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화 과거의 수치는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언제나 악녀는 공작가문에서 나오는 법이죠!”
로맨스 소설에는 고용주의 딸이 악녀인 바람에 같이 다니다가 억울하게 악녀랑 함께 생을 마감하는 엑스트라가 있었다.
“악녀를 따라다니는 액세서리로 있기는 싫어요.”
선한 사람임에도 악녀에게 억지로 끌려 다니다가 죽는 비운의 인물로 나왔다.
상사의 딸이 못돼먹기라도 하다면 자신의 개고생은 시작인 것이다.
“그래. 그러면 북부로 가자.”
레티시아가 식사를 마치고 방에서 책을 읽고 있을 무렵, 그녀의 부모들은 대화를 나눴다.
“계약은 어떻게 되었어요?”
“언니에게 바로 계약을 해달라고 했어요. 언니가 보니까 위치도 괜찮고 치안도 좋은 동네라고 하네요.”
“잘 되었어요.”
레티시아는 몰랐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이미 북부로 가기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거기 영애가 성격이 영 못돼먹었다고 하니까요.”
“가신들의 딸들이 고생하고 있다고 들었죠.”
“가신 가문의 영애들도 공작 영애로 인해 고생인데 하물며 몰락 귀족 가문의 영애는 오죽하겠어요.”
“북부로 가기로 한 것은 잘한 선택이에요.”
딸아이가 소설의 엑스트라에게 감정 이입을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을 알았다.
때때로 자신들이 부족해서 아이가 엑스트라에 더 감정 이입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마음이 아팠다.
“거기서는 레티시아가 조금만 더 자기 자신을 높이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맞아요. 자신을 마치 단역처럼 여기니까 마음이 좋지 않아요.”
삶의 주인공은 그 삶의 주인인 자기 자신이다.
그것을 모르게 한 것이 자신들이 아닐까 싶었다.
몰락 귀족 가문에다가 잘하고 있던 출판사는 문을 닫고 상단에 취직해야 하는 현실.
소설 속에서는 단역으로도 나오지 않을 인물이기는 했다.
“공작 가문으로 갔다면 레티시아는 자신을 더 낮췄겠죠.”
좋게 말하면 자기분수를 안다는 것이지만…….
“공작 영애의 들러리 역할이 뻔하니까요.”
그것은 저항해야 할 일에 저항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자기 위치라는 테두리에 갇히게 되는 것이니까.
부당한 일을 당해도 자신들 때문에 혼자 속으로 앓을 것이 뻔했다.
“역시 그 책을 두면 북부를 선택할 줄 알았어요.”
“우리 딸답다는 생각을 했어요.”
“언니도 거기에 있으니까 적응하는데 덜 힘들 거예요.”
“이모 본다고 신나하겠네요.”
* * *
그들의 생각대로 북부의 삶은 좋았다.
바뀐 환경이 낯설다는 두려움보다 색다른 경험이라는 생각이 그녀를 더 밝게 만들었다.
게다가 북부에는 레티시아가 부모님 다음으로 사랑하는 이모가 있었다.
이모랑 그녀의 어머니는 사이가 좋았다.
그러다 보니 이모네 자주 놀러갔다.
“이모부는 계세요?”
“아니, 며칠 상단일로 나가 있을 걸?”
“앗! 그러면 이모부 오기 전까지 매일 와야겠다!”
“그러렴.”
참고로 이모부는 시댁 식구랑 자기만 아는 쓰레기라 싫었다.
그래서 이모부가 부재중일 때에 갔다.
어느날, 평소처럼 이모랑 꽁냥거리는데 제안이 들어왔다.
“공작부인의 초대요?”
“그래. 영식 또래의 아이들을 데려올 수 있다면 오라고 되어 있더구나.”
“칸나 백작부인과 그를 위시한 부인들이 꼴 보기 싫어서 가지도 않으셨잖아요.”
“그동안 한번도 귀족들의 티파티에 참여할 기회가 없었잖니? 이번 기회에 한번 가 보는 것도 경험이 되고 좋을 거야.”
몰락귀족 출신의 아버지와 그 부인인 어머니는 사교계에서 무시당하기 딱 좋은 존재였다.
아버지의 집안이 있는지도 모를 사람이 대다수였을 만큼 한미했으니까.
“내가 같이 가는 것이니까 네 엄마랑 아빠가 생각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야.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렴.”
그래서 일부로 부모님은 귀족 사회에 관심을 껐다.
괜히 연관되었다가 모욕을 당하고 딸이 상처를 입을까봐 그렇게 행동했다.
레티시아도 그런 부모님의 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한 번도 그런 곳에 가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다.
굳이 부모님을 가지고 시비를 걸 무례한 이들이 가득한 곳이 가고 싶지 않았다.
“알겠어요. 이모 말씀처럼 저에게 좋은 경험이 될 거 같아요.”
이모는 그런 레티시아를 생각해서 싫은 모임에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그 마음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가야 했다.
원래 소설 속 악역이나 주인공은 대공이나 공작이지, 실제 소설 속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간접 체험이라도 하고 싶었다.
친분을 쌓아서 덕을 보면 더 좋고 말이다.
“북부의 공작 가문 영식은 어떤 사람일까? 만약 잘 생겼으면 소설의 주인공이나 악역으로 좀 아이디어를 얻어야지.”
보통 로맨스 소설에서는 악역의 운명은 정해져있다.
죽거나 유폐당하거나…….
또한 보통 로맨스 소설에서는 주인공과 악역의 유년기는 정해져 있다.
고통과 역경.
‘소설 속에서 괴롭힘을 당하며 자랐다는 문장이 실제로는 이런 거구나. 그 어떤 시녀나 시종도 말리지 않고 쫓겨난다는 것이 확정된 분위기까지! 얘 진짜 어쩌지!’
“란델리노 영식께서는 외로우신 분이란다.”
이모에게 란델리노에 대해 간략하게 들었다.
아버지와 고모의 방치로 외로운 아이라고 말이다.
레티시아는 칸나 백작부인으로부터 고립된 정도로만 생각했고, 외로운 아이에게 다가가 친해지면 된다고 쉽게 생각했었다.
이모가 최대한 좋게 이야기한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영식과 친해지지는 않아도 괴롭히지는 마렴.”
설마 공작의 아들을 이런 식으로 대놓고 우롱할 줄은 몰랐다.
레티시아가 귀여운 얼굴로 아이들을 째려봤다.
“뭐?! 어디 이름도 모를 허접한 집안 출신이 우리에게 감히 그딴 말을 해?!”
한 아이가 분노하며 레티시아를 발로 차며 밀쳤다.
“악!”
그 순간, 란델리노가 그 아이를 때려눕혔다.
예상하지 못한 란델리노의 주먹질로 주변이 혼란스러워졌다.
“으악!”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저거 왜 저래?”
“고개 숙이고만 있던 놈이 이상하네.”
“안 하던 짓하면 미친 거라고 하던데? 미쳤나 봐!”
“아니야. 안 하던 짓하면 죽는다고 하는 거야.”
“그러면 쟤 곧 죽어?”
그동안 란델리노를 얼마나 하찮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화였다.
완전히 약자로 가해자들에게 당하기만 해야 하는 것이 란델리노의 삶이었다.
“이! 익!”
자신의 아래로 봤던 상대의 반격에 아이는 얼굴이 빨개졌다.
상대가 공작 가문의 영식인 것은 떠오르지 않았다.
“너, 너, 너!”
너무 흥분하여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이는 주먹으로 란델리노를 가격했다.
슬프게도 란델리노는 아이에게 제대로 반격을 하지 못했다.
두려움이 엄습해서 저항을 못 한 것이라기보다는 체격의 차이 때문이었다.
또래라고 해도 대접이란 대접을 다 받으며 관리를 받아온 아이와 페루제 공작부인이 온 후에야 대접을 받아온 란델리노의 영양 상태부터 달랐다.
“너 따위가 나를 때려?! 곧 쫓겨날 놈이?!”
멈추지 않는 폭력에도 그는 굴하지 않았다.
“당장 저 아이에게 사과해! 바른 행동을 했는데 이런 일을 당할 이유가 없어!”
그는 자신을 위해 나서 준 이름 모를 소녀를 지켜주고 싶었다.
다수의 동조를 배신했을 때에 일어날 일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 내고 자신의 편이 되어 줬다.
“나는 나를 위해 나서 준 이를 외면하지 않아!”
‘꿈과 같아. 그 소녀는 나를 위해 나서줬어. 다수에 대항해야 하는 두려움에도 말이야.’
소녀는 대우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편이 된 사람 하나 지켜내지 못한다면 그 누가 그를 따를 것인가!
소년은 어머니의 말씀을 기억에 새기고 있었다.
“지배자는 자기 사람을 지켜줘야 하지. 그것을 못 한다면 남들 위에 있을 자격이 없어.”
란델리노는 훗날 공작 가문을 이끌어야 할 ‘예비 지배자’였다.
이런 작은 소녀 하나를 위해 나서지 못한다면 어머니가 실망할 것이다.
소설 캐릭터와 관련된 아이디어를 얻겠다는 진지한 의도를 가진 레티시아가 알면 자신을 스스로 자책할 만한 생각이었다.
덤으로 벨로나 영식과 친해져서 꿀이라도 빨면 좋겠다는 생각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생각했었다.
“저 아이는 너희처럼 비열하게 다수를 앞세워서 상대를 괴롭히는 족속들과 달라!”
자신의 순수한(?) 의도… 즉, 일차원적인 의도에 비하면 소년의 생각은 깊고 어려웠다.
“저 아이는 너희보다 훨씬 가치가 있는 존재야! 그러니까 저 아이는 건들지 마!”
아이는 어리고 순수하기에 더 잔인해질 수 있다.
몰랐다는 말로 무마할 수 있으니까.
“어서 때려!”
“맞아! 본때를 보여 줘!”
“저 오만한 기세를 꺾자!”
아이들은 맞고 있는 란델리노를 보며 비웃었다.
‘그러면 그렇지… 너 따위가 뭘 할 수 있냐’는 의중이 눈빛에 엿보였다.
레티시아는 죄의식 하나 없는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소리쳤다.
“야! 이 망할 것들아! 그만둬!”
막으려고 다가갔다.
“악!”
그리고 란델리노랑 같이 맞았다.
다구리 앞에 장사가 없는 법이다.
‘젠장! 그냥 악녀랑 엮이지 않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어! 이게 뭐야! 요행을 바라지 말라는 엄마말이 맞았어!’
그녀는 맞다 보니까 아이들뿐 아니라 다른 것에도 화가 났다.
‘그런데 어째서 말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야! 고용인들이라도 있었으면 이것들이 이러겠어?! 아니지… 고용인들이 외면할 것을 아니까 저 망할 것들이 공작 가문의 영식을 이리 대우했겠지!’
계산이 끝난 그녀는 어른들의 도움을 포기했다.
마침 근처에 있던 짱돌이 눈에 보인 그녀가 그것을 쥐려고 했다.
그때였다.
“너희 뭐야!”
보이지 않았던 고용인들이 갑자기 공작 영식을 때리던 아이들을 제압했다.
마치 이 상황을 기다려 온 것처럼 급작스러웠다.
그들이 오지 않았다면 ‘그녀가 잡으려고 했던 짱돌’로 인해 적어도 한 명의 생사는 장담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것이냐!”
“어머니에게 말해서 너희를 혼내 줄 것이야!”
아이들은 낯선 상황에 놀라 하면서도 지지 않겠다는 오기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것이 자신들을 나쁜 방향으로 인도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하인 하나가 혼잣말했다.
“어디에나 상황 파악을 못하는 것들이 있지. 에휴. 꼭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쯧.”
그리고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주 작은 채찍이었다.
그 채찍은 정확하고 빠르게 아이들에게 향했다.
“으아! 이게 무슨 짓이냐!”
“너희 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아이들은 처음 겪어 보는 아픔에 울면서 난리가 났다.
그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인은 나무에 채찍을 휘둘렀다.
“조용히 하시지요. 시끄럽게 굴면 다시 맞아야 할 것입니다.”
“흐윽, 흐윽.”
“끅, 끅.”
그 말에 아이들은 억지로 울음을 참고 말을 멈췄다.
자신들을 때린 하인이 다시 자신들을 때릴 수 있음을 느낀 것이다.
“영식, 괜찮으십니까?”
“괜, 괜찮아.”
하인은 굳은 얼굴로 꼼꼼하게 란델리노의 상태를 확인했다.
공작부인께서 고르고 고른 옷은 흙 범벅이 되었으며 친히 구해 온 브로치는 깨져 있었다.
또한 하도 맞아서 얼굴도 엉망이었다.
감출 수가 없는 폭력의 흔적이었다.
“이게 어쩐 일입니까? 어찌 감히 영식보다 낮은 자들이 이런 만행을 저질렀습니까?”
그 물음에 란델리노를 때린 아이가 말했다.
“저 녀석이 먼저 나를 때렸다고!”
그는 자신이 잘못이 아니라며 억울해했다.
“닥치십시오. 그대들에게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그는 자신이 치욕을 당한 것처럼 차갑게 아이들을 쏘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