 있어!”

“꺼지라고 하지 않고 가라고 했는데 귀가 잘못되었니? 뭐 어쩔 수 없지. 그러면 내가 몇 가지 물어봐도 될까?”

“그래! 그리고 귀가 잘못되었다니?! 초면에 너무한 거 아냐?”

“그래. 미안”

그렇다면 2가지 중 하나다.

그녀의 말에 그가 발끈하며 뭐라고 했지만 시큰둥했다.

괜히 정령 소환을 했다는 생각이 엿보이는 귀찮은 표정이었다.

“빛의 정령이야?”

“아니. 어디서 그런 반짝이들과 나를 동류로 봐?”

“그러면 물의 정령이야?”

“아니.”

“불의 정령이야?”

“아니.”

“바람의 정령이야?”

“아니.”

“대지의 정령이야?”

“아니.”

하나는 정령왕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둠의 정령이라는 것이다.

신전은 어둠의 정령을 악마의 사역마로 규정했다.

다른 정령들처럼 급에 따라서 정해진 모습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악마의 사역마’라는 수식을 그럴듯하게 했다.

그것은 세상에 굳어진 개념이 되었다.

그래서 어둠의 정령사는 악마를 따르는 숭배자 취급이었다.

“어둠의 정령이지?”

“맞아. 내가 그 어둠의 정령이야!”

“그래. 꺼져.”

그러면 그렇지… 혹시나 정령왕이었나 했는데 악마의 사역마였다.

이런 것들과 엮여서 좋을 것이 없었다.

가차 없이 서재를 나가려고 하자 그는 다급해졌다.

“잠깐! 지금 어둠의 정령이라고 까는 것이냐?”

“그래. 그런데 도대체 내가 몇 번을 꺼지라고 말하게 하는지 모르겠네. 다시 말해야 할까?”

그는 눈앞의 어린 소녀가 하도 꺼지라고 말해서 이름조차 소개를 하지 못했다.

멋있게 등장하고 싶었는데 당혹스러워서 구질구질하게 들러붙는 거머리가 되었다.

“저기. 나는 네가 원해서 소환이 된 거야. 그것을 잊으면 아니 된다고!”

“그래. 그런데 너를 보니까 원하지 않게 된 것을 어쩌라고?”

할 말을 잃게 했다.

맞는 말이다.

원해서 소환 종이를 발동했고 원하지 않아서 꺼지라고 한 것이니까.

맞는 말이기는 한데 참 기분이 나빠진다.

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보통, 어둠의 정령을 소환하는 인간들은 ‘어둠의 정령’과 계약을 해서라도 이루고 싶은 ‘강렬한 목표’를 지녔다.

나중에 ‘악마 숭배자’로 죽을 위험조차 감수할 목표였다.

그렇다면 자신은 무엇 때문에 그녀에게 소환이 된 것인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이야.”

“그래. 그건 네 사정이지.”

그녀는 서재의 문을 향해서 걸어갔다.

혼란스러워하는 ‘어둠의 정령’은 보지도 않았다.

“너는 목숨을 걸 정도로 갈망하는 것이 없느냐?”

그때 ‘어둠의 정령’이 물어본 질문이 들렸다.

페루제는 문의 손잡이를 잡기 직전에 손을 멈추었다.

그녀가 손을 거두고는 뒤를 돌아서 그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어둠의 정령’이 씨익하고 웃었다.

“있다. 내 혈육들을 죽여서라도 이루고 싶고 내 스스로를 갈아서라도 이루고 싶은 것.”

“그래!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나라면 그것을 이루게 해줄 수 있어. 무엇을 원해? 일국의 지배자가 되고 싶어? 너의 적들을 모조리 죽여서 이루게 해줄게! 아니면 누군가의 정보를 빼앗아 줄까? 너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게.”

“그런데 그건 네가 없어도 내가 이뤄낼 일이야.”

그녀가 아름답게 웃었다.

정말 아름다운 미소였다.

‘어둠의 정령’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가 있다면 저 미소가 아닐까 싶었다.

“네가 있어야만 이룰 수 있는 것이라면 차라리 포기하고 말지.”

“뭐?”

“네가 있어야만 이룰 수 있는 것을 포기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을 선택할 것이야.”

흔들림이 없었다.

그 어떤 아쉬움도 없었다.

그는 깨달았다.

정말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해낼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구나.

그는 시무룩해졌다.

마치 주인에게 혼이 난 강아지처럼 느껴졌다.

“인간계를 직접 구경하고 싶었는데 아쉽다.”

“계약해 줄까?”

변덕이었다.

계약할 마음이 없다가 약간의 마음이 생긴 것은 말이다.

이유가 없는 변덕이었지만 ‘어둠의 정령’은 숙였던 고개를 들며 눈을 반짝였다.

어린아이가 기대감에 찬 듯한 표정이었다.

“정말?”

“대신에 조건이 있어.”

“무엇인데?”

“네 멋대로 굴지 마.”

“당연하지! 어둠의 정령이라고 해도 정령이라고! 계약자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은 하지 않아!”

그가 흥분하며 말을 잘 듣겠다고 약조를 했다.

인간이 제발 계약을 해달라고 애원하는 경우는 많아도 정령이 애원하는 경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래? 좋아. 그러면 계약을 하지. 그런데 너는 어느 등급이야?”

“어?”

그녀는 어벙한 정령의 표정에 생각했다.

모습이 다른 것처럼 정령들끼리 서로 느끼고 교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여겼다.

“아, 모를 수도 있나? ‘어둠의 정령’은 각자 모습이 다 달라도 다른 정령들처럼 하급, 중급, 상급으로 나눴거든. 닉스, 히프노스, 타나토스라고 부르고 말이야.”

“상급 정령인 타나토스야.”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해.”

“계약해 줘서 고마워.”

그는 기쁜 마음으로 정령계로 돌아갔다.

어둠의 정령들이 있는 구역으로 말이다.

상급 정령인 타나토스가 그에게 다가왔다.

“에레보스님, 계약을 축하드립니다.”

“그래.”

“어둠의 정령왕과 계약한 인간이 있다니 놀랄 일이군요.”

“그렇지. 기대된다.”

그는 상급 정령이 아니라 정령왕이었다.

* * *

처음에는 정령왕임을 밝힐까 했지만 그러면 처음의 반응처럼 깔 것 같았다.

“감히 나를 차려고 해? 너도 곧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될 걸?! 안달이 나게 느긋하게 도와줘야지.”

“계약을 거절하려고 했다고요? 정령왕과의 계약을요?”

타나토스가 당혹스러워하며 물었으나 그 질문은 에레보스에게 닿지 않았다.

어둠의 정령들은 난리가 났다.

인간들은 어둠의 정령을 악마의 사역마 취급을 했으나 실상은 달랐다.

어둠의 정령은 빛의 정령과 같은 급으로 물, 불, 바람, 대지의 정령은 그 아래에 있었다.

어둠과 빛 사이에서 그들이 탄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뭐, 곧 나를 찾게 되겠지.”

“물론입니다. 인간이란 욕망에 약한 존재니까요.”

“역시 그렇지?”

처음에는 계약 거부를 했으나 곧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찾게 될 것이다.

원하는 것을 하나 이뤄지면 다른 것을 원할 것이고 점점 원하는 것이 늘어날 것이 뻔했다.

“나의 가치를 알고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질 거야!”

“그럼요. 정령 중 가장 고귀한 분이 아닙니까.”

타나토스가 그를 치켜세워 주자 에레보스가 자신감이 생겼는지 당당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과 동급인 빛의 정령왕 아후라마스타가 있었으나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자신을 타나토스로 속인 것도 말이다.

* * *

그리고 곧 그녀는 에레보스를 불렀다.

“무엇을 원해?”

“그냥 낮에 구경이나 다녀.”

이상한 인간이다.

자신을 자주 불렀으나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곧 자신의 욕망을 드러낼 것이라고 확신했는데 아니었다.

“무엇을 원해?”

“돈주머니 가지고 하고 싶은 것을 해.”

그녀는 언제나 자신에게 인간계를 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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