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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42화 (42/221)

042화 아직 비장의 수가 남아 있다

발렌티노 공작과 페루제 공작부인이 서로를 응시했다.

그곳을 바라보는 사람 중 누구도 팽팽한 긴장감에 침조차 삼키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대화를 들은 모두가 하나만은 잘 알고 있었다.

베로나 공작 가문의 안주인은 공작과 대적할 만큼 권세가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는지는 그들의 머리로는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공작은 그녀를 날카롭게 보면서 말했다.

“처음부터 이 혼인을 위한 것이었나?”

오랜 세월 이어졌던 알펜 왕국과 라스타 왕국 간의 단교를 다시 이은 이유에 대한 질문이었다.

궁금해서가 아니리라 확신하지만, 확인차 물어보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계획적이어도 너무 계획적이었으니까.

“처음부터라니요? 저는 제 아버지와 동생이 좋은 신랑감이 있다고 해서 혼인했을 뿐이에요. 소문처럼 몸이 달아올라서요.”

뻔히 무엇을 뜻하는지 알면서 페루제 공작부인은 우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마치 조롱하는 듯한 착각이 드는 웃음이었다.

“혼인하고 싶어서 얼마나 몸이 달았는지 제가 직접 수도에 갔잖아요. 기억나지 않으세요?”

아무도 자신을 수상하게 여기지 않아서 머저리만 있는 줄 알았다.

왕국 간의 교류가 시작되려고 하는 시점에 수도에 나타난 신부다.

그것도 일반 귀족의 아내가 아니라 공작의 아내다.

“그래도 놀라기는 했어요. 명색이 공작 가문의 안주인이 될 여인인데 누구 하나 제대로 알아보지 않는다는 것을요.”

라스타 왕국 출신의 여성 영주를 받아들이기로 했으면 혹시나 하고 한 번은 들여다봐야지 않겠는가.

여성이라는 것에 정신이 팔려서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다니 웃긴다.

아니면 나의 조국을 바보 취급을 한 것인가?

그런 것을 할 사람들로 보이지 않을 만큼 바보처럼 보였는가?

만약 그것이 맞다면 기분이 나쁜 일이다.

“지금 그것을 말이라고 하나?”

“사실을 말한 것뿐이에요.”

왕국 간에 화합을 위해 라스타 왕국이 자국의 영토를 알펜 왕국에 편입시킴으로 페루제 공작부인은 공식적인 알펜 왕국의 귀족이 될 수 있었다.

“아! 주변에 거슬리고 짜증나는 것들에게는 군대를 보내기 편하기는 하겠어요.”

이는 다르게 말하자면 마음 편히 영지전이라는 명분으로 주변 영지를 점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성 영주의 편입을 반대할까 얼마나 조마조마했던지 모른다.

성사되고 나니 앞으로의 일들이 기대가 되어서 너무 행복했었다.

타국의 침략이 아니기에 왕이 나서서 막을 명분이 없었다.

영지전은 영주의 고유권한 중 하나로 왕이 이를 막는 것은 월권이었다.

“혹시 본가의 군대가 올 것을 우려한다면 걱정하지 마세요.”

라스타 왕국의 루비 로즈 가문 병사들이 지원하러 간다면 해석에 따라 문제 삼을 수 있었다.

극단적으로 보자면 타국의 힘을 빌려서 왕국을 전복시키려는 반역 세력으로 판단될 수 있다.

자신은 명분에서도, 힘에서도 우위를 차지하고 싶다.

완벽한 승리를 원하니까.

“제가 짜증나서 벌인 일인데 제 선에서 처리를 해야죠.”

아쉽게도 그녀는 이미 군사적 요충지 몇 곳에 견고한 성을 쌓아서 카엘족 군대를 주군 시켜 놨다.

“제가 그 정도로 상식적인 사람이랍니다.”

굳이 타국에 있는 루비 로즈 가문 병사들을 이끌지 않아도 주변 영지 정도는 쉽게 정리할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말이에요. 좀 놀랐어요. 칸나 고모님께서 이리 쉽게 혼인을 허락해 주실지는 꿈에도 몰랐거든요. 제 나이나 상황이 좋은 신붓감은 아니니까요. 정말 고마우신 분이랍니다.”

그 말에 공작은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칸나 백작부인만 아니었다면 혼인 자체가 성사되지 않았을 것을 말하고 있었으니까.

공작이 이리 영지로 달려올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급한 마음에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고모님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하시는지 모르시죠? 정말 존경스럽더군요.”

마치 칸나 백작부인과 자신 간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식의 말투였다.

그리고 자신이 엄연히 윗사람임을 숨기지 않았다.

“뭐, 그것이 칸나 고모님의 장점이죠.”

그것을 이렇게 대놓고 공표한 것은 칸나 백작부인에게 좋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욕심을 위해 공작부인에게 안주인 자리를 줬다는 것으로 비칠 수 있었다.

“자기 욕심을 위해 앞뒤 보지 않고 달려드는 추진력이라니요.”

여기서 거짓은 페루제 공작부인과 칸나 백작부인 간에 은밀한 거래가 있다는 것이다.

진실은 란델리노를 쫓아내고 자신의 자식을 다음 대 공작으로 만들려고 했으니 그 의도가 불순했다는 것이다.

“능력에 비해 과한 욕심을 숨기지 않고 아둔하신 것이 살려 두는 맛이 있더군요.”

그러나 뒤에서 끼리끼리 말을 하는 것과 이렇게 공작과 공작부인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과는 그 무게가 달랐다.

이제 칸나 백작부인은 사교계에서 매장당한 것과 같았다.

부인들이 자신을 마녀 의혹자 명단에 넣게 만든 원흉으로 칸나 백작부인을 지목할 테니까.

너무 강하고 위험한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적의를 드러내기에는 그녀 자체가 너무 무서웠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약한 상대를 미워하는 수밖에.

약자는 강자에게 잡아먹히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둘의 관계에 대해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공작의 고모님은 사교계에서 고립될 것이다.

이 사태는 칸나 백작부인의 안일함이 불러왔기 때문이다.

“그런 거짓말이 통할 것이라 보는가?”

주변 사람들은 동요했지만, 공작은 전혀 아니었다.

그녀가 고모님을 속이고 들어왔음을 잘 알았다.

“정말 그랬다면 그렇게 번거롭게 속이며 여기로 오지 않았겠지.”

만약 실제로 둘 사이에 뭔가가 있었다면 굳이 그녀가 수도까지 달려와서 혼인을 먼저하고 영지로 가는 일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고모님의 일을 돕던 시녀장을 때려죽이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말이다.

공작과 시선을 마주하는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통하지 않네요. 한 번쯤은 흔들어 보고 싶었는데 아쉬워요.”

장난스러운 말투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공작과 그 고모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단순히 장난이었다.

“하긴 워낙 허술한 말이었으니까요, 이걸 믿는 바보는 없겠죠.”

순식간에 그녀의 말에 동요하던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었다.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눈빛에는 기대감이 엿보였다.

“고모님은 가문을 위하시는 참된 어른이셨어요. 제가 한 제안을 결혼 계약서도 모두 반영해주셨답니다.”

“뭐?”

혼인계약서.

혼인 전에 혼인하면서 지켜야 할 것들을 적어 놓은 계약서였다.

그것은 부부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가문 혹은 영지 간의 문제 등 여러 가지에 대해 쓸 수 있었다.

가령 매년 일정 기간에 각 가문의 병사들이 합동 훈련을 한다든가 하는 것이 있다.

“혼인계약서라고?”

발렌티노 공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결혼계약서는 엄연히 법적인 효력이 있는 공식문서였다.

“어머? 확인도 하지 못하시고 달려오신 건가요? 아니면 관심도 없어서 보관하지도 않고 영지에 둔 것인가요?”

비아냥거리는 것이 너무 즐겁다.

결혼이라는 중요한 문제를 남에게 맡기니까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덕분에 알펜 왕국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으니 고마운 일이지만 말이다.

중요한 일이었기에 자신이 믿는 고모님에게 일임했다.

게다가 상대가 한미한 가문 출신이라고 하기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 그녀는 강한 정예 병사에 부유한 영지까지 전부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앞으로 그녀와의 싸움이 쉽지 않을 것을 의미했다.

“나중에 시간 나실 때에 천천히 보세요. 고모님에 대한 믿음이 더 강해지실 거예요.”

그 계약서를 보면 칸나 백작부인은 공작이 자신을 죽이지 않는 것을 감사해야 할지 모른다.

만약 자신이 공작이었다면 사지를 잘라서 숲에 버렸을 것이다.

“어? 어!”

그때, 병사들이 주춤거리면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공작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도 냉철함을 잃지 않았던 그는 분노했다.

다정하게 말하기는 했으나 그 진의를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혼인계약서부터 철저히 준비했음을 당당히 드러냈다.

이는 공작 가문을 라스타 왕국처럼 가지기 위함이 분명했다.

그동안 전장에서 만났던 그 어떤 적보다 까다롭고 강했다.

그는 살기를 미세하게 표출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대!”

그가 목청을 높였다.

그 살기와 목소리가 공작부인에게 위협이 될 것이라는 판단을 했던 것일까?

공작부인 뒤에 있던 기사들이 칼을 꺼내 들었다.

챙!

이에 질세라 공작의 기사들도 검을 꺼내며 대치 상황이 되었다.

부부간의 다툼은 기사 간의 다툼으로 커져 버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죽는 사람이 나올 것이 자명했다.

“핫! 감히 공작 가문에 가문의 기사가 아닌 외부인이 무장하고 감히 검을 들고 있어?”

발렌티노 공작은 그 기사들의 문양을 보고 그들이 자신의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친정에서 기사들 몇 명 데려오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지요.”

부인 쪽 가문의 기사가 몇 명이 오는 예는 있었다.

혹시 모를 남편의 폭력 등에서 자식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기사들이 검을 뽑은 것이 그런 상황이기에 정당하다는 말을 한 것이다.

“이렇게 가문을 위협할 정도로 데려오지는 않지.”

공작은 페루제 공작부인도 소수만 데려왔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녀를 일반인의 범주에서 생각한 것 자체가 실수다.

공작의 관점에서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침략이었다.

“이것은 반역이라 봐야 할 일이지.”

그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 검에는 강렬한 오러가 맺혀 있었다.

그는 소드마스터였다.

공작부인의 기사들은 긴장감에 손에 땀으로 젖었다.

정작 공작에게 베일 당사자는 여유로웠다.

“합의되지 않았다면 모를까요. 이건 반역이 아니지요. 혼인계약서를 차근차근 읽어 보세요.”

그녀는 소드마스터의 위협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참고로 그녀는 계약서에 그녀가 성에 마음껏 병사들을 데려와도 문제가 없도록 써 놨다.

“그깟 계약서… 그대가 죽으면 무슨 소용이지?”

발렌티노 공작은 그녀를 죽이겠다는 의지를 확고하게 다진 듯싶었다.

잠시간의 대화만으로 그녀가 얼마나 위협한 적인지 알 수 있었다.

왕실도 감당하지 못할 여인이다.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요. 그렇게 따지면 제가 당신을 살려 둘 이유가 있을까요? 당신이 죽으면 이 가문은 내 것인데?”

법적으로 남편이 죽은 시점에서 어린 후계자가 있으면 그 아내가 후계자가 성년이 될 때까지 가문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결혼식 이후로 처음 만나는 부부는 서로를 죽이기 직전에 있었다.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공작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봤다.

짝! 짝! 짝!

“이야, 소드마스터는 달라도 뭔가가 다르군요.”

능글맞게 생긴 사내가 손뼉을 천천히 치며 다가왔다.

즐겁다는 미소로 말이다.

“기척을 최대한 숨긴다고 숨겼는데 들킬 줄은 몰랐어요. 과연 공작부인께서 선택하실 만하십니다.”

그 모습에 페루제 공작부인은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왜 이제야 온 것이냐?”

‘빨리 오라고 했는데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오다니!’

그녀는 더 시간을 끌어야 하나 고민했었다.

공작이 자신을 죽이지 못하게 할 ‘신성한 방어구’를 가지고 있기는 했으나 아직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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