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화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다
추기경 곁에 있던 대신관은 안절부절 못했다.
그는 속으로 부인들을 욕했다.
‘망할! 미쳤다고 교황 폐하와 추기경님의 하사품을 모욕해?! 여기서 나보고 나서라고? 나섰다가는 마녀의 추종자로 몰려서 잔혹하게 죽임을 당할걸. 대신관이란 작자가 마녀의 끄나풀이었다며 더 고통스럽게 하겠지.’
평소에 친분이 있던 부인들이 보였지만 목숨보다 귀하지 않았다.
자기들의 잘못을 왜 자신이 대신 수습해야 하는가!
대신관은 그들을 외면했다.
분노한 추기경을 진정시키려고 했다가는 자기가 죽을 판임을 눈치챈 것이다.
“우아한 귀부인들이라면 하지 않았을 추악함입니다.”
그는 계속 목소리를 높였다.
주변의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마녀가 선동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이들 중에 있을 마녀를 찾아내야 합니다.”
그 말에 모든 부인이 온몸이 떨려왔다.
마녀재판.
악마와 관련이 있는 여인들을 잡아내는 재판이었다.
그렇지만 이름만 ‘재판’이지 사실상 고문 후 사형과 다르지 않았다.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서 하는 절차가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설령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고 해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거짓을 말해 사형당하거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 것이 운명이었다.
귀부인들을 죽이겠다고 말한 것과 같았다.
“여인 하나 괴롭히는 것이 어찌 마녀가 한 것이겠습니까?”
“세상에! 그러면 알펜 왕국의 여인들은 이리도 간악한 것입니까?! 한 명의 여인을 다수가 괴롭히는 것이 당연시될 정도로요!”
사실, 여인 하나를 조롱하고 괴롭히는 것은 사교계에서는 만연해 있었다.
마녀 재판을 그것으로 벌인다면 이 세상에 재판을 받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즉, 이런 일로 재판을 하겠다고 하면 웃기는 소리하지 말라고 코웃음을 칠 일이라는 것이다.
“마녀들이 여인들을 간악하게 만들고 교황 폐하와 저를 모욕하도록 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교황과 추기경이 내린 하사품을 모욕한 것이 엮이니 사정이 달라졌다.
추기경이 교단의 지도자들을 조롱한 마녀 혹은 마녀들이 공작부인을 괴롭히는 것을 구했다라는 이야기가 되어 버렸으니까.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겠네요.”
그녀는 추기경의 말에 동조하듯이 말했다.
고민이 되었다.
그냥 몇 명을 본보기로 데려가라고 할까 아니면 그냥 전부 살려둘까?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자신에게 나쁜 것은 없었다.
부인들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머리를 바닥에 대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렇게 수준이 낮은 사람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한 번만 봐주십시오!”
“다시는 분수를 모르는 행동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개처럼 울부짖었다.
약자에게 강하게 굴고 강자에게 비굴하게 구는 것들에게 어울리는 모습이다.
아무리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상대가 강하든, 약하든 승리를 쟁취한다는 것은, 우위를 점했다는 것은 자신의 기분을 좋게 해줬다.
부인 일부를 마녀로 몰아서 죽일지 아니면 모두 살릴지 하던 고민은 머리에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속으로 즐기던 공작부인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제가 오해를 한 모양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 누가 그들을 귀족이라 여기겠습니까?”
옷만 귀하게 입었다고 해서 귀족이 아니다.
너희는 귀족의 교양조차 없는 하찮은 것들이다, 이것은 공작부인의 말에 내포되어 있던 의미다.
그런 조롱이 담겨 있는 것치고는 다정하고 자비로웠다.
기분이 좋았으니까 다정하고 자비로울 수밖에 없다.
“저들의 수준이 낮은 것을 어찌 마녀라 몰아붙이겠습니까? 자비를 베풀어 주시지요.”
아까까지 부인들이 한 비아냥을 배로 갚아 주는 말이었다.
‘귀족 같지도 않은 잡것’이라는 말이었으니까.
그 따스한 목소리에 추기경이 흥분을 가라앉힌 듯했다.
그는 헛기침하고는 말했다.
“부인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군요.”
추기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들은 이제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하려고 했다.
“혹시라도 마녀로 의심되는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지 알려 주십시오.”
안도할 때가 아니었다.
공작부인이 명단을 적어 넘기는 순간에 그들은 죽은 목숨이었다.
추기경이 ‘언제라도’라는 표현을 했다는 것은 언제라도 그녀들을 마녀 재판에 세우겠다는 의미였다.
“물론이에요. 마녀를 신고하는 것은 신도의 도리지요.”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녀로 넘기겠다는 말을 우아하게 했다.
즐거움을 지금 끝내기에는 아쉽다.
언제든 다시 즐겁게 놀 수 있다는 경고를 부인들에게 남겼다.
부인들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러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하군요.”
“아닙니다. 언제라도 불러 주십시오.”
“교황 폐하께 저번에 말씀하신 일은 걱정 마시라고 전해 주세요.”
알펜 왕국의 왕이 전에 군사를 이끌고 교황을 잡으려고 했었다.
그 시도가 실패하고 한숨 돌리고 성도를 정상화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이제 성도가 그때의 여파에서 빠져나온 듯싶었는데 이번에는 카플란 왕국의 왕이 그리하려고 움직였다.
호전적이기로 유명한 카플란 국왕을 막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군대가 필요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군사적 지원을 약조한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교황 폐하께서도 흡족해 하실 것입니다.”
추기경은 부인들의 인사는 받지도 않고 가 버렸다.
하지만 부인들의 다리에서 힘이 빠져서 인사할 수 없기는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공작부인은 차를 음미했다.
향까지 맡으면서 여유를 부렸다.
부인들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겨우 자리에 앉았다.
“여러분. 자세를 바르게 하세요.”
그녀는 그들을 보지 않았다.
찻잔에 시선이 향해 있었다.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아까부터 지적하고 싶었던 것들이었으니까.
지금까지 참느라 혼났다.
“윗사람을 만나는데 긴장감이 없다는 것은 만만하게 보는 것밖에 되지 않아요.”
그녀는 다정한 말투를 이어 갔다.
“배에 힘을 주고 허리를 세우세요. 표정은 오만하지 않아야하고요.”
아까 비아냥을 들었을 때와 차이가 없는 모습이었다.
비아냥을 들었을 때도 지금도 그녀가 우위에 있었으니까.
변화가 없으니 아까랑 차이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내 말을 듣기 싫다면 아까처럼 해도 괜찮아요.”
그러나 반응은 아까와는 완전 달랐다.
희극을 보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것이 나름 보는 맛이 있었다.
“아닙니다!”
“생각이 짧아서 이제야 자세를 잡습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그녀가 추기경조차 아래로 둘만큼 힘이 있음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확인만 했을 뿐이랴?
지금 그들의 목숨 줄을 쥐고 있었다.
기분을 상하게 했다가는 어떤 일이 닫칠지 몰랐다.
이 일이 알려진다면 덮으려고 국왕이 주도하여 비밀리에 그들을 죽일 수 있었다.
그런 두려움을 안다는 듯이 공작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우리끼리의 일로 하죠. 국왕 폐하께서 혹시라도 아시면 어떻게 여기실지 걱정이 되니까요.”
“물론입니다!”
국왕의 입장에서 교황과 추기경을 모욕한 무리를 놔둘 수 없을 것이니까.
자칫 그 자신 배덕한 무리에 동조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었다.
이는 혈통과 왕의 기본 자격 중 하나인 신앙심을 의심받는 것이었다.
신을 믿지 않는 이단자는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하는 불순한 세력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국왕은 왕은 북부의 귀족부인들 몇 명을 살리자고 자신의 권위에 흠집을 내는 바보는 아니었다.
“입이 근질근질한 부인들은 말해도 괜찮고요.”
이번 일은 비밀로 한다고 해서 비밀이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여기에 있는 부인들이 몇 명이고 고용인들이 몇 명인가?
아까 왔던 추기경과 그 측근들까지는 또 몇 명인가?
이 일을 말할 입들이 너무 많았다.
추기경과 교황 폐하를 모욕한 부인들의 이야기는 소문이 금방 퍼질 것이다.
“사실 우리가 조용히 한다고 해도 소문은 날 것이니까 상관이 없기는 하죠. 말하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 말해도 괜찮아요.”
그렇지만 지금의 일이 소문이 나더라도 잊혀지도록 할 수는 있었다.
추기경이 벌을 따로 내리지 않는 상황이다.
처음에 소문이 나면 난리가 나겠지만 곧 잠잠해질 것이고 이 일을 언급하는 사람이 없다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도 지워질 것이었다.
“국왕 폐하께서 어떻게 나올지 볼까요?”
그러면 왕의 귀에 이 일이 들어가도 별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아닙니다!”
국왕은 모두가 중요시하지 않는 일을 굳이 꺼내서 문제를 만드는 귀찮은 상황을 만들 바보도 아니었다.
아쉬웠다.
한 사람 정도는 정신을 놓고 알겠다고 했으면 했는데 말이다.
왕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으니까.
그 정도로 생각이 없는 부인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요? 그러면 일단 내가 만족할 자세로 앉을까요?”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들이 만족스러울 만큼의 자세를 잡을 때까지 기다려 줬다.
기다림 끝에 모든 부인이 허리를 세우고 공작부인에게 경청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라스타 왕국의 부인들에 비하면 아직 부족함이 많았다.
그렇지만 오늘은 이만하면 되었다고 싶었다.
아직 제대로 자신을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까.
나중에 자신을 경험하다가 보면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힐 것이다.
“아까까지 여러분이 하고 싶은 말을 했으니 이제 내가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꿀꺽.
누군가가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평소라면 핀잔을 줬겠지만 그 소리를 누구도 듣지 못했다.
바로 눈앞에 자기들의 목숨을 가지고 놀던 여인이 있었으니까.
“나는 여러분의 호의가 필요하지 않아요.”
그녀는 비워진 찻잔을 바라봤다.
시녀에게 눈짓하자 찻잔에는 차가 가득 채워졌다.
두려움에 떠는 그들에 관한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미 충분히 즐겼기에 흥미가 없었기도 했다.
“호의가 필요할 때는 상대와 내가 비슷할 때죠. 적으로 싸우게 되면 피곤하니까요.”
그녀는 따뜻한 차를 우아하게 마셨다.
그녀는 귀족 그 자체였다.
평민들이 귀족을 표현하는 말 중 하나인 ‘푸른 피를 가진 자’에 들어맞는 모습이었다.
냉혹하고 잔인하며 그 행동에 흔들림이 없었으니까.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존재가 귀족이다.
“여러분 중에 나와 싸울 사람이 있나요?”
모두가 침묵으로 답했다.
공작부인과 싸울만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래요. 이제는 아는가 보군요.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목숨이 위험해져야 잘못을 고치죠.”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눈치를 채고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공작부인은 그들의 수준을 한참 밑바닥으로 낮추며 조롱했다.
태도와 말투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랬다.
“그대들의 호의가 필요 없듯이 그대들의 불만에도 나는 관심 없어요.”
공작부인과 맞설만한 상대라면 공격할 때를 기다렸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예요.”
그녀는 아름다운 미소로 말했다.
“복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