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화 트라우마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란델리노는 떨리는 입술에 힘을 주고는 말했다.
아이들이 자신에게 어떻게 굴지 이미 알았다.
그것은 좋은 모습이 아닐 것이 뻔했다.
“어머니, 제가 예법을 제대로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제가 다 익힌 다음에 해도 되지 않을까요?”
“네 나이의 아이들이 예법을 익히면 얼마나 익혔겠느냐.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그녀는 아이의 불안을 읽지 못한 것 같았다.
예법을 완벽히 못해도 괜찮다는 말만 하는 것이 그렇다는 뜻이다.
사실, 아이의 마음을 알았지만 무시했다.
그 마음을 알든, 모르든 자신의 결정에 번복은 없을 것이니까.
“사교 모임에서 어머니에게 누를 끼칠까 봐 걱정이에요.”
그러나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실망해서 외면하게 될까 두려웠다.
아직은 어머니가 자신을 버릴 수 있다는 불안이 강하게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니 섭섭하구나. 이 어미는 네가 좋은 친구들을 만나는 것으로 만족한단다.”
하지만 본인을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라고 한다.
칸나 백작 부인처럼 그를 조롱하고 수치를 주기 위함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을 위함이다.
“알겠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공작부인으로 인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기에 더욱더 그러했다.
정해진 티타임이 끝났다.
“너를 위해 시간을 더 내고 싶은데 아쉽구나.”
“어머니께서 이곳에서 가장 바쁘신 분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이해해 주니 고맙구나.”
그녀는 집안을 장악하기 위해 할 일이 아주 많았다.
그 업무량은 그가 상상하지 못할 만큼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란델리노를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낸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정치적 계산이나 좋은 이미지를 주기 위한 계획은 없었다.
“어머니, 그러면 저녁에 뵐게요.”
“그래, 그때 보자꾸나.”
란델리노는 축 처지려는 어깨와 등을 억지로 펴고는 방을 나갔다.
항상 귀족다움을 잃지 않아야 어머니가 좋아하실 것이니까.
“영식께서 불안해하시는군요.”
“그렇지… 내가 애정을 주고 대우를 해준다고 마음의 상처가 금방 사라지겠어?”
페루제 공작부인도 실리 시녀장도 란델리노가 불안해하고 있음을 알았다.
라스타 왕국에서 온갖 일들을 이겨 낸 사람들이다.
“생각보다 훨씬 상태가 좋지 않았어.”
어린아이가 숨기려는 불안 따위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도 아주 잘 알았다.
별채에서 그에 대해 아주 많이 들을 수 있었으니까.
“영식께서는 매일 고용인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계십니다!”
“유모가 매일 때린다는 소문이 있어요!”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살려고 발악하면서 잘 설명해 줬다.
참고로 잘 설명해 줬다고 살려 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본디 약자를 괴롭히는 것이 본성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공작 가문의 후계자에게서는 그러지 말아야지.”
사람이란 본디 악하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하게 구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리고 강자의 자리에 있는 존재가 약자라면 더 신나서 괴롭힌다.
강자를 괴롭힌다는 희열이 약자를 괴롭히는 것보다 더 재미가 있다.
란델리노는 본래대로라면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위치에 있을 공작 가문의 후계자다.
그런 아이를 괴롭힐 수 있다니 놓칠 수 없었겠지.
“악함을 이겨 내는 선인들이 존경받는 이유기는 하지만 말이야. 짜증이 나는군.”
사람의 악함은 소수의 선한 존재가 추앙받는 이유다.
악한 본성을 이겨 내고 선한 선택을 했으니까.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모두가 착한 세상이었다면 선한 사람은 존경받지 못했을 것이다.
당연한 것을 존경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세상이 악하니까 선한 사람이 존경을 받는 것이다.
“그렇죠. 그런 인간의 욕망이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가는 경우가 많죠. 또 모욕과 멸시가 준 굴욕감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요.”
소수가 가진 어떤 것들은 고귀함으로 보이기 마련이다.
그것이 호구 취급받기 좋은 선함일지라도 말이다.
실리는 ‘모욕과 경멸’로 인한 수치심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로 인한 분노도 말이다.
어린 시절, 그녀는 추악한 외모로 인해 마을에서 죽임을 당할 뻔했다.
“저 악귀가 이 마을에 불행을 몰고 오는 것이오!”
“맞아요! 죽여서 마을을 정상으로 만들어야 해요!”
마을에 닥친 역병과 도적의 습격을 ‘추악함을 가지고 다니는 여아’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 원흉이 사라지면 마을에도 나쁜 일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저런 것이 내 자식일 리가 없어. 악마가 심어 놓고 간 아이가 분명해.”
“저런 흉측함을 봐. 우리와 부모가 같을 수 없잖아.”
“하나부터 열까지 추하지 않은 곳이 없어.”
친부와 동생들조차 그리 생각을 했다.
“실리, 얼른 도망가. 여기 돈을 챙겨 뒀으니까 아껴서 쓰고 최대한 멀리 가야 해. 사람이 많은 곳으로 말이야. 알았지?”
오직 친모만이 실리가 살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녀를 마을에서 도망갈 수 있도록 했다.
아버지 몰래 모아 둔 돈주머니를 주던 어머니의 가녀린 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자유롭고 안전하게 살아야해.”
만약 친모의 결정이 없었다면 그녀는 페루제 공작부인 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아들인데 언제까지 과거에 묶여 있게 할 수는 없지.”
피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아들이다.
과거에 얽매여서 앞을 보지 못하는 머저리가 되는 꼴은 못 본다.
페루제의 이름으로 기르는 아이다.
“내 아들은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고개를 당당하게 들고 있어야 해.”
그런 아이가 남에게 고개 숙이는 것을 당연시하면서 굴욕을 당한다면 화가 나서 잠을 자지 못할 것이다.
“만약 실패하시면 어쩌시렵니까?”
실리가 왜 실패를 언급하는지 몰랐다.
자신이 하는 일에 실패 따위는 없으니까.
“응? 그대는 성공했잖아. 그러니 그 아이도 해낼 거야.”
라스타 왕국의 실세 중 하나이자 페루제 루비 로즈의 측근으로 성공한 실리는 고향으로 갔다.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그분만 모시고 오자. 그분만 모셔 오고 과거는 다 잊고 살자.”
수많은 사람 중에 그녀가 살기를 원했던 단 한 사람인 어머니였다.
마음 같아서는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했다.
“그동안 고생하신 것을 다 보상해드려야지. 맛있는 것만 드시게 하고 좋은 것만 입게 해드려야지.”
실리는 어머니만 모시고 과거의 일은 넘어가기로 했다.
“과거에 집착해서 불행해질 필요는 없어.”
때때로 악몽을 꾸게 하는 모욕들이 있었지만 참기로 한 것이다.
“어머니가 어떻게 되셨다고?”
자신을 도망치게 했다는 이유로 몰매를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병도 아니고, 도적떼도 아니고 가족에게, 이웃들에게 맞아서 죽었다고?”
자신들이 죽이려고 했던 실리가 귀족이 되어서 나타났다.
가족들도 마을 사람들도 경악했다.
그리고 곧 자신들이 죽임당할 수 있음을 인지했다.
그들은 실리를 죽이려고 했었으니까.
그뿐이랴?
그녀의 어머니를 죽였다.
“실리! 용서해다오! 원래 마녀는 죽이는 것이 맞잖니! 우리는 그것에 따랐을 뿐이야!”
“네가 이렇게 성공할 줄 몰랐다! 제발!”
“악마를 도운 마녀라고 생각했다! 오해했다! 미안하다!”
가증스러웠다.
평생을 죄책감도 없이 살다가 자신이 귀족이 되니까 사과하는 모습에 치가 떨렸다.
자신의 어머니를 마녀라며 죽여야 마땅했다고 자화자찬했을 그들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생각해 보니까 이곳에 마을은 없었어. 그치?”
그녀는 그들을 뒤로하고 자리를 뜨면서 기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마을이 없는 곳이니까 사람도 없어야겠지. 모조리.”
“알겠습니다.”
실리는 그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마을이 없었던 곳인데 사람들이 몰살당했다는 것이 말이 되나? 그런 헛소리는 넘어가야지. 뭘 그리 신경을 쓰니?”
페루제 공작부인의 묵인 하에 그들을 반역자들로 몰아서 도륙한 것이다.
풀 한 포기조차 나지 않도록 불까지 지르고 나서야 그녀는 어린 시절의 상처가 치유되었다.
그 이후로는 그 시절과 관련된 악몽을 꾸지 않았다.
“실언했습니다.”
실리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공작부인의 아들이 그녀보다 못하다는 말로 들릴 수 있었으니까.
강자에 의해 생기는 어이없는 죽임은 많았다.
특히 그 의중을 읽기 어려운 주인 곁에 있으면 그런 일이 벌어질 확률이 높았다.
“내 아들은 잘 이겨 낼 거야.”
아들은 느리기는 하지만 뚜벅뚜벅 천천히 성장하고 있었다.
성장할 줄 아이니까 분명히 기대에 부응해 줄 것이라 믿었다.
“성장할 줄 알고 승리할 줄 아는 나의 아이니까.”
그러니까 좀 더 속도를 내도 될 것이다.
가뜩이나 할 일이 많으니까 하나라도 빨리 처리를 해야 했다.
“맞습니다. 공작부인께서 그것을 위해 무대를 마련하셨으니까요.”
“그래. 그러니까 빠르게 극복하겠지.”
공작부인은 ‘빠르게’라는 말을 했다.
마음의 상처를 먼저 빨리 해치워야 할 업무처럼 느껴지게 했다.
마음이라는 것이 그녀의 말처럼 빠르게 치유가 되는가?
아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말한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그것이 가능했다면 평생 그 상처에 망가진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 상처를 이겨 내는 사람들도 단번에 마음을 다잡고 이겨 내지는 못했다.
천천히 마음을 갈무리하고 새로운 희망을 찾고 자신들만의 노력을 하면서 상처를 치유한 것이다.
마음이란 그리도 섬세하고 연약하다.
“그러면 언제로 날을 잡을까요?”
마음의 흔들림이 없는 삶을 살아왔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리 살 것이다.
그래서 마음의 상처라는 것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 왜 마음의 상처로 사람이 좌절하며 죽어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상처에 미래를 향해 나가지 못하는 것도 말이다.
“가까운 시일이 좋겠지. 이번 주 내로 하지.”
이해가 되지는 않으나 어쩌겠는가.
아들의 일이다.
얼른 해결을 봐야 했다.
그 상처를 잊게 만들어 줘야 했다.
내 아들이 그따위 것에 헉헉대며 힘들어하는 것을 보기 싫었다.
“알겠습니다. 시녀들에게 그리 말을 전하겠습니다.”
시간이 촉박했다.
아랫사람들이 고생할 것이 뻔했고 시녀장 자신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실리는 그저 묵묵하게 대답했다.
시간이 촉박하다고 말해도 명령이 바뀌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좋아. 이제 기다리면 되겠네.”
두 사람은 전혀 ‘마음의 연약함’을 고려하지 않았다.
적어도 실리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괘념치 않았다.
“실패할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내 믿음이 깨진다면 그 대우도 달라질 필요가 있겠지.”
어차피 이런 일조차 극복하지 못한다면 공작 가문의 후계자로는 있을 수 있어도 공작부인의 아들로는 온전하게 있지 못함이다.
자신이 준 모든 혜택을 빼앗지는 않겠지만 약간의 페널티 정도는 받게 될 것이니까.
“물론 잘할 것이라고 믿지만 말이야.”
란델리노는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가 준비한 시험을 보게 되는 상황이 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