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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45화 (45/221)

045화 신성한 방어구

‘신성한 방어구’는 성도의 교황청에서 보관하고 있는 성물 중 하나였다.

성물이 선택한 신실하고 고귀한 존재는 그 성물을 사용할 수 있으며, 그 성물은 자신이 선택한 주인을 지킨다.

그 어떤 검도, 창도 성물의 방어막을 뚫을 수 없다.

혼인 전, 아니, 아버지에게 혼인 상대를 찾아내라고 명령을 하기 전이었다.

평소에는 그 어떤 창과 검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소드마스터가 신경이 쓰였다.

소드마스터는 무의 끝에 도달한 존재가 아닌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필요는 있었다. 자신의 의심을 살만한 일들도 있었으니까.

“소드마스터… 나의 편이면 정말 든든하지만 적이 된다면 상대하기 힘들지.”

자신의 아랫사람이 소드마스터라도 인간은 언제든 상황에 따라 타인을 배신할 수 있었다.

내 편이라면 정말 좋은 패다.

반대로 적이 된다면 최악의 패가 되는 양면성을 지녔다.

“사람이란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닌가. 영원한 내편은 없다고 생각해야 함이 옳지.”

소드마스터와 싸워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공격을 막아 낼 방도는 없는가?

“내 편도 완전히 믿기 어려운 상황에서 내가 남편감으로 생각하는 인물도 소드마스터다. 그와 척을 지는 것은 예정된 일이겠지.”

지혜로운 실리는 주인의 불안을 눈치채고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자신이 신처럼 여기는 분이 그런 작은 불안조차 느끼지 않았으면 했다.

“아가씨, 성도에 보관된 성물들은 자신이 선택한 주인을 지킨다고 합니다. 설령 소드마스터의 검이라고 해도요.”

“성물이 선택한다고?”

자신은 무언가를 선택하는 존재였다.

누군가 설령 성물이라고 해도 자신이 선택당하는 입장이 될 수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굴이 자연스럽게 약간 찌푸려졌다.

“네.”

“내가 성물의 주인이 될 수 있겠느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합리적인 이성은 그 성물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소드마스터도 자신을 공격할 수 없게 하는 방어구를 어디에서 구한단 말인가.

그녀는 귀한 성물을 ‘방어구’로 치부했으며 이는 그녀다운 모습이었다.

실리는 자신의 구원자라고 할 수 있는 루비로즈가 성물의 선택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녀에게 자신의 주인은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존재였으니까.

“부인께서 성물의 주인이 되실 수 없다면 이 세상에 주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 한번은 해 봐도 좋겠지.”

그녀는 성도에 방문했다.

고위급 신관들이 그녀를 맞이했는데 장관이었다.

다들 격식에 맞게 누가 봐도 귀빈을 대접하기 위한 모양새였다.

“페루제 루비로즈 영애, 왕국의 일로 바쁜 인사가 아닌가? 여기에는 어쩐 일인가?”

“제 일이 바쁘다고 해도 신을 향한 제 믿음은 굳건합니다.”

“그럼! 내가 영애의 신실함은 누구보다 잘 알지.”

교황과 그녀가 서로 손을 맞잡으며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가 교황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긴히 드릴 말씀도 있고요.”

교황이 그 말에 잠시 눈이 크게 떠지더니 호탕하게 웃었다.

“오랜만인데 신전에 기도만 하고 가려는 것은 아니지? 내 집무실로 가서 차나 한 잔하게나.”

“교황 폐하의 귀한 말씀을 듣게 될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교황의 집무실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몸을 따뜻하게 데웠다.

차를 좋아하는 그녀를 알기에 교황은 그녀가 차를 음미할 시간을 줬다.

그렇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래. 무슨 일인가? 그리 작게 말하면서 원했던 말이 무엇인가?”

그는 급했다.

그녀가 어떤 큰일을 도모하려고 함을 느낀 것이다.

그것도 맞았다.

자신은 소드마스터를 견제할 용도의 성물을 얻기 위해 온 것도 있었지만 다른 일도 있었다.

“폐하, 예전에 무도한 알펜 왕국으로 인해 이 성도가 더러워지지 않았습니까? 그 굴욕을 갚아주고 싶지 않습니까?”

“그게 가능한가?!”

교황이 흥분하며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망할 알펜 국왕과 벨로나 공작만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화가 나서 잠이 오지 않았다.

카엘족 용병들이 없었다면 그들에게 잡혀서 온갖 굴욕을 당했으리라.

그 상상하면 그들을 찢어서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녀가 그 모습을 보고 담담하게 차를 한입 마셨다.

그리고 우아하게 웃었다.

“네. 물론입니다. 저는 인내할지언정 패배하는 싸움은 하지 않지요. 아시지 않습니까?”

“그, 그렇지. 자네는 그런 사람이지.”

너무 당당하게 말을 하니까 교황이 말을 더듬었다.

그 기세에 밀리는 기분이었다.

교황도 산전수전 다 경험한 인물이었으나 유독 페루제 루비로즈와 있으면 고개를 숙이고 싶은 착각이 들었다.

“벨로나 공작과 혼인을 하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서 혼인계약서를 쓰려고 하는데 교황님의 인장이 필요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신전의 특별한 종이도 함께 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백 장이고 천 장이고 주겠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인장을 찍어 줘야지!”

신전에서 만든 특별한 종이와 교황의 인장이 있는 계약서는 아무리 양측이 합의하고 계약을 수정하려고 한다고 해도 변경을 할 수 없었다.

교황의 승인이 있어야 변경이 가능했다.

그것은 신성력이 깃든 계약서와 교황의 권위로 맺어지는 계약이었으니까.

“말만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지원은 그것이 무엇이든 다 해주겠네.”

“교황 폐하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벨로나 공작을 엿 먹이고 내가 다 가지려고 한다는 말과 같았다.

그녀가 굳이 오랫동안 단교되었던 알펜 왕국의 공작과 혼인하려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겨우 공작 가문 하나를 가지기 위해서?

아니다.

그녀라면 능히 알펜 왕국 하나는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곧 알펜 왕국의 국왕도 엿 먹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공작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인데?”

“그 집안의 대소사는 공작의 고모가 다한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자기 아들을 공작으로 세우고 싶어 하는 고모가요.”

“아하! 그러면 공작의 부인이 세력이 없는 집안 출신이었으면 하겠군.”

“판을 잘 짜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망할 공작 놈의 이야기만 들어도 혈압이 오르는 기분이라 일부러 관심을 끊어 내려고 노력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들었던 것 같았다.

오랫동안 재혼할 집안의 여인을 찾지 못했다고 말이다.

재혼하려고 했던 집안마다 불운한 일이 생겨서 파혼되었다고 들었다.

신부의 죽음이라든가, 상대 가문의 가주와 그 일가가 죽는다든가 하는 그런 일이었다.

교황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혹시 그들의 죽음에 자네가 연루되어 있나?”

“그게 무슨 소리신지요? 그들의 죽음이라니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자 교황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그들을 죽인 것이 진실이라고 해도 그는 침묵할 것이고 그녀가 그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는 이 일과 관련해서 침묵할 것이니까.

“그리고 신전의 비호를 받을 수 있는 칭호와 성물이 필요합니다.”

“신전의 비호를 받을 수 있는 칭호는 얼마든지 줄 수 있네. 그러나 성물은 다른 문제야. 성물은 자신이 주인을 선택하니까. 자네 부하에게 이미 말했던 사항이지만 말이야.”

교황이 난감해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가 원하는 것은 전부를 해 주고 싶으나 성물은 다른 문제였다.

신이 내린 성물에게 자신이 억지로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성물과는 말도 통하지 않을뿐더러 그런 행동은 신에게 도전하는 행위일 것이다.

“갑자기 저에게 칭호를 내린다면 모두가 그것을 거짓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모두가 인정할 명분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맞는 말이지만 말일세.”

맞다.

세상의 사람들이 그녀와 신전의 긴밀한 관계를 알고 있었다.

군사적으로 대놓고 의지하는 형국이었으니까.

그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서 ‘성녀’ 혹은 ‘성모’ 칭호를 내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성녀’와 ‘성모’는 성덕을 쌓은 여인에게 주는 칭호였다.

그 둘의 차이는 간단하다.

성녀는 미혼이고 성모는 기혼 여성이었다.

그리고 성물의 선택을 받는다는 것은 누구도 반박하지 못할 증거였다.

페루제 루비로즈가 누구보다 성덕을 쌓았으며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는 증거.

그것은 자신과 루비로즈 가문의 격을 한층 높여 줄 것이며 권위를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한번 도전할 기회라도 주십시오.”

“알겠네.”

교황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가 한숨을 쉰 이유는 그녀가 성덕을 쌓았다고 도저히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가문을 얻기 위해서 죽인 사람만 세어 봐도 성덕하고는 거리가 먼 여인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당당하게 성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교황만이 문을 열 수 있는 보관고 앞에 당도했다.

그가 문 앞에 손을 대자 문에 새겨진 무늬에 빛이 나며 열렸다.

“여기일세. 혹시라도 반응하지 않아도 실망하지 말게.”

“알았습니다.”

귀걸이, 반지, 목걸이, 발찌 등 다양했다.

모두 순금의 색이었다.

그녀는 무심하게 그것들을 보다가 한 팔찌에 시선이 닿았다.

홀로 맨 끝자락에 외롭게 있는 검은색의 팔찌였다.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을 연상케 하는 팔찌는 단박에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주저하지 않고 그 팔찌를 향했다.

이에 교황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그것은 건들지 말게! 그것은!”

그가 말을 다 끝내지도 못했는데 그녀가 팔찌를 자신의 팔에 찼다.

그리고 곧 팔찌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웅~ 웅~ 웅~

“어, 어떻게 저런 일이?!”

“하?”

교황은 너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고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에 약간 짜증이 났다.

팔찌의 색이 점점 옅어지더니 황금색으로 변한 것이다.

“검은색이 마음에 들었는데 왜 변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말이네. 아니네.”

그것은 ‘타락한 성물’로 착용자를 사악하게 만드는 악랄한 것이었다.

어쩌다가 사람들을 타락하게 만드는 존재가 되었는지는 관련 기록이 모두 말소되어서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이것을 착용한 사람은 그 누구라도 미쳤다.

그리고 자기가 억누르고 있던 욕망에 취해 사람을 해치고 다녔다.

그 누구도 예외는 없었다.

타락한 대가로 착용자에게 큰 힘을 줬으나 그 대가로 방어 능력이 없었다.

그 힘으로 타락한 성물의 착용자들을 죽이는데 언제나 큰 희생이 따랐다.

다시 말하자면 성도 역사상 이런 일은 처음인 것이다.

“신께서도 제 신실함을 아셨나 봅니다. 그러면 혼인 후에 정식으로 ‘성모’ 칭호의 교지를 내려주시지요.”

“알겠네.”

교황은 당당하게 보관소를 나서는 그녀를 한참 멍하니 바라봤다.

타락한 성물이 정화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사람들은 몰랐으나 성물들은 나름대로 자아가 있었다.

타락한 성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오랜만에 자신을 착용한 인간에게 흥미를 가졌다.

—좋아! 내면에 있는 욕망을 드러내거라! 내가 그것을 모두 이루게 해주마!

타락한 성물은 자신의 신성력을 악하게 변환하여 착용자에게 힘을 줬고 모든 착용자는 예외없이 그 힘이 주는 쾌락에 취했다.

성물은 이번에도 그리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

성물은 당혹스러웠다.

—왜 이러지? 이럴 리가 없는데?

수많은 세월 동안 많은 인간을 타락시키면서도 이런 인간은 없었다.

—이렇게 자기 욕망을 감추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하고 산 사람이 있는가? 욕망을 이루기 위한 과정조차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는 인간이 있을까? 아니야. 그런 존재가 있을 리가 없어. 인간! 너의 과거까지 전부 보아 주마! 하나라도 숨겨 둔 욕망이 있겠지.

성물은 이딴 인간이 있을 리가 없다며 페루제의 과거까지 파헤치며 숨겨 둔 욕망을 찾으려고 했다.

그리고 곧 좌절했다.

—정말 억누르고 참는 욕망은 하나도 없다니…….

충격과 놀람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과거를 보면서 깨달았다.

—나, 정말로 나쁜 짓을 했구나.

정말 자기 욕망대로 사는 사람의 과거를 보고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게 된 것이다.

이는 스스로를 정화하도록 했다.

—성물의 주인을 지키는 본분을 다해야지. 이미 선택한 주인은 바꿀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어.

타락한 성물의 뜻하지 않은 반성으로 페루제는 성모 칭호를 얻게 된 것이다.

“신께서 내 노력을 알아주시다니 정말 감동이야.”

페루제가 신께 감사드릴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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