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화 옅은 의심
알펜 왕국의 수도로 떠나기 전, 페루제 공작부인은 자신을 따르는 소드마스터 중 하나인 로빈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출발할 준비는?”
“언제든 출발하면 됩니다.”
“메디치 백작령과 인접한 영지의 영주들에게 호감을 사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자신이 수도로 향하면 로빈은 자신이 준비한 재물들을 가지고 메디치 백작령 인근의 영주들과 접촉을 할 것이다.
자리를 잡는 동안에 그들과 척을 지는 것보다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나았다.
자리를 완전히 잡으면 그때는 상황에 따라 칼을 들어야 했다.
“물론입니다. 저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의사가 있을 시에 필요한 협정들과 그 인력들도 함께 할 것입니다.”
“그래. 준비가 잘 되고 있으니 마음이 좋아.”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능청스럽게 웃는 그를 바라봤다.
참으로 상대의 긴장감을 풀리게 하는 허술함이었다.
그게 그의 무기 중 하나겠지만 말이다.
“로빈.”
“네.”
“그대가 나에게 요즘 불만이 많다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로빈의 웃음이 서서히 사라지더니 얼굴이 경직되었다.
그런 그를 보고는 그녀는 무심하게 차를 마셨다.
“그냥 여기저기서 그대에 관한 이야기가 들려서 말이야.”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주군과 루비로즈 가문을 위한 것입니다.”
주군과 루비로즈 가문을 위해서!
그것은 참으로 감미로운 변명이었다.
한번쯤 넘어가 주고 싶어지게 만드는 말이었다.
“아하?! 나와 루비로즈 가문을 위해서 왕을 은밀히 만났나? 나 모르게?”
“그것을 어찌?!”
라스타 왕국의 왕이 실질적인 권력이 없는 허수아비라고 할지라도 그 상징과 권한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대도 아는 것처럼 나의 눈과 귀는 어디에나 있지. 아는 사실을 왜 모르는 것처럼 놀라나?”
“주군!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다 설명하겠습니다.”
“닥쳐. 내 말 끝나지 않았어.”
과연 소드마스터와 왕이 비밀리에 만나서 불온한 계획을 획책하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강력한 무력과 군의 지휘권한을 지닌 소드마스터와 왕이 무언가를 도모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았다.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
감히 가문의 군대를 이용해서 수작질을 부리려고 한 정황을 드러내다니!
루비로즈 가문의 군대가 저놈에게 이용을 당할 수 있었다니!
용서가 되지 않았다.
“상황에 따라서 자네는 먼저 군대를 움직이고 후보고할 권한이 있지. 루비로즈 가문의 군대를 말이야. 아니야?”
“아닙니다! 제가 왕을 만난 것은 맞으나 결단코 사특한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로빈의 얼굴은 흙처럼 어두워졌다.
자칫하면 그동안 이룬 것들을 모두 잃을 수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단호하게 말했다.
“불순한 의도가 없었다? 그러면 어찌 나에게 보고를 하지 않았지? 왜 네가 멋대로 행동을 했느냐 이 말이야.”
“국왕 폐하께서 비밀리에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군께서도 오실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나도 비밀리에 불렀다고 했다?”
“맞습니다.”
어디서 그따위 말을 변명이라고 하는지 더 화가 나면서 머리가 차가워지는 기분이다.
왕이 그를 왜 불렀는지 이유는 더는 궁금하지 않았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자신이 알게 뭐란 말인가.
자신이 할 일은 하나였으니까.
“그대도 알 것이야. 나를 모시는 소드마스터는 그대만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말이지.”
“물론입니다.”
“그래. 그대는 여기서 손을 떼. 그대 말고 할 사람은 있으니까.”
로빈은 물러설 수 없었다.
이것은 앞으로 루비로즈 가문이 주도할 정책들에서 배제하겠다는 의미였으니까.
권력에서 밀려난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어깨에 자신의 가족과 나아가서 카엘족의 미래가 달려 있었다.
목표를 향해서 이제 반 정도 왔을 뿐이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다.
“주군! 제가 부인의 믿음에 불신을 심어드려서 송구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명령을 거둬 주십시오.”
“그대도 말했잖아. 불신을 네가 나에게 줬다고 말이야. 그런데 내가 왜 그래야지?”
그가 순간 움찔했다.
서늘한 주군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왜 네가 해야만 하는데? 네가 카엘족의 혼혈이라서? 네 아들이 붉은 눈으로 태어나서? 그게 지금 상황과 무슨 상관인데?”
“주군! 제발 용서를 해주십시오! 주군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들이 카엘족에게 우호적이지 않은데 어찌 그들이 상관이 없다고 하십니까!”
로빈은 ‘붉은 눈’의 일족, ‘최초의 살인자’의 후예라고 하는 전투민족 카엘족의 혼혈이었다.
다행히 그는 일반인인 어머니를 닮아서 눈이 붉지 않았으나 슬프게도 그의 아들은 붉은 눈을 타고났다.
“당신을 따르는 소드마스터들은 카엘족의 삶이 나아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인사들입니다. 자칫 그들이 다시 지옥으로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내 사람들이 카엘족이라고 배타적으로 굴 사람들이 아니잖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단다.”
교황이 그들의 원죄를 사해 줬다고 선언해도 사람의 인식이 그리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도적질하거나 뒷세계에서 죄를 짓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카엘족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는 자들도 많았다.
“그리고 카엘족들은 지금도 세상이 좋아졌다고 하는데 왜 너만 부족하다는 듯이 구니? 그건 아니지 않니? 욕심이 과해.”
“주군! 어찌 이러십니까!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주군을 위한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네놈의 자식이 가질 권력과 부, 명예를 위해서였겠지!”
서로 목소리를 높였다.
당장이라도 밖의 기사들을 불러서 저놈을 저택에서 내치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밖의 마법사들을 불러서 저놈을 공격하고 싶었다.
그리지 않는 이유는…….
똑! 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열렸다.
한 여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아름다운 금발에 페루제를 닮았다.
조금 순해 보이는 인상이었으나 분명히 페루제를 닮았다.
“우리 차나 마셔요! 어머! 자기야. 왜 무릎을 꿇고 있어? 언니 이게 무슨 일이에요?”
“여보. 오늘은 그냥 가.”
“왜? 언니 말해 주세요. 그이가 무슨 죄를 지었나요?”
티와 간식을 가지고 집무실로 들어온 여인은 소드마스터 로빈의 아내이자 페루제의 동생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델, 너는 참으로 네 어미를 닮았구나. 네 어미처럼 때를 잘 맞춰서 오는 것이 같아.”
“언니, 그런 말은 나중에 하고요. 무슨 일인데 이이가 이렇게 무릎까지 꿇고 있어요?”
이름은 아델이며 페루제의 이복동생이었다.
그녀는 당혹스러워하며 남편과 언니를 번갈아가면서 봤다.
놀란 마음에 차와 간식을 든 쟁반을 내려놓지도 못했다.
“네 남편이 나를 배신하려고 했다.”
“배신이요?”
“주군! 오해입니다!”
그녀는 언니의 말에 놀란 듯이 눈이 커졌다.
물론 로빈은 부인했다.
두 사람들을 잠시 본 그녀는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쟁반을 페루제 앞에 두고는 태연하게 말했다.
“언니도 참… 그이가 언니를 배신할 이유가 어디에 있어요. 배신하려고 했으면 언니가 제 아들을 입적한 후에 했겠지요. 지금은 때가 맞지 않잖아요.”
“뭐?”
“여보!”
로빈은 아내의 말에 경악했고 페루제는 동생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대놓고 내 남편이 반역에 뜻이 있어도 자기 아들을 루비로즈 가문에 입적한 이후의 일이라고 말을 했으니까.
나중에 배신할 것이니 차라리 그냥 지금 죽이라는 말과 다를 것이 없었다.
“우리 애가 아직 루비로즈 가문의 아이도 아닌데 이이가 퍽이나 언니를 배신하겠어요. 언니도 자잘한 것은 신경을 꺼요. 피곤해지니까.”
“하!”
정말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너무 당혹스러우면 말을 잊어버린다고 하는데 딱 그런 경우였다.
그러나 동생의 말도 맞는 말이다.
“그래… 네 말에 틀림이 없구나.”
“그렇죠? 언니가 너무 피곤해서 예민해졌어요. 좀 쉬면서 일을 해요.”
로빈이 ‘지금’ 자신을 배신할 이유는 없었다.
자신의 아들이 루비로즈 가문에 입적해야 자신과 레무스를 죽이고 무언가를 도모하거나 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니까.
자신과 로빈을 이간질하기 위해 신생 귀족들이 수작을 부린 것일 수 있었다.
요즘 일이 많아서 동생의 말처럼 너무 예민했던 모양이다.
“로빈, 아까의 말은 철회하지.”
“감사합니다!”
“다시는 이런 오해를 사지 않도록 하게.”
“다음에는 결코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간계를 저지른 놈들을 알아내서 후회하도록 해줘야 했다.
자신의 시선이 알펜 왕국에 향한 틈이 이런 짓을 하다니 용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왕과 로빈의 동맹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경계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래. 나가 봐. 차는 잘 마시마.”
“저는 이만 나갈게요! 언니 차 맛있게 드세요!”
로빈과 아델은 그녀의 집무실을 나갔다.
그녀는 자신의 이복동생과 로빈이 나간 문을 잠시 봤다.
그리고는 결심을 했다.
“빨리 교황 폐하께 가서 ‘신성한 방어구’를 얻어야겠어.”
만약을 대비하는 것은 나쁘지 않았으니까.
“사람 하나 조용히 불러와라.”
“네.”
페루제는 부하 중 하나를 은밀히 불렀다.
그 부하는 자신이 가장 믿고 오랜 세월 동안 알아왔던 빅토르였다.
“주군, 어찌 이리 은밀히 저를 부르셨습니까?”
“빅토르, 로빈이 나를 배신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느냐?”
한기가 느껴지는 싸늘한 눈빛에도 빅토르는 담담했다.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봅니다.”
“그러면 나의 조카를 후계자로 공표한다면?”
“…….”
빅토르는 언제나 자신에게 거짓이 없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질문에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확답을 하기 어렵다는 뜻일지 모른다.
“로빈은 자신과 자신의 아들에게 카엘족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카엘족의 이익에 반한다고 느껴지면 나와 대적할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로빈이 그녀의 동생인 아델과 혼인하고 그녀의 사람이 되기를 청하지 않았다면 카엘족들은 지금도 죽어 마땅한 존재의 취급을 받으며 살아갔을 것이다.
자신은 빅토르와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카엘족의 극소수만 구원해줬을 것이니까.
아델의 남편이 카엘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교황을 통해서 자신들의 원죄를 지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로빈’이 카엘족이 아니고 아델의 남편의 아니었다면 그들은 아직도 죄인의 후손으로 살아가야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로빈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의 선택으로 페루제 루비로즈가 카엘족을 구제해 줬고 카엘족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되었으니까.
“물론 주군께서 그럴 리가 없으니 그런 일은 없겠죠.”
“그래. 나는 라스타 왕국의 백성에게 해를 가할 리가 없으니 일어나지 않을 일이겠구나.”
“그렇습니다.”
빅토르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백성’을 부유하게 만들지언정 그들을 다치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명분 없이는 말이다.
그러니 로빈이 그녀를 배신할 가능성은 없어야 마땅했다.
문제는 무엇이든지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카엘족의 이익’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너도 알잖니? 로빈이 생각하는 카엘족의 미래는 더 찬란할 것임을 말이야. 그래서 네가 아까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이겠지.”
“네, 맞습니다. 로빈 ‘자신이 생각한 카엘족의 미래’보다 좋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판단하면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빅토르는 카엘족이었다.
같은 카엘족으로 로빈의 편을 드는 것이 카엘족을 위해 좋을지 몰랐다.
그는 카엘족보다 페루제 루비로즈를 선택했다.
자신의 주군을 위한 마음이 ‘카엘족’보다 우선시되었다.
“비밀리에 성도에 갔다가 와야겠다.”
“로빈이 모르게 말입니까?”
“그래. 로빈이 모르게.”
로빈의 아내는 페루제 루비로즈의 동생이다.
사생아일지라도 아끼는 동생이었다.
극소수에 불과했으나 고위층 중 일부는 페루제 루비로즈가 자신의 조카를 후계자감으로 키워 보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미래의 루비로즈 가문의 주인이 될 아이의 아버지인 로빈에게 딸랑거리는 것은 당연했다.
“내 동생의 남편이라는 이유로, 내가 그의 아들을 잘 키워보려고 한다는 이유로 권력을 가지네. 웃기지?”
“주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소드마스터로 끝났다면 이리 신경이 쓰이지 않았을 것이야.”
그런 극비를 알 정도의 고위층들이 로빈을 중심으로 모인다고 생각해봐라.
그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물론 그 정보를 알고 있는 모두가 로빈에게 모이는 것은 아니다.
카엘족이 귀족이 되어서 왕국의 주도권을 갖는 것을 반대하는 무리도 있었다.
그들은 단지 웅크리고 때를 기다릴 뿐이었다.
“로빈의 칼날이 나에게 향할지라도 나를 지킬 수단 하나는 있어야겠지.”
“비장의 수는 숨길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법이지요.”
“그래. 그러니 교황에게 나의 방문과 그에 관련된 내용에서 ‘신성한 방어구’에 관한 기록은 쓰지 않도록 미리 말을 전해야겠지.”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믿겠네.”
로빈의 목줄을 쥘만한 것으로는 부족했다.
아들의 미래, 카엘족의 미래는 언젠가 다가올 것이고 그 목줄은 스스로 끊어질 것이니까.
스스로를 지킬 방어구도 필요함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리고 상대가 방심하고 있을 때, 그 방어구는 그 가치를 드러낼 것이다.
빅토르가 나가고 그녀가 혼잣말했다.
“가장 빛날 때에 ‘신성한 방어구’도 드러나야겠지. 모두가 경계하도록, 모두가 경외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