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27화 (27/221)

027화 뱀의 아가리에 걸어 들어온 부인들

란델리노는 약속된 날의 전날까지 최선을 넘어 최고의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열심히 예법을 배우고 연습했다.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각오가 불러온 노력이었다.

잠까지 줄여가며 하니 공작부인이 걱정할 정도였다.

“너무 무리는 하지 마렴. 네 건강이 우선이란다.”

진심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란델리노의 입장에서 걱정 어린 말은 그의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아직 부족해. 더, 더 완벽하게 해야지.”

그는 자기 나름대로 어머니 몰래 연습을 했다.

은밀하게 한다고 해서 모를 공작부인이 아니지만 그랬다.

단지 아이가 민망해할까 싶어서 모른 척했을 뿐이다.

* * *

그리고 공작 가문의 영식은 두려워하는, 공작부인은 기대하던 그날이 왔다.

“공작부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저희가 생각한 것보다는 한미하지 않다고 하던데 말이에요.”

“글쎄요. 그냥 성격이 보통이 아닌 거 아닐까요? 빚 갚느라 성품은 못되게 되었을지 누가 알아요?”

“그것도 맞는 소리네요.”

초대장을 받은 귀부인들이 아이들과 함께 모두 공작성에 왔다.

얼굴조차 만나기 힘들었던 공작부인에 대한 궁금함 때문이었다.

“칸나 백작부인도 그렇고 그날에 대해 말을 하지 않네요.”

“친했던 부인이 배신자였다는 것이 충격이기는 하죠.”

“아니, 우리끼리는 솔직해야죠.”

“맞아요. 사실, 우리끼리니까 말하는데 칸나 백작 부인에게 빌붙으려고 있던 부인들이잖아요.”

“친하면 얼마나 친하겠어요.”

“의리 때문에 함구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왜 그날의 일에 대해 말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칸나 백작부인이 불온한 세력의 부인 때문에 해를 당할 뻔했다는 소식은 알려졌으나 그 내막을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목숨을 잃을 뻔했던 날에 있었던 부인 중 누구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발설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 사건을 빌미로 사교계에서 공격을 당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누군가는 다음에 진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 수 있었다.

만약 이 모임에 참석한 부인들이 그날에 대해 알았다면 이리 쉽게 오지도 함부로 입을 놀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드디어 모두 모였군요.”

모든 부인이 준비된 자리에 앉고 얼마 뒤에 드디어 모임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공작부인은 아름다웠다.

미모로는 알펜 왕국 최고라 불리는 미녀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들은 아름답다는 생각보다 소름이 돋는다는 생각을 했다.

‘왜 이렇게 팔이 차가운 느낌이 들지?’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네. 왠지 마주하면 큰일이 날 것 같은 기분이야.’

눈처럼 하얀 피부와 핏빛처럼 붉은 입술은 그녀를 사람처럼 보이지 않게 해줬다.

부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공작부인께 인사드립니다.”

만만하게 보는 것과 달리 인사만큼은 정중했다.

부인들이 얼마나 나대려고 예의를 차리는지 기대가 되었다.

방심시켰다가 시비를 거는 것은 괴롭힘의 기본이다.

처음부터 괴롭혀서 고개를 숙이게 하는 것은 덜 즐거운 일이었다.

자기들이 덫에 걸린 줄도 모르고 기대에 찬 표정을 본 페루제 공작부인은 웃음을 겨우 참았다.

“만나서 반가워요. 그동안 일이 있어서 여러분을 이제야 초대하게 되었어요.”

공작부인은 우아하게 말했다.

인사 어디에도 이제야 그들을 초대한 것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말투에서라도 미안한 기색이 있느냐?

전혀 아니다.

미안하지 않았으니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할 위치가 아닌데 왜 하겠는가?

너무 당당하여 부인들은 깨닫지 못했다.

들어보면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것에 불과했음을 말이다.

“아닙니다. 성내의 전염병이 돌아서 난리가 아니었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저희가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이 아니지요.”

부인들은 자신들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에 굳어졌던 얼굴을 풀고 말했다.

엔간하면 부인들의 말을 받아 줄 만도 한데 공작부인은 달랐다.

“부인들, 말 하나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에요.”

그녀는 다정하게 웃었다.

아이를 가르치는 어른처럼 우위에 서서 말이다.

“그대들은 내 행동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따라야만 하는 것이지요. 감히 윗사람의 의중을 멋대로 파악하려고 들다니요.”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화합을 위해 초대했다고 볼 수 없는 차가운 시작이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입을 다물고 눈치를 봤다.

그녀는 싸늘하게 부인들을 쳐다보다가 아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 들어오면서 조잘거리는 소리가 어찌나 정신이 없던지 입을 다물어주니까 좋네.’

“또래끼리 우애를 다지라고 초대했는데 나 때문에 놀지도 못했구나.”

‘내 아들처럼 의젓하면 좀 좋아? 자식 교육도 제대로 못하는 것들이 귀부인이라고 앉아있다니. 쯧! 역시 나처럼 훌륭한 어머니는 없음이야.’

페루제 공작부인은 감미로운 미소를 보여 주며 그녀는 곁에 있던 란델리노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여기, 내 아들이자 공작 가문의 장남인 란델리노 벨로나에요. 인사하거라.”

“란델리노 벨로나입니다. 앞으로 부인들과 영애, 영식들에게 모범이 되는 윗사람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머리가 좀 돌아가는 부인들은 란델리노의 인사를 듣고는 서로를 곁눈질하며 봤다.

자신들과 아이들의 윗사람이 뜻하는 바는 하나다.

란델리노가 다음 대의 공작임을 스스로 표명한 것이다.

이런 인사를 아이 스스로 할 리가 없었다.

새로운 공작부인의 입김이 있었음이 확실했다.

그녀들은 속으로 여러 생각을 했다.

‘아직 가문 내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으니 아이를 이용하는 거겠지.’

‘아이만 낳아 봐라. 저 아들을 쫓아내는데, 가장 적극적이게 될 걸.’

‘겉으로는 위하는 척하면서 칸나 백작 부인처럼 괴롭히겠지. 의붓아들을 위하는 계모가 얼마나 있겠어?’

‘후계자라고? 칸나 백작 부인이 가만히 있겠어? 공작의 지지를 받는 칸나 백작 부인인데 움직이겠지.’

머리가 적당히 좋으면 이런 오판을 하게 된다.

차라리 아무 생각이 없는 편이 나을 때가 있다.

바로 지금이다.

“늠름한 인사구나. 그렇지 않나요?”

공작부인이 웃으며 그들에게 답이 정해진 질문을 던졌다.

“예, 물론입니다.”

“과연 공작 각하의 아드님다우십니다.”

그녀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었다.

실제로 그러했다.

그녀에게 개소리가 들렸으니까.

“그이의 아들다운 것이 아니에요.”

무슨 헛소리인지 모르겠다.

왜 아이의 늠름한 인사를 그이의 아들다운 것이라고 하지?

란델리노는 태어날 때부터 공작의 아들이었지만 칸나 백작 부인의 괴롭힘을 당하며 살아왔다.

“네?”

아버지에 의해 무관심으로 방치된 아들이 되어서 당당하지 못했다.

역도의 핏줄이라는 명분까지 더해져서 학대당했다.

‘페루제의 아들’이기에 지금의 늠름함을 가지게 된 것이다.

공작은 지금 아이의 당당함에 그 어떤 것도 보태 주지 않았다.

“내 아들다운 것이죠.”

“네.”

그녀는 부인들의 대답에 만족스러워하며 자리에 앉았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군요. 이제 연회를 시작해야겠네요.”

부인들은 공작 각하의 아들이라서 늠름하다는 말로 공작을 치켜세우려고 것인데 페루제가 그것을 부정하고 나섰다.

남편의 권위를 세우지 못할망정 막은 것이다.

아내의 도리가 아니었다.

본래라면 이를 꼬집고 비아냥거려야 했다.

그런데 부인들은 페루제의 기세에 눌려 버렸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할 뿐이었다.

“란델리노, 영애들과 영식들을 데리고 가거라.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있어야 친해질 수 있으니까.”

“네, 어머니.”

공작부인은 의연하게 대답하는 란델리노를 잠시 바라봤다.

전날까지만 해도 눈동자에 불안감이 엿보였다.

전날의 란델리노와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달라졌다.

눈동자에는 자신감과 기대감만이 느껴졌다.

어떤 것을 계기로 변했는지 궁금했다.

보고 받기로는 특별한 일도 없었기에 말이다.

“어머니?”

자신을 빤히 보는 어머니를 의아해하며 란델리노가 부르자 정신이 들었다.

자신답지 않게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렸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니 순서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랑 가 보렴.”

“네!”

란델리노가 힘차게 대답하고 아이들과 자리를 떠났다.

그들이 사라지고 부인들은 떠올렸다.

첫 번째는 공작부인 자신들보다 수준이 낮은 가문출신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칸나 백작 부인이 아니었다면 공작부인이 될 꿈조차 꾸지 못할 여인이었던 것이다.

세 번째는 빚 때문에 여인의 의무인 지참금조차 가져오지 못한 하찮은 여인이었다는 것이다.

“제가 이번에 새로 들인 차가 있는데 마셔 보시지요. 귀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공작부인이 되고 나서 마시게 된 차인데 향이 좋습니다.”

그녀들은 첫인상의 오싹함 때문에 자신들도 모르게 공작부인에게 고개를 숙인 것이었다.

부인들에게 공작부인은 공작 각하의 부인이라는 위치를 제외하고는 자신들보다 한참 아래였다.

격에 맞지 않은 하찮은 이에게 잠시라도 굴복했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다.

그냥 본능을 믿고 계속 굴복해야 마땅했다고 후회할지도 모르고 말이다.

찻잔을 들어 입에 대자마자 한 부인이 빠르게 말했다.

차의 맛을 음미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어머, 참으로 독특한 맛이네요. 한 번도 마셔 본 적이 없는 맛이네요.”

그 말을 시작으로 다른 부인들도 말을 이었다.

그녀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었다.

“그러게요. 이곳에 오기 전에 취향이신가 봐요.”

“혼인 전이라면 빚더미에 있을 때네요. 평생 길들여진 입맛이 쉽게 변하겠어요.”

혼인 전에 귀족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했던 그녀를 조롱하는 것이었다.

너는 귀족적인 삶을 몰라서 이따위 차를 골라서 대접하냐는 뜻이었으니까.

부인들의 비아냥에도 공작부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차를 음미하더니 대답했다.

“선물로 받은 것인데 별로셨나요? 저는 좋은데 말이에요.”

공작부인은 부인들의 안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이에 부인들은 신이 났다.

물고 늘어지기 좋은 소재를 스스로 투척했으니까.

“이해해요. 원래 사람은 익숙한 것을 찾기 마련이니까요.”

“그럼요. 차차 공작부인께서도 귀한 것을 알아보실 수 있게 될 거예요.”

“저희가 도와드려야죠.”

“네, 언제든 공작부인께서 도움을 요청하시면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녀들은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 모습에 페루제 공작부인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녀는 간단하게 대답을 하고는 부인들을 본 상태로 손을 들었다.

시녀 하나가 얼른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자신의 귀를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댔다.

공작부인이 작게 말했다.

“손님을 불러오게.”

“네.”

시녀는 빠른 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해 가 버렸다.

“계속 이야기들 하시지요.”

공작부인은 우아하게 차를 다시 마셨다.

그런데 그녀가 데려오라고 한 손님은 누구일까?

그것은 나중에 알 일이다.

다만 부인들은 자신의 뱉은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될 것이다.

“여기 정원을 꾸미는 석상들은 요즘 유행이 아닌 듯싶네요.”

“공작부인의 취향이 저희와는 다르네요.”

부인들은 한결같이 그녀가 귀족적인 취향이 아님을 강조했다.

“이것도 선물을 받은 것이랍니다.”

그녀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공작부인은 자신을 향한 비아냥을 알고 있음에도 기분 나쁜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것은 그녀를 공격하던 부인들의 기분이 더 나빠지는 기현상을 만들어 냈다.

마치 알아들을 수 없는 개소리를 듣는 것처럼 공작부인이 그녀들을 대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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