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화 과거의 굴욕을 지우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귀족은 더했다.
아이들이 성장하고 성인이 되면 분명히 적이 생길 것이고 그 적은 이날의 말을 명분으로 공격할 것이 분명했다.
그가 어린 나이부터 역심을 키우고 있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과한 발언이지만,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적의가 역심으로 변할 가능성은 있었다.
어릴 때의 감정이 커서 더 부정적으로 되는 경우는 의외로 많았다.
그런 가신을 곁에 둘 주군은 없었다.
주군의 미움을 받는 가문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번 세대에는 괜찮을지 몰라도 다음 세대에도 그 기조가 유지될 확률이 높았으니까.
가문이 추구하는 방향이 한번 정해지면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 방향을 틀어버린다는 것은 기존의 정책과 명령을 전부 바꾸는 것으로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그런 건 성장하면서 차근차근 배우면 되는 거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마렴.”
사이가 좋은 모자였다.
눈물 흘리며 고통 받는 아이들만 없었다면 좋은 그림이었을 것이다.
레티시아는 이 망조가 들린 상황에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여기서 자신도 어떤 꼴이 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녀가 벌을 받을 리 없었음에도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망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기 와서 이 꼴을 봐야 하지?’
생각에 잠겨 있는데 레티시아의 이모가 작게 속삭였다.
이노무세키 백작 부인은 공작부인의 시선을 끌까봐 차마 고개를 조카에게 돌리지 못했다.
“레티시아, 미안해.”
“네?”
그녀도 같은 이유로 이모에게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아이들이 매맞는 모습을 실시간을 봤다.
“내가 가자고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 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이야.”
‘나는 단지 소설 속 주인공에 관한 아이디어를 얻으려는 순수한 목적이었다고! 겸사겸사 친해져서 꿀이나 빨려고 했던 것이라니까! 내 주제에 무슨 공작 가문의 티파티야 하면서 현재에 만족하며 살았어야 했는데?!’
그 말을 들은 레티시아는 이런 생각을 하며 이모인 이노무세키 백작부인을 위로했다.
“내가 가겠다고 했잖아요. 전혀 미안해할 필요가 없어요. 이모.”
“새로운 공작부인께서 저런 분인 줄 누가 알았겠어요.”
“이해해 줘서 고맙구나.”
그녀는 아무도 아이들을 때리는데 막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니, 같았다가 아니다.
확신이었다.
저 냉혹한 공작부인이 아들을 밀고 있는데 누가 감히 그를 반대할 수 있겠는가!
자신들이 이곳에 돌아오기 전의 상황은 모르지만,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부인들의 모습은 페루제 공작부인이 소문과 전혀 다른 인물임을 예상하게 해줬으니까.
그 모습 덕분에 자식들 매질하는 것을 막지 못하기 전에 레티시아는 그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아무리 애들이 잘못했어도 말이지. 저렇게 패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를 않냐? 앞으로 여기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지. 웬만한 공포 영화는 저리 가라 하는 분이네.’
그 어떤 공포 영화도 페루제 공작부인보다 무섭지 않을 거라는 장담했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이 두려운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어떤 시선이 느껴졌다.
‘응?’
그 시선을 향해 고개를 움직였는데 공작부인이 있었다.
‘악!! 깜짝이야. 놀라서 죽을 뻔했네. 아니, 왜 저렇게 순수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거야? 지금 애들 때리는 상황과 대비되어서 더 무섭네.’
레티시아는 전생을 포함하여 전혀 경험하지 못한 두려움을 경험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제발 공작부인의 관심이 사그라들기를 기도했다.
그것은 레티시아의 이모인 이노무세키 가문의 백작 부인도 같았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레티시아에게서 시선을 뗐다.
“이노무세키 백작 부인.”
“네, 네!”
두려움이 컸던 것일까?
그녀는 품위도 잊고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서 대답하고 말았다.
평소였다면 비웃음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럽니까? 혹시 저 모르게 잘못한 것이 있나요?”
그녀가 그 웃긴 모습을 보고 농담조로 말했다.
웃으면서도 무서운 말을 서슴지 않던 공작부인을 떠올리면 농담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이런… 상당히 진지하신 분이군요. 농담 하나로 이리 놀라시는 것을 보니 말입니다.”
누가 봐도 두려움이 가득한데 ‘진지한 분’으로 정리해 버렸다.
모두가 그 뻔뻔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카가 가정교육을 잘 받았어요.”
레티시아를 칭찬했다.
그것은 진심이 담긴 칭찬이었다.
자기 위치를 아는 것은 아랫사람의 본분이자 기본이다.
그것을 어린 나이에도 할 줄 안다는 것은 대견해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칭찬을 하는데 받는 사람도, 그 사람의 보호자도 기뻐할 수 없었다.
마치 큰 한 방을 위한 준비처럼 느껴졌다.
“감, 감사합니다.”
“자기 위치를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하지요.”
공작부인은 레티시아를 향한 말은 부인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너희가 자기 위치를 알고 행동하면 그녀와 이노무세키 백작 부인처럼 무사할 것이다.
그들은 어서 이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갔으면 했다.
그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말을 이어 갔다.
“이노무세키 부인은 조카 덕분에 살았군요. 그대는 마녀 의혹자 명단에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
이노무세키 부인은 눈이 커지며 허리를 깊기 숙이며 눈물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에게 감사한다고 말하는 상황이 웃기기는 했다.
란델리노를 구하려다가 다구리를 당하는 선택을 한 조카다.
조카의 행동 덕분에 그녀는 언제든 마녀로 몰려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해방되었다.
공작부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이제 때리는 소리가 들지 않네?”
나뭇가지가 살을 때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공작부인이 란델리노에게 웃으며 다가갔다.
“이제 다 끝났니?”
“네, 어머니. 이 정도 했으면 더는 그들도 허튼 마음을 품지 않을 거예요.”
란델리노는 그동안 느꼈던 수치심을 씻어 낸 것처럼 개운해 보였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계획한 것처럼 그는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났다.
꿈을 통해서 거의 없어지기는 했으나 이제는 완전히 없어졌다고 할 수 있다.
대신에 다른 사람들이 평생 잊지 못할 트라우마가 생겼지만 어쩔 수 없다.
“너도 그들을 진정한 아랫사람으로 받아들였니?”
“네, 이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에요.”
“그래. 잘되었구나.”
그녀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아이들은 향해 걸어갔다.
부인들은 당장에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공작부인 때문에 일어나지 못했다.
“흑흑…….”
“아파, 아파…….”
“엄마, 엄마.”
아이들은 걷지도 못하고 쓰러져 있었다.
하인들은 그들을 부축하지 않았다.
공작부인이나 영식의 명령이 없었으니까.
그녀는 그들 앞에 무심하게 섰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위아래도 모르고 나대다가는 이렇게 매를 맞고 우는 꼴을 당한다.
하찮고 하찮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이 나중에 가문의 미래를 이끌 주역이라니 한숨이 나온다.
“일으켜.”
하인들은 다친 아이들을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두려움에 그들 중 누구도 칭얼거리지 않았다.
바라보는 눈빛만으로 뼈가 시린 기분이었다.
사신이 눈앞에 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딸꾹.”
아이 중 하나가 너무 놀라서 딸꾹질했다.
그 소리가 아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무서운 여인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자질이 부족해 보이기는 것들이구나. 그러나 너희의 자질이 뛰어난들 무슨 소용이겠니?”
한심하다.
란델리노와 비교가 되니까 그들의 하찮음이 더 돋보였다.
자신을 만나기 전에 란델리노는 혈통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을 지켜줄 사람도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도 말이다.
학대를 당하던 란델리노는 그 상처를 이겨 냈다.
“어미가 누구냐에 따라 이렇게 하찮게 되어 버리는 것을 말이야.”
한순간에 자신을 제외한 모든 부인을 하찮게 만들었다.
그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듯이 당당했다.
심한 모욕에도 부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어미가 부족하면 저렇게 되는 거야. 나같은 사람이 어미가 되면 란델리노처럼 인재로 자라나는 것이지.”
봐라! 저 당당하게 자신을 짓누르던 간악한 것들을 내려다보는 모습을 말이다!
자기 안에 있던 두려움을 이겨 낸 란델리노!
페루제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란델리노는 없었다.
“그나마 귀족 가문의 아이인 것을 다행으로 알렴. 아니었다면 길가의 거지보다도 못했을 것들이니까.”
그녀는 경멸이 담긴 눈빛을 갈무리하고 다정하게 웃었다.
다정하게 모욕을 하는 것이 사뭇 자연스러웠다.
“누구에게나 자신에게 맞는 위치가 있지. 그 위치에서 벗어나는 짓을 하면 죽는 거야. 아직 어려서 가르침을 준 것으로 끝난 것이야. 오늘 같은 짓을 어른이 되었을 때 했다면 너희는 매질이 아닌 사형을 당했겠지.”
페루제 공작부인은 뿌듯해하는 말투로 말을 이어 갔다.
자신처럼 상대를 배려하고 자비를 베풀 줄 아는 공작부인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미리미리 자신들이 살 방도를 가르쳐 주고 있다.
이렇게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가르침을 주는 공작부인을 만나다니 저들은 행운을 잡은 것과 같다.
남의 집 자식들을 걸어 다니지도 못하게 때려놓고 할 말도 생각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어떤 부인도 여기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지 못했다.
그 말에는 나이가 조금만 더 있었어도 죽여 버렸을 것이라는 뜻이 있음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작 가문의 영식을 때리고 모욕준 것은 누가 봐도 잘못이었다.
그것에 혼을 내는 것은 명분상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격하게 항의를 하고 싶어도 그들도 알 것이다.
새로운 공작부인은 그런 항의를 자비롭게 넘기지 않는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만약 너희가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내 아들 위에 있으려고 했다고 생각해 보렴. 반역으로 가문이 몰살당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너희 안에 잠재되어 있던 역심을 없애 준 것이니 너희의 미래와 가문의 구한 것과 같구나.”
그녀가 아이들을 하나하나 바라봤다.
그들은 그녀의 눈이 마주칠까 무서워서 시선을 바닥에 뒀다.
일부는 바지와 치마가 축축해졌다.
이게 별일이라고 바지와 치마를 젖게 만드는지 모를 일이다.
학대와 방치 속에 있던 란델리노는 의연하기만 하거늘. 다시 한 번 비교가 되었다.
“너희에게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준 란델리노와 나에게 감사하다고 해야지. 감사한 것을 감사해하지 않고 그것을 표현하지 않는 쓰레기들은 아니지 않니?”
부인들은 입을 벌렸다.
피가 너무 흘러서 맨살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렇게 때려 놓고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려고 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 경악할 것은 그 말을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뱉어 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여기서 대답을 하지 못한다면 더 때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머니도 자신을 외면하는 현실에서 어린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것은 바로 공작부인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었다.
대답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슬프게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