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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41화 (41/221)

041화 사랑보다는 존중받기를 원한다

세베루스가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그녀를 만났던 당시를 떠올리며 말을 뱉어냈다.

“제가 뵌 부인은 조용하고 우아하셨습니다. 남자에게 몸이 달아올랐다는 세간의 말들과 다르게요. 그래서 영지로 떠나시기 전에 잠시 대화를 나눴을 때 느꼈던 오싹함은 착각이라고 여겼습니다.”

세베루스는 그때의 느낌을 상기시키며 잠시 몸을 떨었다.

찰나에 눈빛에서 보였던 광기는 일반 사람이 흉내를 내기에는 뭔가 오묘하고 복잡했다.

“그런데 착각이 아니었네요. 그때 바로 주군께 말을 올려야 했었습니다.”

그는 당시에 짧게 느꼈던 의혹을 쉽게 생각했던 자신을 질책했다.

“이미 늦은 일이야. 지금은 이 일을 빨리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지.”

“물론입니다. 명령만 내리신다면 지금 바로 영지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었다.

국왕은 바로 벨로나 공작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가 있어야 자신의 세력이 견고함을 드러낼 수 있었다.

왕의 최측근이 곁에 없다는 것은 그 세력 내부에 변화가 있다든가 아니면 그 최측근에게 어떤 일이 생겼음을 의미하니까.

그렇지만 지금 그것을 신경쓸 때가 아니다.

“벨로나 공작, 어서 빨리 영지로 내려가게.”

“알겠습니다.”

그때라도 수상함을 말하고 빨리 대처를 했다면 지금처럼 불안해하며 달려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 * *

최소한의 휴식을 하며 최대한 빠르게 영지에 도착했다.

“저기 성이 보입니다!”

“어서 가자!”

늦은 밤이었다.

짙은 구름에 달조차 모습을 감춘 스산함이 피부에 전해졌다.

성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병사들이 막아섰다.

“누구인지 소속을 말씀하시오.”

그들은 아무리 높아 보이는 상대라도 공작부인의 허락 없이는 들이지 말아야 함을 뼛속까지 각인시켰다.

그들은 무장한 기사들에게 주눅이 들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공작 각하시다. 문을 열어라.”

그들은 횃불에 비친 공작의 모습에 눈이 크게 떠졌다.

성의 주인이 왔으니 문을 열어 주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각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전달받지 못하였습니다. 확인 후에 열어드리겠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병사들은 공작과 기사들을 들여보내지 않았다.

그들이 누구인지 뻔히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기사들은 주군이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에 분노했다.

“뭐 하는 짓이냐!”

기사단 단장이 그들에게 살기를 보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으아 억,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맞습니다. 어두운 시각입니다. 이 어둠을 틈타서 변장하고 여기에 왔을지 누가 알 일입니까? 저희는 성을 지켜야 하는 입장에서 해야 할 절차를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살기는 일반 병사가 감당하기에는 강했으나 그들은 물러설 수 없었다.

그리고 기사들은 더는 그들에게 화를 내기 어려웠다.

병사들의 말에 병사들이 말하는 명분은 타당했고 칭찬을 받아 마땅했으니까.

오히려 공작이 일을 잘하고 있다고 칭찬해야 했다.

그런데도 단장은 화를 참지 않았다.

“그게 주군을 상대로 하라는 뜻인가!”

“되었다. 그만하거라.”

발렌티노 공작은 단장을 막았다.

여기서 그들에게 분노하며 벌을 줬다가는 적의만 불어넣게 된다.

그들은 누가 봐도 자신의 책무를 제대로 이행하고 있었으니까.

그것을 가지고 자신을 무시했다며 벌을 내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들이 뱉어낸 명분 하나 때문에 그들의 무례를 눈감아줘야 한다.

그런 말을 병사들 스스로 생각해 낼 리 없었다.

그는 공작부인의 입김이 있었음을 알았다.

그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데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병사 하나가 달려왔다.

그리고 병사들의 대장에게 귓속말했다.

“공작 각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길을 비켜드려라.”

“네!”

기강이 바로 세워진 모습이었다.

마치 정예 병사처럼 느껴지는 기백이었다.

그것이 설령 공작부인에 대한 두려움이 만들어 낸 것일지라도 말이다.

성안으로 말을 이끌고 들어가자 한 여인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서 있는 그녀 뒤에는 시녀들과 기사들이 있었다.

그들이 보여 주는 당당함은 마치 공작부인이 이 성의 주인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동시에 공작이 손님인 것처럼 느끼게 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세베루스는 그녀가 미리 마중을 나온 것을 보고 한숨이 나왔다.

비밀리에 움직인다고 움직였는데 그녀가 알고 있었으니까.

공작 가문의 정보부에 쇄신이 필요해 보였다.

공작부인도 그들이 다가옴에 따라 천천히 그들을 향해서 걸었다.

공작이 그녀를 내려다보고는 말에서 내렸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렸습니다.”

그는 결혼식 때에 제대로 보지 않은 부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눈처럼 하얀 피부, 아주 진한 붉은 입술 그리고 칠흑 같은 어두운 머리카락.

그녀는 아름다웠으나 뭔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름다워도 두려움을 느낀 후에 그 아름다움을 인지하게 되었다.

“수도에 더 계실 줄 알았는데 벌써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이렇게 영지로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부인은 내가 수도에 더 있기를 바라지 않았습니까?”

“어찌 그런 오해를 하십니까? 이렇게 제 남편을 다시 보니 저는 좋은데 말입니다.”

그녀는 공작이 어찌하여 영지로 급히 왔는지 알았음에도 뻔뻔하게 우아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짜증이 나지만 상대는 자신의 남편이지 않은가.

외모 하나는 볼만해서 나쁘지 않았다.

란델리노의 금발은 아버지의 금발에서 나온 것이구나 싶었다.

“남편이 없이 홀로 있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데요.”

자신을 오해하는 남편에게 상처받은 여인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속게 될 정도로 완벽했다.

공작과 그녀가 누군지 아는 사람들은 상대가 전해지는 소문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위험한 여인임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이리 마중까지 나온 것을 보면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알고 있음이고 그것을 숨길 생각조차 없음인데 그냥 솔직하게 나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남편에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준비한 ‘아름다운 표정’인데 통하지 않았다.

아쉽지만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다.

공작은 그녀가 가증스럽다는 듯이 날카로움을 감추지 않고 바라봤다.

그 모습에 그녀는 눈이 잠시 크게 떠지더니 아까와 다른 웃음을 보여 줬다.

“정말 행복합니다.”

정말 아름답고 화려하며 뭔가 위험한 불안감을 주는 웃음이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자신은 이런 것을 원했다.

“이제야 저를 존중해 주시는군요.”

주변에 있던 모두가 당황해했다.

그것은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존중? 이것이 존중으로 보이는가. 적의가 아니고?”

공작은 그녀를 존중하지 않았으니까.

경계와 적의만 내비쳤다.

언제든 베어 버리겠다는 듯이 일렁이는 기운은 그가 얼마나 분노하는지 알게 해줬다.

그녀는 아까보다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녀를 존중해 주니까 일방적인 통보가 아니라 대화를 하지 않는가.

그녀를 존중하니까 질문도 하지 않는가.

지금 자신은 충분히 존중받고 있었다.

“존중의 뜻이 무엇일까요? 높이어 매우 귀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귀하게 대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상대의 모습을 제대로 봐주며 그 상대를 함부로 아래로 내려다보지 않는 것이지요.”

공작은 신부였던 그녀와 했던 말을 기억하지 않았다.

애초에 관심이 없어서 말조차 걸지 않았고 그녀가 몇 마디 말을 건넨 것이 전부였다.

말도 들어주지 않았는데 모습을 기억할 리 없었다.

지금에서야 그녀를 제대로 봤다.

그녀가 자신보다 한참 아래라는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무시였다.

그녀는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그 안에 있는 적의와 불신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호의라는 이름으로 상대에게 무례하게 구는 족속들이 세상에는 넘쳐나니까요.”

가족이라는 이유로, 친구라는 이유로, 연인이라는 이유로 상대의 우위에 서서 이용만 하려는 사람들 때문에 고생하는 불쌍한 이들이 세상에는 많았다.

“애정을 속삭이면서 요구하는 것은 많죠. 책임져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요.”

호의에 숨쉬기 어려워하는 가엾은 이들은 그들의 고생, 그들의 꿈, 그들의 휴식 등 많은 것을 존중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며 상대의 욕망에 강요당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친한 친구를 위해서, 연인을 위해서라는 명분에 갇혀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의 책임도 아닌 것을 그딴 호의 때문에 짊어지느니 차라리 버리는 것이 합리적이지요.”

호위라는 족쇄에 갇혀서 지옥을 사느니 차라리 그 족쇄를 만든 이들을 죽이는 것이 낫다.

자신은 그런 호의를 받을 바에는 자신의 모든 것이 존중받는 것을 원했다.

“우리를 보세요. 한쪽의 호의에 기대는 쓰레기 같은 관계보다 훨씬 좋지 않나요?”

설령 그 안에 적의가 감춰져 있더라도, 적의가 드러나 있더라도 자신의 의지가 무시당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 그녀의 생각에 따르면 공작은 그녀를 존중하게 되었다.

“이제는 제 모습을 풍경 보듯이 무관심하게 바라보지 않겠지요. 제가 하는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고 제가 하는 말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되었지요.”

그녀의 눈빛에는 다정함이 묻어져 있었다.

남편이 자신을 존중하게 되었는데 자신이 존중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어찌나 남편이 사랑스러워 보이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남편의 부족함을 채우는 아내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 같아서 만족스러웠다.

공작의 살기가 담긴 눈빛과 대조되어서 소름이 돋게 했다.

시체들 사이에서도 미소를 지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저에 대해 알았으니 감히 나를 당신 아래로 보지 못하겠지요. 나는 라스타 왕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람 중 하나니까요.”

벨로나 공작이 왕의 최측근이며 왕국의 영웅이자 명문 가문의 주인이었다.

그도 엄청난 부와 병사, 명예,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페루제 공작부인보다는 못했다.

운용 가능한 병사 수부터 달랐다.

그녀는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으며 곡창지대와 상업으로 이룬 거대한 부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죽여 버린 귀족들의 재산까지 더해지니 나라의 부를 거머쥐었다는 소문까지 나도는 실정이었다.

또한, 혁명을 이끈 군부 세력의 수장과 더불어 왕보다 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람 중 하나라는 표현을 쓴 이유이기도 했다.

아무리 공작이 권력이 있어도 왕보다 위는 아니지 않은가.

그녀는 공작보다 부, 권력, 병력을 가졌다.

가문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그는 그런 그녀를 견제하고 그녀의 말에 집중하고 그녀에게 신경을 쓰며 그녀의 의중을 생각하고 또 생각할 것이다.

배려가 없는 하찮은 사랑보다는 훨씬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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