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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40화 (40/221)

040화 그녀에게 놀아났다

그들은 혁명의 최대공신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녀가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권력이란 아무리 가져도 부족하게 느껴지니까.

그녀 때문에 더 가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 충분하다.

“그들도 그녀에게 대항하여 세력을 넓히려고 하지만 불가능할 것입니다.”

“불가능하다고요? 라스타 왕국 최고의 권력자라고 해도 아예 그들을 전부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세베루스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본래 귀족이었던 그녀와 혁명에서 살아남은 기존의 귀족세력, 혁명을 통해 귀족이 된 신생귀족은 물과 기름 같은 관계였다.

아무리 그녀 덕분에 혁명이 성공을 했을지라도 견제를 하고 압박을 제대로 했으면 세력을 넓힐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상했다.

정보부 수장은 세베루스의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혼인이 결정되기 전에 루비 로즈의 영지에서 군사 개혁을 했다는 보고서도 기억하실 겁니다.”

루비로즈 백작의 딸의 혼인을 위해 움직였을 당시였다.

그때 보낸 정보원들은 페루제 루비로즈가 자신의 정보부를 공작 가문에 집중시키기 전이었기에 덜 어렵게 입국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드디어 돌아왔고 첩보 정보를 보고했다.

정보부 수장은 침울해하며 말을 이어 갔다.

참담한 현실을 말해야 했으니까.

“그래. 모든 영지민들이 일정 이상 나이가 되면 무조건 영지의 방위 의무를 지도록 만들었다고 했지. 나도 하려고 했으나 많은 자금과 자원이 소비된다는 이유로 반대가 커서 못했지만 말이야.”

그동안 영주들은 모병제를 채택했다.

모병제는 강제 징병을 하지 않고 병사가 되길 원하는 사람이 지원하여 직업으로 삼도록 하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가문의 기사단과 직업 병사들을 운영하다가 나중에 전쟁이 터지면 일반 영지민들을 차출하여 전선에 세운다.

그것이 일반적이었다.

“모두가 말했지요. 의무적으로 병사로 세우기 위해 드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멸할 거라고요.”

모든 사람을 병사로 세운다는 것은 그들이 먹을 식량, 의복, 훈련 무기 등을 그만큼 더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억지로 병사로 만들면서 그 비용까지 영지민에게 책임지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평소 열 명의 병사의 훈련만 준비하면 되었는데 갑자기 백 명의 것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그녀가 이것을 시행하겠다고 발표를 하자 귀족들은 비아냥거렸다.

여인이 군대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냐고 말이다.

그러니까 그런 짓을 한다고 비웃었다.

페루제 루비 로즈가 군대에 대해 모르는 것은 맞았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것을 메워 줄 인재들이 많았다.

그녀가 그들이 준 근거와 계산을 토대로 그것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일을 추진했음을 사람들은 몰랐다.

“그때 보냈던 정보원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성공했다고 합니다.”

남부 젊은 사내들을 전부 병사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컸다.

“그녀가 운용 가능한 병사수가 얼마나 되는 거지?”

“최소 20만입니다.”

“왕국에서 전부 차출하여 끌고 오면 20만인데? 남부에서만 20만이라고? 이럴 줄 알았으면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추진해야 했어.”

모병제로 모은 왕국 전체의 병사 숫자를 상회함이다.

“실질적으로 최소 30만은 생각해 봐야겠군요.”

만약 작정하고 그녀를 따르는 주변 영지의 군대까지 끌고 온다고 가정하면 10만은 더 데려올 수 있었다.

특히 헬리오 왕국과 라스타 왕국은 긴밀하기로 유명했다.

“신생 귀족이라는 것들은 입을 다물고 그녀를 따를 수밖에 없겠어. 견제할 능력도 없는 세력이 대항 세력이라고 있다니 웃기는군.”

신생 귀족들이 영토를 받고 그곳의 군대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신생 귀족들의 병사들을 전부 모은다고 해도 페루제 루비로즈를 이기지 못했다.

신생 귀족들은 자신의 영토에서 기사를 양성할 수 있다.

신생 귀족들의 기사들을 전부 모은다고 해도 페루제 루비로즈의 기사들보다 강하지 못했다.

신생 귀족들이 가지게 된 재물들을 다 합쳐도 페루제 루비로즈의 재물에 비하면 하찮았다. 신생 귀족들이 혁명에 집중할 때에 페루제는 혁명에 희생된 귀족들과 그 일가를 죽이며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는데 관심을 가졌으니까.

게다가 그녀는 상술에 재능이 있었다.

나름 그녀를 견제해야 할 신생 귀족들이 그녀 앞에서 맥을 못 추는 이유였다.

그 어떤 것으로도 그녀를 이길 수 없었으니까.

그녀의 반대파임에도 오히려 눈치를 보고 의견을 물어보고 따르는 이들까지 있었다.

“그 어떤 왕실도 이루지 못한 것을 해냈어.”

루비로즈 가문의 권력은 바다처럼 끝을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은 루비로즈에게 흘러 들어갔고 모든 것은 루비로즈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루비로즈 가문은 모든 것의 결정권을 쥐었다.

“이제 내부에 견제 세력도 없겠다. 외부로 영향력을 넓히겠다?”

그 어떤 왕국의 역사에서도 이렇게 압도적인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지닌 가문은 없었다.

어떤 왕실도 이룩하지 못했던 일이다.

이 유일무이한 가문을 만든 여인이 바로 벨로나 공작의 아내였다.

“이거 잘못하다가는 부부싸움으로 전쟁이 일어나겠군. 그대 말대로 이혼을 하든가 혼인 무효화를 주장해야 하는데 가능하겠는가?”

불가능했다.

이혼이든 혼인 무효화든 교황의 승인이 떨어져야 가능했는데 그가 그것을 해줄 리 만무했다.

교황은 과거 알펜 왕국군이 자신을 잡으려고 해서 도망갔던 굴욕을 잊지 않았다.

그런 그가 알펜 국왕의 최측근인 벨로나 공작을 도울 리 없었다.

“여기에 더 큰 일이 있습니다.”

지금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정보부 수장은 자꾸 머리가 아픈 일을 던져 줬다.

그도 이런 소식을 전해 주고 싶어서 전해 주는 것은 아니겠지만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잘못 건들었다가는 알펜 왕국을 불바다로 만들 아내를 들였다.

라스타 왕국의 사신들이 비밀리 왔던 그 날.

자신을 보며 동정의 눈빛을 보낸 것이 착각이 아님을 지금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들의 시선은 저런 여인을 아내로 삼다니 불쌍하다고 하는 눈빛이었다.

“무엇인가? 여기서 더한 것이 남았다니 놀랍군.”

지금 좋지 않은 의도로 벨로나 공작 가문의 안주인이 된 아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터질 거 같았다.

가신들을 불러 회의를 진행해야 할 만큼 사항이 심각했다.

아니, 먼저 폐하에게 가서 보고하고 대책을 세워야 했다.

병사 30만은 벨로나 영지를 넘어 알펜 왕국을 전쟁터로 몰기에 충분한 숫자였다.

“예. 저도 믿어지지 않지만 현실입니다.”

그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공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세베루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중간 이름을 봐주십시오. 그리고 폐하께서 직접 승인한 귀족 혼인 서약서의 사본도 봐주십시오.”

[페루제 메디치 루비 로즈]

그녀의 중간 이름은 메디치였다.

[페루제 메디치]

혼인 서약서에 쓰여 있는 신부의 이름에는 페루제 메디치였다.

그 이름은 라스타 왕국에서 알펜 왕국으로 새로 편입되는 여성 영주의 이름이었다.

라스타 왕국에서는 혼인 서약서를 남편과 아내가 동시에 쓰고 서로 그 이름을 확인하지만 알펜에서는 혼인 서약서에 남편이 먼저 서명을 하고 아내가 그다음에 서명함으로 끝난다.

확인 절차는 없다.

그녀는 남편이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지 않는다는 맹점을 이용한 것이다.

서명하기 전에 혼인 서약서에는 이미 왕실 인장은 찍힌 상태였으니 왕이 그것을 확인할 기회도 없었다.

“폐하께 가 보겠다. 세베루스 너는 당장 기사들을 모아라. 알현이 끝나고 바로 영지로 간다.”

공작은 자리에서 당장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집무실을 나갔다.

그와 알펜 왕국은 ‘페루제 루비 로즈’에게 놀아났으니까.

* * *

“뭐? 벨로나 공작이 왔다고? 이 시간에?”

“네. 맞사옵니다.”

“얼른 오라고 하게.”

늦은 시각, 국왕은 갑작스러운 발렌티노 벨로나 공작의 알현 요청에 뭔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곧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듣게 되고는 충격에 빠졌다.

“결혼식부터 이렇게 뒤통수를 친 거면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접근했다는 거군.”

누가 알펜에서 일반적인 혼인 서약서 절차를 이용해서 왕과의 알현을 공식적으로 마치고 벨로나 영지로 가 버릴 생각을 할까?

혼인 서약서에 남편이 쓰고 아내가 쓴 후 따로 확인하지 않는 것을 정체를 숨기는 데 이용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국왕은 머리가 아파졌다.

이것부터 그녀가 철두철미하며 승리를 위해 모욕은 기꺼이 감수하는 성격임을 알 수 있었으니까.

앞으로 상대를 하게 된다면 만만하지 않을 것이었다.

“라스타 왕국 남부의 실질적 지배자가 알펜 왕국의 백작이 되었군.”

라스타 왕국과 단교된 상태였어도 아예 무관심하지 않았다.

국왕도 그녀의 악명에 대해서는 알았다.

“혁명을 빌미로 얻은 어마어마한 재산은 그 끝을 알 수 없다지.”

역도들의 편에 서서 자신을 따르지 않은 귀족들을 숙청하고 그 재산을 빼앗아 부를 축적했다.

그것뿐이면 말을 더는 하지 않겠지만 그녀는 왕을 이용해 권력도 가졌다.

“혁명으로 등장한 신생 귀족들에게 언제 죽을까 두려움에 떠는 라스타 국왕이 유일하게 믿는 인물이고 말이야.”

군부 세력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왕이 그녀에게 발이라도 핥을 기세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였다.

정권을 쥔 군부 세력을 견제할 존재는 루비로즈 가문 외에는 없었다.

“이혼은 불가하고…….”

과거에 교황을 반드시 붙잡았어야 했다고 국왕은 새삼 후회를 느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혼은 쉽게 이뤄졌을 것이니까.

아니, 이런 혼인 자체가 추진되지 못했을 것이다.

“군사적으로는 가능하겠는가?”

“일이 터졌을 때 친정에서 딸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보내기 딱 좋은 위치입니다.”

알펜에 편입된 영지는 페루제 공작부인의 영지였다.

루비로즈 가문의 군대가 온다면 그곳까지 아주 편하게 이동할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위해 비밀스러운 장소에 미리 대량의 식량 저장고를 마련해 뒀다.

식량 보급이 탄탄한 것은 장기전까지 충분히 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하긴 그것까지 고려하고 여기 들어왔겠지. 30만이라 미치겠군.”

“저는 바로 영지로 돌아가 봐야 할 듯싶습니다.”

“얼른 가 보게. 그 여자가 영지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를 일이니까.”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렀고 그 흐른 시간 동안에 페루제 공작부인은 성에서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몰랐다.

그 증거로 사람을 통해 성안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명령을 내렸지만, 아직도 소식이 당도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 안에서 정보를 빼 오기 어렵다는 것이고 그만큼 정보 통제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수도에 있는 모든 기사를 이끌고 영지로 향했다.

그는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에 대해 생각하며 자신이 본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떠올리려고 했다.

“세베루스.”

“네. 주군.”

“그대가 본 그녀는 어떤 사람이지?”

그러나 그녀에 대해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만큼 그녀는 그에게 가치가 없는 존재였다.

“그냥 말수가 적은 여인이었습니다.”

새로운 부인이자 첫날밤을 보낸 여인에 관한 관심조차 없었음을 실토하는 것이었다.

그는 상대에게 무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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