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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34화 (34/221)

034화 과거의 오만은 단죄의 명분이 된다

그들은 자신이 경험해 본 적이 없고 경험할 것이라 여기지 않았던 일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공작부인께서 저 무도한 것들의 악행을 필히 아셔야겠군요.”

사실, 하인 따위가 귀족에게 이리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아이라고 해도 귀족.

귀족 모욕죄로 잡혀가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이 일을 알게 되신다면 그분께서는 결코 이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고…….”

그런데도 그가 당당하게 귀족 가문의 자제들을 무시하고 위협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곧 자신의 행동은 잊을 만큼 큰일을 당하게 될 테니까.

“이 일을 만든 원흉들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설령 어른들에게 말한다고 해도 공작부인의 사람인 자신을 귀족 모욕죄로 잡아갈 수 없다는 확신도 있었다.

란델리노는 하인을 빤히 바라만 봤다.

“영식께서 상황을 저에게 설명해 주신다면 제가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모습이 답답할 것 같으나 그의 눈빛에는 호기심이 가득 찼다.

그는 페루제 공작부인의 아들이 내놓을 답을 궁금해 했던 것이다.

“아니, 그대가 말할 필요 없어. 이 일에 대해서는 내가 직접 어머니에게 말하겠다.”

하인은 웃었다.

“역시 부인의 아드님다우신 판단력입니다.”

과연 공작부인이었다.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허투루 교육하지 않았다.

하인이란 작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작은 일이란 문제가 생기지 않을 업무들이었다.

가령 청소, 시중을 드는 일이 있다.

사고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도 있다.

“너희가 나서서 이 일을 알리기에는 너무 큰 사항이지.”

그러나 아쉽게도 공작 가문의 후계자를 폭행한 만행을 막지 못했다.

이것은 이제 하인들이 처리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 귀족 가문의 아이들에게 벌을 줘야 했기 때문이다.

하인에게 그럴 권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그들을 벌할 권리가 있는 사람에게 바로 말을 하려는 것이다.

뭐, 하인들을 통해 어찌 된 일인지 공작부인에게 전달할 수도 있었다.

“나는 내가 당한 모욕을 피하지 않아. 갚아 주지.”

그렇지만 란델리노는 그리하지 않았다.

하인을 통해서 어머니에게 이 일을 전하고 뒤에 숨어 있는 것보다 수치스러운 일임을 인정하고 대처하는 것.

그것이 그녀가 원하는 모습임을 알았다.

“그리고 이번 한 번뿐이야. 감히 자신이 모시는 사람을 시험하려고 하는 짓거리는 말이지.”

란델리노는 화가 났다.

자신이 얼마나 만만하면 하인 따위가 감히 자신을 시험하려고 들까?

‘감히 자신이 어떻게 반응할지 떠봐? 시키는 일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살기가 나왔다.

어린 나이임에도 성인의 살기를 떠오르게 했다.

그 하인은 흠칫하며 여기서 잘못했다가는 훗날 큰일을 당할 수 있음을 직감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불손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는 즉시 한쪽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페루제 루비로즈가 그를 아들로 키워 보기로 한 것은 이런 자질을 알았기 때문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인의 행동을 보고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는 하인이 맞기는 했다.

그러나 일반적인 하인이 아니다.

한 번 쓰고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어머니가 선택한 어머니의 사람이다.

자신이 함부로 어찌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그럴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은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자비를 베푸는 것은 이번 한 번뿐이야.”

상대도 그것을 알 것인데도 먼저 고개를 숙이며 들어왔다.

어머니의 사람에게 인정을 받은 기분이다.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이렇게 그에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도 꿈 덕분이다.

꿈은 오늘의 일만 보여 준 것이 아니다.

하인과 어떤 사내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보여 줬다.

대화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거울에 비친 사내의 모습은 확실히 기억이 난다.

아버지를 닮은 듯한 사내였다.

꿈이 아니었다면 그가 자신을 시험하려는 것도 모르고 바보처럼 넘어갔을 것이다.

“이 죄인들을 어머니께 데려가야겠지. 끌고 가!”

란델리노가 명령을 내리자 하인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

우렁찬 대답과 동시에 하인들은 우악스럽게 아이들을 잡아서 끌고 갔다.

흡사 진짜 죄인을 끌고 가듯이 험하게 대했다.

그들은 소리치고 울고 싶었으나 채찍을 휘둘러 때릴까 봐 참았다.

각인된 공포는 그들을 침묵하게 했다.

그렇게 두려움에 떨며 아이들이 끌려가는데 부인들이 보였다.

“으아아앙!”

“엄마!”

그들은 어머니가 곧 저 무도한 것들을 혼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온 힘을 다해 그녀들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에게 달려가려고 했다.

“저것들이 감히 우리에게…….”

“이렇게 우리를 막대하고…….”

하인들이 아플 정도로 잡으며 막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그런데 다가가면 갈수록 뭔가 이상했다.

뭔가 다른 분위기에 평소와 달랐다.

“우리에게…….”

“어…….”

아이들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무도한 하인들을 매질하고 혼쭐을 내줄 자신의 어머니가 다른 부인들처럼 당황스러워하며 오히려 두려움에 떨었으니까.

아이들도 눈치가 있었던지라 하소연하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흘렀던 눈물도 쏙 들어갔다.

“꿇어!”

“무슨 일인데 이리 험하게 아이들을 끌고 오는 것이냐?”

공작부인은 귀족 자제들을 차갑게 보면서 물었다.

하인은 그 차가움에도 담담했다.

“영식께서 저 죄인들에게 폭행을 당했사옵니다.”

“어찌하여?”

그녀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역시나 기대 이하를 보여 주는군. 감히 공작 가문의 후계자를 가신 가문의 아이들이 때릴 수 있단 말인가.”

어미를 닮아서인지 윗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나대는 꼴이라니 너무 예상대로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낮은 저음은 그녀의 심기를 나타내는 듯했다.

“어머니, 그에 대해서는 제가 말을 해도 되겠습니까?”

단정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얼굴에는 상처가 나 있었고 옷은 흙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한마디로 ‘귀족적’이지 못했다.

귀족은 우아해야 한다.

때와 장소, 그 목적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대놓고 무식한 짓거리를 한 아이들이 못마땅했다.

아무리 어려도 귀족은 귀족.

‘귀족’의 격을 낮추는 것 같아서 눈을 찌푸렸다.

“어찌 다친 것을 치료하지 않고 직접 온 것이냐? 하인들에게 들어도 되는 것인데 말이야.”

페루제 공작부인은 다정한 말투로, 걱정스럽다는 말투로 말했다.

자신이 공을 들이는 아이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그 대가를 치르게 해 주는 것이 맞았다.

“바로 치료를 할 수 있지만 그랬다가 제가 겪은 치욕을 거짓이라 말할까 봐서요.”

란델리노는 진실을 거짓으로 몰아갔던 부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들은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감히 누가 공작 가문의 후계자가 한 말을 거짓이라고 치부한단 말이야? 당장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그 말에 그런 일을 했던 다수의 부인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것을 빌미로 어떤 행동을 취할지 뻔했으니까.

“이제 어머니가 계시는데 설마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저는 저들을 벌주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네 뜻이 그렇다면 할 수 없구나. 그러면 어찌 된 일인지 말해다오.”

란델리노는 선심을 쓰듯이 부인들의 과거를 묻어 줬다.

어머니께서 알아서 잘 처리해 줄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그는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아이들과 있었던 일에 대해 상세하게 말했다.

거기에 아이들이 말할 기회는 없었다.

아이들이 입을 움직이려는 기색만 보여도 채찍을 들어서 보여 줬으니까.

“이들이 평소에 저에게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부터 말하겠습니다.”

“그래.”

이야기를 다 들은 공작부인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말했다.

“아이들이 이리 주인 될 사람을 무시하다니 말이 나오지 않는군.”

참으로 이상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도 란델리노에게 직접 들으니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린 나이에도 이런 데 나중에 커서는 칼을 들고 죽이려 들겠어.”

그녀는 혼잣말했다.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였다.

아이들을 미래의 역도 무리로 여겼다.

과했지만 란델리노의 상태를 보면 그리 여기는 것도 과하지 않았다.

“어미가 마녀라서 이 북부에 분열이 일어나게 하려고 그따위로 교육을 한 것인가요? 미래의 공작을 괴롭히고 멸시하라고?”

“아닙니다! 오해를 거둬 주십시오!”

“오해입니다!”

“이런 일이 없도록 엄하게 교육하도록 하겠습니다.”

마녀로 몰리면 고문과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귀족 명부에서도 제외가 되며 아이들은 평민으로 강등이 되고 강제로 수도원에 가야 했다.

“마녀로 낙인이 찍힌 여인의 자식들이 어찌 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수도원은 신관 혹은 수녀를 교육하는 기관 혹은 신관들만 거주하고 다닐 수 있는 신전이었다.

이는 가문의 후계자여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입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마녀의 자식’이라는 오명 아래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수도원으로 가서 가족들과 평생 만들 수 없게 된다.

게다가 그 가문의 사람들은 ‘마녀의 자식’이 자신의 가문 출신임을 숨기기 위해 그들을 외면했다.

“자비를 베푸신다면 그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부인들은 절실하게 애원했다.

정말 자식을 사랑해서인지 아니면 첩의 자식이 잘되는 꼴을 못 봐서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뭐 그대들이 그리 말한다면 일단은 믿어 보지.”

페루제 공작부인의 자비로운 말에 부인들은 다시 작게 안도했다.

“대신에 마녀 의혹자 명단에 넣어 두지요. 마녀가 아니라 의혹자니까 괜찮지요? 정말 마녀가 아니라면 말이에요.”

마녀 의혹자 명단이란 재판을 받지는 않았지만, 마녀일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적혀 있는 명단이었다.

이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게 되면 설령 귀족이라고 할지라도 즉시 마녀 재판에 올라가게 된다.

가문에서 어영부영 시간을 끌며 무마할 기회조차 없는 것이다.

게다가 한번 의심을 벗어났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조사 대상으로 신전 기록에 남는다.

다시 말해서 마녀 의혹자 명단은 공작부인이 부인들의 목숨을 평생 쥐락펴락하게 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부인!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내 자비는 그대들을 마녀 재판에서 구해 주는 것으로 다했는데 설마 그게 불만인가요?”

부인들은 공작부인이 뜻을 거두기를 바랐으나 헛된 꿈이었다.

여기서 불만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마녀로 죽겠다는 말과 같았다.

“이제 아이들에 대해 처벌을 해야겠구나. 나는 매질로 끝낼까 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매질이요? 괜찮은 건가요? 가신들의 자제들인걸요.”

란델리노는 꿈속에서 그녀의 반응을 봐서 알았다.

그렇지만 눈을 크게 뜨며 놀란 척했다.

여기서는 담담한 것은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는 이제 어머니의 지원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중이었으니까.

그는 꿈속의 자신은 레티시아라는 유일한 우군 때문에 용기를 내서 싸웠지만 마음속에는 그동안 쌓인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했었다.

꿈속의 자신이 지금의 자신인 것처럼 표정을 지었다.

꿈속에서 자신은 윗사람이라고 이성이 알아도 마음속 어딘가에는 패배감이 남아 있었으니까.

또한 가문의 아이들과 척을 져서 가신들과 사이가 나빠지는 것은 어머니에게 좋지 않았다고 여겼으니까.

어머니는 그런 관계에 연연하지 않는 분이지만 꿈속의 자신은 몰랐다.

걱정스러운 눈빛을 연기하며 그녀를 봤다.

“맞아야 할 짓을 했으니까 때리는 것인데 뭐가 문제니? 문제는 죄에 맞지 않은 벌을 내리는 것이지.”

그녀는 시원스럽게 대답이었다.

역시나 가치가 없는 관계에는 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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