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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35화 (35/221)

035화 어설픈 자비는 적의만 심어 준다

“그러면 이들은 어느 선까지 벌을 내려야 적당한 것인가요?”

란델리노는 정말 모른다는 듯이 물었다.

그의 나이에는 ‘죄에 따른 적당한 벌’의 기준을 세우지 못한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렇기에 공작부인에게 물어본 것은 잘한 행동이었다.

“이번 일과 관련된 벌은 아주 간단하단다.”

그녀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해 줬다.

“저 아이들이 진정으로 네가 윗사람임을 뼛속까지 새길 때까지 그리고 네가 저 아이들 위에 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란다.”

모자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이 다가왔다.

그는 페루제 공작부인이 사교 모임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지배자는 명령을 내리는 자란다. 동시에 명령을 받드는 자들이 두려워하고 반드시 따라야 하는 존재지. 훗날, 이 공작 가문의 주인이 될 너도 그리될 것이라 이 어미는 믿고 있단다.”

이 말은 그녀가 자신의 권위와 아랫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신경쓰는지 알 수 있게 했다.

공작부인의 명령으로 인해 모든 고용인은 란델리노에게 고개를 숙이며 따랐다.

그런 그들이 자신이 모욕당하고 폭행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것으로 공작부인의 심기를 거스르는 짓이었다.

그런데 그가 맞는 도중에 나타나서 그를 보호했다.

란델리노는 자신이 아직 어린 나이지만 이제는 알았다.

이것은 어머니가 만든 무대였다.

그가 그들에게 두려움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만들 무대.

그렇다면 그 의도에 맞춰주는 것이 자식이 된 도리이자 공작 가문의 후계자가 해야 할 책무다.

잘못한 아랫사람을 벌주는 것은 윗사람의 책임이니까.

“어머니, 저에게 죄진 자들이니 제가 벌을 직접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그 말을 듣자 공작부인이 박수치며 활짝 웃었다.

어쩜 이리도 마음에 딱 드는 말을 하는지 그녀는 기뻤던 것이다.

“어머! 내 생각이 짧아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늘. 정말 기특하구나.”

감히 자신의 아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위를 훼손시키지 못하도록 할 계기.

란델리노의 권위를 높여줌으로 자신의 권위를 드높이려는 목적.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나올 수 없는 말이다.

기껏해야 자신 옆에서 그들이 매를 맞는 모습을 보고 과거의 두려움을 이겨 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이 틀렸다.

란델리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그릇이 큰 아이였다.

“하룻밤 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발전했구나.”

란델리노는 뜨끔했다.

어머니는 대단했다.

전날 잠을 자기 전까지 특별한 일이 없었던 것을 본인이 더 잘 알았다.

모두가 어머니의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아들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챘다.

“어머니의 아들인데 이 정도는 해야 어머니 아들답지 않을까요? 잠을 자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페루제 공작부인은 아들의 꿈이 이런 변화를 가져왔다고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깨달음을 주는 꿈을 꿨거든요.”

자신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일이 벌어졌는데 어찌 어머니가 알 수 있을까?

아무리 그녀라고해도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농담할 여유가 있니?”

“여유가 없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진짜였다.

여러 가문의 부인들도 입을 다물고 자식을 외면하는 상황이다.

어머니가 완전히 우위에 있거늘, 그녀의 자식인 자신이 불안에 떨 이유가 없었다.

“정말 성장했구나.”

예상하지 못한 성장세에 눈이 잠시 커졌다.

“네가 성인이 되어서 만들 가문의 미래가 기대되는구나.”

그녀가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벌은 네가 직접 내려라. 엄연히 너에게 죄를 지은 극악한 것들이니까.”

아이들을 호되게 매질하는 일을 어린 아들에게 당당하게 시켰다.

꿈으로 성향에 변화가 조금 생겼어도 그는 어머니를 누구보다 사랑한다.

어떻게 해야 어머니가 좋아하실지 생각하고 란델리노는 담담하게 말했다.

“맞은 자리가 잘 보이도록 의자 위에 서서 맞는 것은 어떠세요?”

그는 더 이상 아이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이 자신이 겪은 수치와 모욕도 지웠다는 의미는 아니다.

과거에 경험했던 굴욕감은 가슴깊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씻어 내고 당당하게 앞으로 나갈 기회가 필요했고 그 기회가 바로 지금이다.

“그래야 저도, 다른 사람들도 느끼는 것이 더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에 페루제 공작부인은 눈이 잠시 크게 떠졌다.

그리고는 곧 큰 웃음소리가 정원에 퍼졌다.

“어쩜 이리도 총명할까? 이 어미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그래. 의자 위에서 영식들은 바지를 접고 영애들은 드레스를 올려서 상처가 보이도록 하자구나. 모두가 잘 알 수 있도록.”

공작부인이 언급한 ‘모두’가 누구를 뜻하는지 모르는 바보는 없었다.

이곳에 참석한 부인들 그리고 그 부인들의 가문이었다.

오늘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잘 보고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말하라는 것이다.

오늘 그들은 뼛속까지 자신이 모셔야 할 사람들이 누군지 확실하게 각인되었을 것이다.

그녀가 눈짓을 보내자 하인들이 의자를 가져왔다.

신속하고 빠른 움직임이었다.

그들은 의자를 두고는 아이들을 그 위에 두려고 했다.

아이들은 자신이 당할 예정인 날벼락에 두려움에 떨었다.

그리고 나름의 저항을 했다.

“이거 놔라!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어머니 얼른 뭐라고 말해 주세요!”

“어머니, 어서 이것들을 혼내 주세요!”

그들은 자신의 가문과 곁에 있는 어머니를 믿고 소리쳤다.

비록 아까 외면을 했지만, 이번에는 구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너희는 곧 매질을 당할 거야!”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자신들의 목숨과 아이들의 미래를 움켜쥐고 있었으니까.

그녀들은 차마 자식을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회피했다.

언제나 자신의 편이 되어 주고 보호해 주던 어머니의 외면은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줬다.

그들은 새로운 공작부인이 상상하지 못할 만큼 더 높고 강한 사람임을 깨달았다.

그제야 상황 판단이 된 것이다.

억척스러운 손길에 억지로 세워진 아이들에게 모두 시선을 준 란델리노는 말했다.

“시작하기 전에 미리 말하지.”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일을 한다는 듯이 공적이었다.

‘달라졌다.’

그 모습을 본 실리는 당혹스러웠다.

어제 봤을 때만해도 지금처럼 능숙하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옅은 불안감과 걱정이 눈빛에 확연하게 드러났었다.

그래서 페루제 공작부인의 아들로는 한참 부족하다며 한심하게 생각했었다.

“죄의 무게만큼 힘을 줘서 때려라.”

죄의 무게라는 표현을 했으나 실상은 달랐다.

과거 란델리노는 힘이 없어서 피해자임에도 가해자를 벌할 수 없었다.

란델리노의 가치가 그만큼 형편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너희가 저들의 죄를 얼마나 무겁게 생각하는지 지켜보겠다.”

란델리노의 말은 자신의 가치만큼 세게 때리라는 것이다.

나아가서 그를 비호하는 공작부인의 권위를 생각해서 때리라는 의미였다.

이것은 가장 세게 때리라는 말과 같았다.

“네!”

“이제 시작해.”

봐라!

저 담담한 말투와 아무렇지 않은 눈빛을!

지금은 마치 공작부인처럼 완벽하게 감정을 감추고 있었다.

자신이 너무 쉽게 란델리노 영식을 판단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찰싹!

찰싹!

나뭇가지가 아이들의 여린 살에 상처를 냈다.

억지로 의자 위에 세워져서는 하인들에게 맞고 있는 그들은 소리쳤다.

“으앙, 어머니 구해 주세요.”

“너무 아파요!”

“으앙! 잘못했어요.”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에 동정심이 발동할 만도 하건만, 페루제 공작부인은 손톱만 한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데 동요하는 것이 웃기지 않는가.

죄인이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니까.

그녀는 우아하게 눈앞에 놓인 쿠키를 먹었다.

그 모습만 보면 티타임을 가지는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에 불과했다.

“으아아앙!”

“으아앙!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그들은 한참을 맞았다.

다리에는 피가 나서 서 있기 힘들었다.

아이들이 힘이 없어서 쓰러지려고 하자 야속하게도 하인들은 그들의 두 팔을 잡아 억지로 세웠다.

그만하라는 명령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부인 중 하나가 의자에서 일어나서 무릎을 꿇었다.

“부인. 아직 어린아이들입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엄하게 교육하겠습니다.”

모든 부인이 용기 있는 그녀를 마음속으로 응원했다.

더는 자식의 고통을 참고 보기 어려웠다.

부인의 말에 란델리노는 어머니를 슬쩍 봤다.

그 시선을 느꼈던 것일까?

그녀가 그에게 상냥하게 웃었다.

“아들아, 여기서 가르침을 하나 주마.”

그녀가 그 부인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부인들은 상황이 악화하였음을 직감했다.

“자비는 죄인들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란다. 어설픈 자비는 그들에게 적의만 불어넣지.”

“공작부인!”

애원하던 부인이 억울한 얼굴로 소리를 치며 항변하려고 하자, 그녀가 우아하게 말을 끊어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감히 내 말을 잘라? 아직도 이리 위아래를 모른다.’

교육을 시키려면 시간이 걸릴 듯싶다.

“닥쳐요. 자네 아들이 걷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기 전에.”

우아한 자태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바보들은 왜 가르침을 줘도 한 번에 깨닫지 못하는지. 쯧!”

“헉!”

부인들이 충격적인 발언에 숨을 들이켰다.

오늘 겪어 본 공작부인이라면 그리하고도 남았다.

“얼른 자기 위치에 맞게 자리에 앉으세요. 진짜로 그렇게 되면 아들이 부인을 얼마나 원망하겠어요.”

사색이 된 그녀가 얼른 일어나서 자리에 앉았다.

그것을 확인해 주듯이 실리가 조용히 채찍을 꺼냈다.

아들을 걷지 못하게 만들 수 없었다.

다시 우아하게 미소를 지은 페루제 공작부인은 의붓아들에게 눈을 돌렸다.

“란델리노.”

“네, 어머니.”

울고 있는 아이들을 조용히 바라보던 란델리노는 얼른 대답했다.

“벌을 자주 줘서 사람에게 공포심만 심어 주는 것은 지배자가 아니라 악인에 불과하단다. 그래서 벌은 필요할 때에만 하는 것이지.”

귀족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다시 차를 마셨다.

“역시 차향이 좋아.”

그녀는 찻잔에서 풍겨 오는 차향이 만족스러웠는지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에 대한 동정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전혀 없었다.

“그러나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지. 같은 죄를 다시 짓는 우를 범해. 벌을 내릴 때 단호하게 해야 하는 이유란다.”

“네.”

“어쭙잖은 동정심에 그들이 당해야 할 벌의 수준을 낮추거나 내리지 않는다면 누가 반성을 하겠니? 모시는 주인을 만만하게 여기게 만들뿐이지.”

란델리노는 페루제 공작부인의 말에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역시 어머니이십니다. 저는 전혀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했어요.”

반성하지 않는다.

그것은 귀족에게 무서운 의미였다.

반성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모른다는 것이다.

자신이 억울하다고 느끼는데 자신을 벌준 사람에 대해 어떤 감정이 생길까?

그것도 만만하게 느끼는 상대에게서 말이다.

답은 간단하다.

원망과 적의만 남는다.

가신 귀족이 하찮게 여기는 주군에게 복수하는 방법은 하나다.

반역.

아직 어린아이들은 순식간에 반역의 씨앗이 자라고 있는 예비반역자로 만들었다.

나이도 어린데 과했다.

그렇지만 공작부인이 뱉은 말이다.

한번 뱉으면 주워 담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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