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46화 (46/221)

046화 페루제 루비로즈의 정령친구가 되기 전에

그 존재는 어둠의 정령왕인 에레보스였다.

그는 지루해하는 듯하기도 했고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듯하기도 했다.

오직 어둠과 에레보스만 있는 듯한 공간에 엄청난 빛이 나타났다.

“아직도 의욕이 없어?”

“아후라마스타!”

그 빛은 빛의 정령왕인 아후라마스타였다.

반짝이는 빛에서 나오는 음성에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빛의 정령왕은 그대의 일이나 하지. 아직은 그대의 시간이니까.”

“나의 권속들이 나를 대신하여 열심히 일해 주고 있으니 잠시 시간을 낼 수 있네. 나의 벗이 힘들어 하는데 기운을 줘야지.”

“친구는 무슨… 다른 정령왕들에게 가. 그들은 너를 언제든 환영해 줄 거니까.”

빛의 정령과 어둠의 정령은 세상이 만들어지던 때에 처음으로 생긴 존재들이었다.

그 빛과 어둠 속에서 대지, 물, 바람, 불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생명이 탄생한 것이다.

에레보스의 말을 듣고 빛의 형체가 잠시 갸우뚱거렸다.

곧 아후라마스타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가끔 그대는 참 웃기는 소리를 해. 유머가 있다고 해야 하나?”

“뭐?”

“그대는 그대의 권속을 친구로 삼나? 인간들이 그들을 정령왕이고 부른다고 해도 그들과 우리는 다르지. 우리는 그들을 만든 존재고 그들은 우리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니까.”

소위 인간들이 말하는 4대 정령보다 빛과 어둠이 위에 있는 이유다.

그들이 태초의 시작이었고 훗날 세상이 멸망하면 그들을 중심으로 세상은 다시 만들어질 것이니까.

인간들이야 빛의 정령을 떠받들고 어둠의 정령을 악마의 사역마 취급하기 바빴으나 실질적으로 어둠이 정령과 빛의 정령은 그 격이 같았다.

“우리 위에는 신만이 계시지. 그 외에는 우리 아래에 있으니 어쩌겠나? 내 친구는 그대뿐이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신을 믿나? 인간들이 신처럼 떠받들며 모시는 아후라마스타가?”

“정령왕들은 때가 되면 소멸하고 새로운 정령왕이 탄생하지. 우리는 탄생할 때에 신의 힘을 느끼지 않았는가?”

“…….”

에레보스의 비아냥에도 아후라마스타가 담담하게 말하자 할 말이 없어졌다.

실제로 인간들이 말하는 전능하신 신을 만난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탄생의 순간에 자신들의 ‘정령왕’이라는 직위와 책무를 받아들일 때 자신들에게 들어온 힘은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한참 서로 침묵을 하다가 아후라마스타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또 빛 속으로 가고 싶은가?”

“빛 아래에서 살아가는 기분을 느껴보고 싶어.”

어둠과 빛.

서로가 없으면 안 될 존재인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서로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었다.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이 있을 수 없었고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있을 수 없었다.

에레보스와 어둠의 정령들에게 허락된 빛은 하늘의 달빛뿐이었다.

“이건 진짜 불합리해! 우리는 빛을 누릴 수 없어. 기껏해야 그림자에서 멀뚱멀뚱 바라보는 거지. 닿는 것조차 허락이 되지 않는다. 다른 놈들은 잘만 서로 돌아다니는데 말이야.”

“그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나는 그 이치가 너무 싫어.”

4대 정령이라고 불리는 물의 정령, 대지의 정령, 바람의 정령, 불의 정령은 인간에게만 보이지 않을뿐 잘만 서로 아우르며 지냈다.

그들보다 격이 높다는 그들은 서로의 영역에 있는 것이 불가능했다.

단하나의 방법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 방법은 바로 정령 소환이 되어서 계약을 해내는 것이었다.

“그대는 아니더라도 그대의 권속들이 인간과 계약을 맺은 일들이 있었지 않은가? 부족한가?”

“다들 복수니, 야망이니 하면서 힘을 달라고 했던 것들 말이야?”

“그래. 목적이 무엇이었든 그대를 낮에 빛 아래에 있게 해주지 않았는가.”

권속이 인간과 계약은 하면 그 권속의 힘만큼 그도 빛 아래에 있을 수 있었다.

에레보스는 ‘어둠의 정령’과 계약했던 인간들을 떠올리며 차갑게 말했다.

“이제는 ‘악마의 사역마’라며 우리와 계약을 하려고 들지를 않아. 계약하겠다고 나서는 것들도 미친놈 중에 미친놈들이고 말이야. 그것들 때문에 ‘어둠의 정령’의 힘으로 시체가 쌓여서 산이 된 것도, 강이 핏물에 붉게 변한 모습도 잘 봤지.”

“인간은 참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는 존재야. 인간 계약자의 요구를 들어준 것인데 그대와 그대 권속을 악마의 사역마 취급이라니 할 말을 잃게 만들어.”

아후라마스타는 인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기네들이 원해서 소환을 해놓고 악마의 사역마 취급이라니 말이야.

“아후라마스타 네 말이 맞아. 게다가 ‘어둠의 정령’으로 인해 죽은 인간들보다 인간이 죽인 인간의 수와 그 외의 생명의 수가 훨씬 많잖아. 그들은 자신의 행동을 뒤돌아보지 않고 ‘어둠의 정령’만 탓해.”

그들에게 인간이 얼마나 죽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만물의 탄생’ 근원인 그들에게 인간이나 다른 생명이나 그 가치는 같았다.

모든 생명은 언젠가는 죽으며 약육강식이라는 세상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 안에서 살아가야 했으니까.

“어둠의 정령들도 변해야 해.”

“변해야 한다고?”

“그래. 일단 성향이 너무 착해.”

말이 좋아 ‘착하다’라고 포장하지 어둠의 정령들은 너무 자기주장이 없었다.

계약자를 좋아해도 너무 좋아했다.

에레보스가 자기 권속의 편을 들었다.

“어둠 속에만 있다가 빛으로 나오니 세상이 그리 좋을 수 없어서 그래. 우리에게 계약이란 즐거운 여행을 하는 것과 같으니까. 어둠 속에서 낮의 세상을 구경하게 해 준 계약자가 은인처럼 보이기도 했을 거야.”

“변명 그만해.”

아후라마스타가 단호하게 에레보스에게 말했다.

계약자를 위해서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퍼주는 스타일?

밀고 당기는 법이 없다.

그러니까 온갖 허접한 놈들이 이들을 부르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감안해도 말이야. 어둠의 정령들은 착해도 너무 착해. 그리고 자기 계약자가 쓰레기인지, 얼마만큼 쓰레기인지 보지도 않고 좋다고 계약을 하지.”

“알아. 그리고 계약자가 너무 강하게 원하니까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는 거.”

다른 정령들처럼 융통성 있게 힘이 부족해서 더 못한다느니, 여기 장소가 자신과 상성이 맞지 않는다느니 등 수많은 이유를 대면서 어물쩍 넘어가기도 해야 했다.

그런데 어둠의 정령들은 다들 의욕이 넘쳐서 자신의 마음과 힘을 다해서 계약자를 도왔다.

결국, 계약자가 원하는 것을 다해 주다가 욕만 먹고 악마의 사역마 취급을 받게 되었다.

“어둠의 정령들은 하급, 중급, 상급 정령을 구분할 수 있는 모습이 없지. 정해진 모습이 없고, 정해 놓은 능력이 없으니 인간들이 그리 생각하는 것도 어떤 면에는 이해가 되네. 이제라도 바꿔 보는 것은 어떤가?”

“뭐? 왜 그래야 돼? 어둠 속에만 있는 아이들이야. 자신의 원하는 모습을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방향으로 힘을 쓸 권리마저 박탈하라고? 역대 어떤 어둠의 정령왕도 그리하지 않았어.”

에레보스가 순간 욱했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을 부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권속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모른다.

특히 낮에 다른 속성의 정령들끼리 즐겁게 노는 모습은 보면 더 초롱초롱하게 바라봤다.

그런 상황에서 그나마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한 모습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꾸미는 것과 자신의 취향에 맞게 힘을 쓰는 것이었다.

빛의 정령왕은 자신이 어둠의 정령들을 배려하지 못했음을 인정했다.

“알았어. 미안해. 사실 모든 사단의 원인은 정령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는데 너희보고 바꾸라는 말 자체가 잘못한 거지.”

정령들은 계약자의 소망을 이뤄주는 존재다.

계약자들이 정령을 악하게 이용하는 것이 문제지, 계약 정령의 책무를 다하는 정령들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도구는 도구일 뿐.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그것이 살인자의 칼이 될지, 요리하는데 쓰이는 칼이 될지 달라지니까.”

“맞아. 돈도 마찬가지지. 인간들은 삶을 편히 살기 위해 만든 ‘돈’을 악한 것으로 몰아세운다니까. 그것을 쓰는 사람에 따라 그것도 달라지는 것인데 말이야.”

아후라마스타의 말에 에레보스가 맞장구를 쳤다.

이것은 ‘돈’을 가지고 악한 짓을 한 사람을 탓하지 않고 ‘돈 자체’를 악으로 몰아세우는 것과 같았다. ‘수단’을 사용하는 인간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수단이 선한 용도로 이용될 수 있고 악한 용도로 이용될 수 있다.

다수의 사람은 그것을 간과한다.

인간이, 자신이 악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으니까.

“인간의 추악함은 보면 볼수록 그 끝을 알 수가 없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는 남 탓을 하기 좋아하는 종족. 자격이 있는 인간이 나타난 적도 없지만 나타나더라도 그들 앞에 서지 않을 거야.”

“그래도 나는 세상 속에서 한 번 살아가고 싶어. 기회가 된다면 나가고 싶어. 비록 그것이 피로 얼룩진 세상이라고 해도 말이야.”

비록 에레보스가 본 낮의 세상은 피로 얼룩졌다.

“그 잔악함 속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으니까.”

권속의 시선이지만 아주 기적적인 확률로 인간의 선행을 보는 경우가 있었다.

자신을 희생하여 약자를 구하는 그런 일이 말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사람들의 경배를 받는 ‘빛의 정령왕’은 인간을 혐오하며 싫어했다.

반면에 사람들의 배척을 받는 ‘어둠의 정령왕’은 ‘인간의 추악함’을 인정함에도 낮의 세상을 경험하기를 원했으니까.

그들은 인간을 욕하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세상에서 자신과 동등한 유일한 존재였으니까.

아후라마스타가 떠나고 그가 혼잣말했다.

“내가 계약하면 내 권속들도 그 영향으로 빛 속에 있을 수 있게 되는데 말이야. 그들에게도 빛 속에서 자유를 누리게 해주고 싶다… 물론 불가능하겠지.”

에레보스는 자신이 존재하면서 한 번도 직접 인간과 계약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인간과 직접 계약하겠다는 희망을 버린 지 오래였다.

몇 시간 후에 인간의 소환으로 계약하게 될지 꿈에도 몰랐다.

이것이 그는 낮의 세상을 경험하고 싶은 소망을 이루게 되기 몇 시간 전의 일이다.

페루제 당사자는 전혀 모를 이야기가 숨겨져있다.

소환 종이와 마석이 준비되었다는 전제하에 정령소환에는 몇 가지 과정이 있다.

먼저 정령을 소환하고 유지할 재능 즉 친화력이 있는지 파악을 하는 것이 첫 번째다. 소환종이 1장당 하나의 정령을 소환할 수 있었다.

만약 1가지 속성만 가지고 있다면 별다른 문제는 없다.

문제는 2가지 이상의 속성을 가진 경우인데 이런 경우에는 ‘소환자가 원하는 속성’의 정령이 우선으로 소환된다. 설령 다른 속성에 관한 친화력이 훨씬 뛰어날지라도 소환자의 소망을 넘어설 수 없다.

“왕! 왕! 왕!”

[앗싸! 나도 소환된다! 인간세계 구경다니며 놀러다녀야지!]

그리고 빛의 정령을 소환하고 싶다는 의지에 따라 정령계에 형성된 소환진을 향해 무언가가 달려왔다. 사자처럼 보이는 몸통에 개처럼 느껴지는 존재였다. 그 존재는 ‘빛의 정령’인 벨레누스였다. 꼬리를 크게 흔들었다. 곧 만나게 될 계약자에 대한 기대감이 그만큼 컸다. 몇 발자국만 더 가면 계약자를 만날 수 있었다.

“미안하다!”

“깨깽!”

[꾸액!]

누군가가 벨레누스의 뒷목을 잡고 던졌다. 그는 뒤로 나뒹굴었다. 그리고 벨레누스를 던진 존재는 소환진으로 나가버렸다. 당혹스러워서 굳었던 벨레누스가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잉!”

[어둠의 정령왕이 양아치다! 내 계약자를 빼앗았어!]

에레보스는 양아치짓으로 페루제 루비로즈와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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