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화 이상한 꿈을 꿨다 (2)
“정신이 들어?”
“응…….”
“알렉산드로에게는 서신을 보냈으니 곧 돌아올 거야.”
“고마워.”
그는 그녀의 안색을 살피고는 본론으로 넘어갔다.
“얼핏 보니까 장미 문신이 허리에 있던데 알렉산드로를 따라서 한 것이야?”
“응? 장미문신? 아!”
그녀가 자신의 질문에 대해 잠시 생각하고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이를 따라했냐고? 아니. 그이는 그런 문신이 없어. 너는 믿지 못할 이야기지만 어릴 때부터 있었어. 처음에는 아주 작은 줄기만 있었는데 점점 길어지더니 어느 순간에는 장미꽃이 새겨지더라고.”
그 말에 란델리노의 눈이 커졌다.
“그렇구나. 알았어. 이만 쉬어.”
그가 다정하게 말하며 손으로 눈을 감겨 주자 그녀는 다시 잠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방에서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그래. 그것은 분명히 루비로즈 가문의 요정 문신이야.”
어머니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지나가듯이 했던 이야기지만 신기하고 재미가 있어서 기억에 남았다.
“그래. 루비로즈 직계들에게 내려지는 장미 문신. 가문이 세워질 당시에 초대 가주에게 도움을 받았던 요정이 가족들이 예상치 못하게 헤어지게 되더라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도록 해줬다는 장미 문신이야.”
페루제 루비로즈는 란델리노에게 그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은 등 쪽에 그 문신이 있다고 말했었다.
가문의 가계도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린 이들에게만 나타난다고 들었다.
“그런데 알렉산드로는 그 문신이 없다고 했어. 분명히 그도 가문에 직계로 입적이 되면서 문신이 생겼을 것이라고 믿었는데 말이야.”
아내인 레티시아가 그 문신의 존재를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루비로즈 가문의 핏줄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혹은 방계가문 출신이라는 뜻이거나 말이다.
“만약 그 가설이 맞다면 레티시아는 누구의 자식이지?”
루비로즈 가문의 가계도를 천천히 떠올렸다.
“어머니가 때려서 죽였다는 사촌 오라버니가 있었지.”
낙마 사고로 아버지가 후계에서 밀려서 백작이 되지 못한 페루제의 사촌 오라버니였다.
“자루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고 사람들이 말했다고 하지만 그 자루 안에 정말 시신이 들어있었는지는 아무도 보지 못했지.”
굳이 죽이지 않고 죽은 것처럼 위장했다.
친했던 친족에 대한 자비인가?
어머니답지 않은 자비이기는 했다.
죽여야만 했던 동시에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면?
“가계도에는 딸이 적혀 있었어.”
부인이 가계도에 없는 이유는 모르겠으나 딸은 분명히 적혀 있었다.
납치를 당하여 사라졌다고 어머니는 말했었다.
생각을 정리하는데 그 순간 델로 백작이 생각났다.
뜬금없이 아무런 관계도 없는 레티시아의 대부가 되어 주겠다고 했던 인물.
처음에는 루비로즈 가문과 동맹을 맺고 싶어서라고 생각했다.
“그가 만약 어머니가 살려 준 사촌 오라버니라면?”
그렇다면 잃어버렸던 딸을 찾았고 그래서 사위인 알렉산드로에게 힘을 실어 준 것이라면?
그러면 그의 부자연스러운 접근도 이해가 되었다.
* * *
꿈속의 란델리노에게 계속 바라고 바랐던 것이 바로 과거로 가는 것이었다.
과거로 간다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며 지난날의 자신을 비관했다.
“그게 가능한 것인가?”
“시간을 거스르는 것은 본디 순리를 저버리는 짓이라 불가능하지만 말이야. 나는 특별해서 가능하거든.”
그는 검은 존재를 다시 경계했다.
그 불가능한 일을 굳이 자신에게 가능하도록 해주겠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뭔가 불순한 의도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페루제 루비로즈를 보면서 인간의 가능성과 욕망에 대해 보게 되었지. 정말 나를 즐겁게 해 준 여자야.”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행복에 젖어 있었다.
두 손을 맞잡으며 즐거워했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결말도 보고 싶어졌어. 그녀다운 다른 결말을 말이야. 어때 한번 그녀의 결말과 너의 결말을 바꿔볼래?”
이것은 진실이라면 당연히 그가 잡아야 할 기회였다.
그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여도 검은 존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여유로움이 란델리노의 마음을 움직였다.
“좋습니다. 그러면 어머니의 결말을 바꾸겠다는 목적이니까 나에게 따로 요구하는 것은 없겠군요.”
“없어. 단 제약이 있지.”
그것은 강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였으니까.
날아다니는 새들을 그 자리에서 멈추게 했다는 것은 시간을 멈췄다는 뜻일 것이다.
그는 마음을 정했다.
“모든 기억을 한 번에 다 갖고 돌아가는 것은 너무 불공평하지. 알렉산드로가 너무 불리하니까. 그러니까 꿈을 통해서 천천히 일부를 보낼게. 뭐, 내 기분에 따라서는 기억의 일부가 될 수도 있고 전부가 될 수도 있지만 말이야. 그래도 할래?”
“적재적소에 와 준다면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줄게.”
“좋습니다.”
그가 희생할 대가는 없었고 제약이라는 것은 감내할만 했다.
마음에 들었다.
그는 검은 존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번 생에서는 자신이 패자였지만 다음에는 자신이 승자일 것이다.
“좋아. 그러면 이제 잠을 자. 내일 아침이 되면 너는 과거로 돌아가 있을 거야. 네가 달라졌음을 많은 이들에게 알린 날로 말이지.”
* * *
그리고 아침이 되었다.
“영식, 오늘은 일찍 일어나셔야 합니다. 페루제 공작부인께서 여시는 첫 티타임이니까요. 여러 부인들과 그 자제분들이 오실 것입니다.”
그는 개운하고 기분이 좋은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너무 상쾌한 아침이었다.
모든 고뇌가 사라진 듯한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오늘을 경험해 보지 않았음에도 경험한 듯한 기분이었다.
오늘의 아침 햇빛이, 아침식사가 낯설지 않았다.
‘낯설지 않지만 더 소중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제까지 그는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자신을 믿고 이 자리를 만든 믿음을 저버려서는 아니 된다.’ 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지금은 그 부담감도 사라졌다.
‘그 꿈 때문인가……?’
아마도 자면서 꾼 꿈 때문인 듯싶었다.
하루의 시작이 꿈과 같았다.
그 꿈 덕분에 두려웠던 연회가 기대감으로 물들었다.
그래서 눈앞에 있는 아이들의 무례가 같잖게 느껴졌다.
“그동안 나에게 한 모욕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해.”
당하기만 하던 란델리노가 적극적으로 그들을 혼내듯이 말하자 한 아이가 울컥해하며 말했다.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했던 상대가 저항하자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공작님의 아들이면 다야? 너는 칸나 백작 부인께서 쫓아내실 거거든.”
그 아이의 말을 시작으로 다른 아이들도 뒤따라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 모두가 다 알거든. 너는 여기 계속 못 있어. 바보야!”
“반역자의 자식이 어디서 우리에게 그런 말을 하냐!”
“반역자의 핏줄은 반역자라고 엄마가 말했어! 우리는 반역자랑 놀지 않아.”
“그래서 너는 우리보다 아래야!”
어른들이 그에게 한 행동이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전염된 것이었다.
아이들은 그 말에 상처받을 란델리노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본래라면 상처를 받았겠지만 꿈의 영향인지 전혀 상처받지 않았다.
“그동안 어른들에게 그렇게 들었겠지. 그러나!”
무작정 어른들을 따르는 아이의 순수함이 만든 잔인한 말들이었다.
란델리노는 담담했다.
세상이 바뀐 것을 눈치채지 못한 아둔함이 한심할 따름이었다.
“설령 나중에 그렇게 될지라도 나는 지금 공작가문의 유일한 아들이야. 너희가 이렇게 나를 모욕할 권리를 없어.”
언제나 당당한 어머니를 떠올리며 말했다.
마치 그녀가 된 것처럼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지금은 나를 따르고 모셔야 함이 마땅해. 그러니까 사과하고 고개 숙여.”
어린 나이임에도 란델리노의 눈빛은 성인의 잔인한 눈빛 그 자체였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여기에 있는 듯처럼 닮았다.
그녀를 떠오르게 하는 서늘함은 아이들을 소름을 돋게 하기 충분했다.
“내가 주는 마지막 기회를 잡아. 후회하지 말고.”
아이들이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소리쳤다.
“얌마! 너희 뭐하는 짓이야!”
누군가의 목소리에 란델리노가 고개를 빠르게 움직였다.
그가 크게 웃었으려고 했다가 얼른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어린 소녀가 담겼다.
그녀는 그들 사이를 막았다.
그리고는 란델리노와 대치 중이던 아이들에게 삿대질했다.
“감히 영식께 무례하게 굴어?! 이는 공작 각하를 무시하는 거라고!”
그 소녀는 양 갈래 머리를 귀엽게 하고는 그들을 노려봤다.
붉은 노을을 떠올리게 하는 머리카락은 소녀와 잘 어울렸다.
그는 소녀가 누군지 몰랐다.
이제껏 모임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소녀를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꿈속의 소녀다.’
란델리노는 실제로 본 적은 없었으나 익숙한 얼굴이라고 느껴졌다.
꿈속에서 초면임에도 유일하게 자신의 편이 되어 준 소녀였다.
꿈속의 자신은 누군가가 자신을 옹호해 본 적이 없었기에 당혹스러워했다.
현실에서는 꿈을 통해 미리 이 상황을 알았기에 놀라지 않았다.
란델리노는 아직 모르지만 그가 이상한 꿈으로 치부한 꿈은 꿈이 아니었다.
그는 기억하지 못했으나 회귀를 했고 그 기억들이 꿈을 통해서 천천히 전해지고 있었다.
그 기억이 전부 돌아올지 아니면 일부만 돌아올지는 아무도 몰랐다.
회귀라는 것 자체가 시간을 거스른다는 것 자체가 순리를 역행하는 행위였으니까.
“웃기지 마! 곧 귀족도 아닐 놈을 우리가 왜 따라야 해!”
생각지 못한 란델리노의 아군에 아이들은 놀랐지만 곧 진정되었다.
그 소녀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아직 일어날지 일어나지 않을지 모를 일 때문에 너희처럼 오만하게 구는 가신은 없어!”
소녀는 은근슬쩍 란델리노의 얼굴을 수시로 확인하며 크게 말했다.
주변의 모든 어른이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젠장! 무시한다고 듣기는 했지만 너무하잖아.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어! 하여튼 어린 것이 더하다니까!’
소녀는 속으로 무개념의 아이들을 욕했다.
“너희의 그 무개념은 누가 가르친 거냐!”
화를 참지는 못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부모의 행동을 보고 배웠으니 소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들의 부모는 막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소녀의 이름은 레티시아.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고 소설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그녀의 장점은 자신의 분수를 안다는 것이다.
자신이 소설로 치면 이름도 없이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엑스트라면 어떤가.
행복한 가정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법 없이 살만큼 행복하다.
다 같이 즐겁게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이제 다시 일해야지.”
부모님은 출판업을 하셨는데 몇 년 전에 정리했다.
사기를 당했다든가, 과감한 투자가 망해서 정리한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은 자신들의 일을 사랑하셨으며, 의욕적이었다.
즐거운 이야기로 사람들을 삶의 노곤함에서 잠시라도 풀어주겠다는 포부도 있었다.
“아직 몸이 좋지 않으신 거 아니세요?”
그렇지만 세상에서 가장 귀한 재산은 건강이다.
과한 의욕에 몸을 혹사시켜서 쓰러졌다.
“우리 딸 걱정시켜서 미안. 이제는 아주 건강하단다.”
아버지의 말에도 레티시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가 다정하게 말했다.
“네 아빠는 이제 괜찮으니까 걱정 마렴.”
요양 후 건강을 되찾았지만 그 일을 다시 하기에는 부담이 되었다.
‘어머니가 이렇게 말한다면 정말 아버지는 괜찮아지신 거야. 다행이다.’
“이제 아빠는 이곳저곳 지원서를 넣을 정도로 괜찮아졌어. 그렇죠?”
하여튼 건강해진 아버지는 새로운 직장을 찾으려고 노력을 하셨고 성공하셨다.
“엄마 말이 맞아. 그리고 2곳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하더구나.”
“2곳이요?”
“북부의 상단이랑 남부의 공작 가문이지.”
직장 후보는 2곳이 있었다.
하나는 남부의 공작 가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북부 공작령의 어느 상단이었다.
“공작 가문이랑 상단이라고요?”
“그래. 우리 레티시아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꾸나.”
일도 더 적고 급여도 더 많고 대우도 더 받는 남부의 공작 가문에 가자고 했을 것이다.
“고용주의 딸에게 끌려 다니다가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고 싶지 않아요.”
전날 읽었던 로맨스 소설이 문제였다.
자신의 분수를 너무 잘 알아서인지 자신과 같은 엑스트라 급의 인물들에게 감정 이입을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