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화 두 사람만 빼고 모두가 울었다
그녀의 한쪽 눈썹이 잠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얼마나 자식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알겠다.
기본조차 모르는 것들을 여기에 데려올 생각을 했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기 오기 전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기본적인 것들은 전부 가르쳐서 아이들을 데려와야 마땅했다.
“누구에게 감사를 표하는지 말하는 것은 기본이란다. 도대체 부모가 무엇을 가르친 것인지 모르겠구나. 정중하게 다시 하렴.”
이런 기본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에 한숨이 나왔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은 마음이 넓은 여인이니까.
넓은 마음으로 가르침을 줘야 한다.
‘넓은 영토와 권력을 지닌 공작 가문의 안주인’답게 처신을 해야 한다.
“얼른 하렴.”
그녀는 미소를 지우며 다시 명령했다.
강압적인 눈빛에 그들은 얼른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공작부인 그리고 란델리노 영식.”
“감사합니다. 공작부인, 란델리노 영식.”
그녀가 원하는 것처럼 정중하게 아이들은 말했다.
아픔을 참고 힘을 냈다.
곧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아쉽게도 이번에도 그 희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영식? 란델리노는 벨로나 공작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다. 너희와 동등하다고 여기는 것이냐? 백작 가문 이상의 후계자들에게는 예우 경칭을 해줘야 함을 모르다니 믿기지 않는군.”
예우 경칭이란 그 가문의 후계자를 세습 작위보다 한두 단계 낮은 작위를 붙여서 부르는 것이다.
아직 아버지의 작위를 잇지는 않았으나 엄연한 귀족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으로 자기 자리가 탄탄한 후계자라면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는 호칭이다.
“이따위로 아이들을 기르다니 천박하구나. 란델리노 백작님이라고 해라.”
페루제 공작부인의 매서운 말에 아이들은 참았던 눈물을 다시 흘렸다.
“흑흑흑…….”
“으아아앙…….”
그 모습에 실리가 호통을 쳤다.
“뭘 잘했다고 우십니까?! 어서 공작부인의 말씀을 따르세요!”
그녀는 귀족 가문의 자제들을 혼내는데 거침이 없었다.
실리의 뒷배는 저 부인들보다 더 강한 페루제 공작부인이었으니까.
“히륵, 히륵…….”
“흐으윽…….”
아이들은 그녀가 꺼내든 채찍을 보고는 억지로 울음을 삼켰다.
“감사합니다. 공작부인, 란델리노 백작님.”
눈치를 보며 하나씩 감사를 전했다.
진심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좋아. 이것이 아랫사람이 해야 할 예의다. 잘 새겨야 할 것이야.”
“네.”
이제 끝인가 싶었는데 페루제 공작부인이 계속 서 있었다.
가르침을 더 줘서 보내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다.
이렇게 다 모일 기회는 많지 않았으니까.
한 번에 뼛속까지 누가 위인지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생각에 잠긴 그녀의 모습은 부인들과 아이들을 떨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녀가 뭐라고 더 말하려는 순간, 한 하인이 급하게 달려왔다.
“부인, 중요한 전갈이 왔습니다.”
그는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작게 귓속말을 했다.
하인이 전한 말을 듣고 그녀는 잠시 눈이 커졌다.
“한참 부족한 모습이지만 이것으로 참으마.”
그 말에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초대된 모든 사람이 안도했다.
지옥이 끝났음을 선언했음이다.
“아 참, 이노무세키 백작부인”
“네? 네!”
“날을 잡아서 초대할 터이니 조카, 동생과 함께 오세요. 차나 마시며 여인들끼리 오붓하게 이야기나 나누게요.”
“네! 알겠습니다.”
이노무세키 백작부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숨 막히는 시간이 될 것이 자명했다.
괜히 이곳에 오는 바람에 경험하지 않아도 될 고초를 겪었다.
조카인 레티시아가 아니었다면…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언제 마녀로 몰려 죽임 당할지 모를 삶이라니 끔찍했다.
그런 이노무세키 백작부인의 마음을 알았던 것인지 페루제 공작부인이 말했다.
“그리고 오늘 오지 않은 부인들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어요. ‘이해할 만한 사유’가 없는 부인들은 오늘의 부재를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테니까.”
모든 부인이 생각했다.
어쩌면 마녀 의혹자 명단에 있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공작부인이 말하지 않았는가!
‘이해할 만한 사유’가 없는 부인들은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어떻게 후회하게 할 것인지는 알지 못하나 공작부인이 장담한 것처럼 상대는 고통스럽게 될 것임은 확실했다.
그녀의 정체를 아직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렇게 만들 힘이 있음은 확실히 깨달았다.
“오늘 모임은 이것으로 파하지요. 아이들 데리고 나가세요. 란델리노 이제 가자꾸나.”
“네, 어머니.”
“오늘 즐거웠니?”
“너무 즐거운 하루였어요.”
“잘 되었구나.”
페루제 공작부인은 자신이 할 말을 마치고는 란델리노와 성안으로 가 버렸다.
아주 사이가 좋은 어머니와 아들이었다.
조금 전에 일과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일 만큼 다정하고 따뜻한 분위기였다.
참석한 부인들에게 하는 호의적인 덕담이나 티타임의 종료를 알리는 말도 없었다.
이것은 그들에 대한 무시였으나 누구도 항의하지 않았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부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아이들에게 달려갔다.
“엄마!”
“으앙!”
어머니의 품에 안기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아이들도 눈물을 흘렸다.
그들에게는 평생 상처로 남을 경험이었다.
* * *
페루제 공작부인은 직접 란델리노의 상처에 약을 발라 주고 그의 손을 붙잡고 방 앞까지 같이 갔다.
그녀는 문 앞에 서서 그에게 말했다.
“오늘 고생했으니 내일까지는 푹 쉬어야지. 선생들에게는 말해 놓으마.”
“아니에요. 오늘 있던 수업을 내일로 미룬 것인데 그럴 수는 없지요. 일정대로 할게요.”
이제 란델리노를 막을 것은 없었다.
과거에 그들이 준 수치와 모욕을 갚아 준 것으로 더는 불운함이 그의 발목을 잡을 수 없게 되었다.
더는 가슴 속에 수치와 분노가 남아 있지 않았다.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네가 그리 말하니 어쩔 수 없구나.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하기 힘들다 싶으면 언제든 말하렴.”
“알겠어요. 어머니 저녁에 뵐게요.”
“그래. 저녁에 보자꾸나.”
* * *
란델리노는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봤다.
그리고는 혼잣말했다.
“그때를 떠올렸을 뿐인데…….”
아이들이 두려움에 굴복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어머니를 만나기 전에는 무섭기만 하던 그들이 지금은 두렵지 않았다.
하찮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것은 그의 기분을 아주 좋게 만들었다.
“짜릿해. 기분이 좋아.”
란델리노는 어머니를 통해 사람답게 살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한 힘을 가진 어머니가 자신의 편이 되자 그의 삶은 달라졌으니까.
“계속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삶을 살고 싶어.”
좋은 교육, 음식, 대우는 그녀의 힘에서 나왔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준 새로운 삶을 통해 온몸으로 느껴졌다.
권력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동안 권력의 필요성에 대해 배웠다면 오늘은 페루제 공작부인으로 인해 권력이 주는 쾌락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힘을 얻어야 하고 그 힘을 지켜야 해.”
절대적인 우위에 서 있다는 것은 그 상대의 삶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주는 희열은 마치 마약과 같았다.
절대로 놓을 수 없고 놓고 싶지 않았다.
란델리노는 침대에서 일어나서 책상으로 갔다.
의자에 앉아서 책을 펼쳤다.
아이들에게 맞았기에 쉬어야 했으나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어머니가 힘을 갖고 그 힘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만한 역량을 가져야 한다고 했어. 나는 늦게 시작했으니까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해.”
아이는 권력에 집착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들은 부수적인 요소였다.
그것에 집착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페루제 공작부인이었다.
그는 어머니처럼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
결점이 없는 어머니처럼 그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갈망했다.
“어머니의 아들답게 완벽해져야지. 그리고 훗날…….”
그리고 그 완벽함을 이루게 해주는 것이 권력이었다.
어머니와 권력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후계자가 될 거야. 어머니의 유일한 아들이니까 내가 되어야 해.”
어머니와 혈연관계가 아닌 그는 진정한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페루제 루비로즈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할 법한 생각은 아니었다.
꿈을 꾸고 깨어나서 갑자기 후계자 자리에 관심과 집착이 생긴 것이다.
* * *
란델리노가 권력에 대한 집착을 시작하고 있을 때 레티시아와 이노무세키 백작부인은 마차 안에 있었다.
“레티시아, 네 덕분에 살았구나. 네가 아니었다면 마녀 의혹자 명단에 들어서 잠을 자지 못했을 거야.”
레티시아는 떨고 있는 이모의 손을 잡았다.
진정시켜 주기 위함이었다.
“이모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것으로 끝났잖아요.”
“다시 부르겠다고 하는데 부를까 봐 불안해지는 것은 처음이구나.”
“누구라도 그럴 거예요.”
그녀는 자신도 확신 없는 말을 했다.
아까 단호했던 눈빛을 보았을 때 이모는 확실히 부를 듯싶었던 것이다.
‘이모도 알고 있으면서 부정하고 싶겠지. 아까 사람들 사이에 껴서 있었을 때도 숨이 막혔는데 마주 보면서 차를 마셔야 하잖아. 게다가 차만 마시는 것도 힘든데 이야기까지 나눠야하니까… 지금 이모는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일걸.’
그런데 레티시아와 그녀의 어머니는 애매했다.
진짜로 초대할지 아니면 형식적인 말이었는지 말이다.
귀족이기는 하지만 아버지가 영지도 없고 평민과 같은 삶을 사는 처지였다.
공작부인의 입장에서 높은 사람이 굳이 그들을 부를 이유가 없을 정도로 하찮았다.
정치적으로, 자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 없었다.
추기경조차 예의를 갖추게 만드는 여인과 그들은 사는 세계 자체가 달랐다.
레티시아는 최대한 그녀가 자신과 어머니를 초대하지 않을 이유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공작부인께서 나를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벌써 숨이 쉬어지지 않는 기분이야.”
불안해하는 이모가 가여웠다.
당차고 강한 이모였지만 공작부인은 차원이 다른 사람이다.
견디지 못하고 쓰러질지도 모른다.
“이모, 아직 일어난 일이 아니잖아요. 공작부인께서 스쳐 지나가는 말로 하신 걸 거예요. 진정하세요.”
그녀는 자신의 불안을 애써 감추며 이모를 다독였다.
이모는 어린아이에게 위로받고 있음에도 워낙 아이가 어른스러워서 그런지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 * *
페루제 공작부인은 란델리노를 방에 데려다주고 우아한 걸음으로 집무실에 왔다.
보고를 한 하인도 함께였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진중해 보였다.
마치 업무를 처리할 때와 비슷했으나 뭔가 달랐다.
“심기가 어지러우신 듯 보이십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실리는 기민하게 평소와 다른 미묘함을 알아챘다.
측근으로 그녀를 보필하며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여인다웠다.
“그이가 돌아오고 있다고 하더구나.”
수도에 있어야 할 공작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
언젠가 벌어질 일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예상보다 빠른 행보였다.
그 소식에 실리는 당혹스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