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화 달라진 란델리노의 삶
새로운 공작부인의 등장은 란델리노의 삶도 바꿔 놓았다.
그가 지나가자 고용인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그가 지나갈 때까지는 결코 허리를 들지 않았고 눈빛에서는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이 담겨 있었다.
예전과는 180도 달랐다.
“이번에 새로 들인 고급 옷감으로 만든 의복입니다.”
피부가 가렵던 싸구려 옷감이 아닌 최상품으로 만들어진 의복을 입었다.
“고용인들이 곁을 모실 것이니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시종과 시녀가 란델리노가 필요로 할 때 언제든 있기 위해 3교대로 곁을 지켰다.
“상위 몬스터 중 하나인 블러드 베어로 한 스테이크입니다. 영식의 몸보신을 위해 경매에서 바로 가져왔습니다.”
식사로 과거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고급스러운 만찬이 제공되었다.
모두의 무시와 냉대가 있었던 것이 무색할 만큼 그는 대우를 받았다.
그 누구도 공작부인이 보호자를 자청한 ‘아들’을 건들지 않았다.
어느 조직이든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무리가 있게 마련이었지만 공작성 내에 그런 기조는 없었다.
거슬리게 했다가는 별채로 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들을 억지로라도 빠르게 변화에 적응하도록 했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보던 란델리노가 씁쓸하게 웃었다.
“어머니가 내 어머니라서 다행이야.”
여기서 웃긴 사실은 무시당하던 공작의 외동아들은 공작부인의 아들이 되어서야 대접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 * *
란델리노는 빠른 걸음으로 어느 문 앞에 섰다.
“영식, 오셨습니까?”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시녀가 그를 맞이했다.
시녀는 눈을 바닥에 깔았지만 비굴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 어머니를 뵈러 왔지.”
“공작부인께 말을 올릴까요?”
“잠시만…….”
그는 문 앞에 서서는 옷차림에 흐트러짐이 있는지 확인하고 다시 확인했다.
어머니가 귀족은 언제나 귀족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했으니까.
다행히 정갈한 모습이었다.
“이제 말해다오.”
“공작부인, 영식께서 부인을 만나길 청하고 있습니다.”
“들어오거라.”
그 말에 란델리노는 환한 얼굴을 하며 열리는 문으로 들어왔다.
어머니가 자신을 거절하지 않는 것에 대해 언제나 행복하게 여겼다.
그녀는 우아하게 창밖을 보며 차를 마시고 있었던 듯싶었다.
찻잔을 내려놓고 란델리노를 바라봤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늦었구나.”
“죄송해요.”
오랫동안 무시당했던 그에게 비굴함은 당연했고, 본능적으로 사과부터 했다.
어머니가 자신을 언제든 버릴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친부조차 자신을 버렸으니까.
공작이 선택한 방법은 방치였을 뿐이다.
“란델리노.”
“네, 어머니”
기가 죽은 듯한 아들에게 그녀는 다정하게 말했다.
속으로는 혀를 찼다.
아직도 멀었다 싶었다.
겸손은 사람의 격을 높이지만 너무 자신을 낮추는 것은 스스로를 하찮게 만드는 짓이다.
자신이 기른 아들이 하찮게 여겨진다면 그를 기른 자신도 하찮게 된다.
기왕 아들로 키우기로 했는데 그럴 수 없었다.
자존심이 상한다.
“나는 너를 혼내려는 것이 아니란다. 단지 네가 평소보다 늦은 이유를 알고 싶은 거지. 아들에 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 이상하니?”
지금 란델리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화를 내어서 점점 개선되어가는 아이를 다시 예전으로 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아니에요! 어머니!”
그는 어머니가 애정을 가지고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물어봐 주세요!”
애정에 굶주린 아이는 타인이 주는 애정을 갈구하는 법이다.
“그러면 이제 이유에 대해 말해 줄 수 있겠니?”
그녀는 한결같은 다정함을 보여 줬다.
공작의 고모님과 그 측근들의 목숨을 가지고 놀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 믿기 힘든 모습이었다.
“공부하다가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요. 그 내용에 대해 계속 보다가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어요.”
누구에게도 해 본 적이 없던 말을 한다는 것이 낯설고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아니, 상대가 주는 관심이 그를 따스하게 해줬다.
그는 몸을 비비 꼬고 싶은 것을 참았다.
예법 선생님이 귀족은 우아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귀족다움이란 귀족의 우아함을 유지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말투, 행동 하나하나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어머니처럼 완벽한 귀족이 되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물어봤는데 평소 생활에서부터 신경을 써야 한다고 알려줬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는 눈이 커지더니 말했다.
“정말 대단하구나. 어려운 것을 포기하지 않고 습득하려고 하다니 말이야.”
란델리노를 자랑스러워하고 있다는 진심을 눈빛으로 전달했다.
“정말 자랑스럽구나.”
진심이었다.
정말 대견했다.
자신의 오라버니들은 조금만 어려워도 포기하고 외면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하나는 여색을 밝히는 쓰레기가 되었고 다른 하나는 도박에 미친 쓰레기가 되었지.
“어려운 일이 눈앞에 있을 때에 패배하는 자들은 포기를 변명과 핑계로 정당화한단다.”
자신이 뱉은 말에 그 어떤 거짓도 없다는 확신을 했다.
참으로 세상에 참 ‘못 하는 이유’가 많다.
오라버니들의 핑계는 늘 새롭고 달랐다.
“그러나 승리하는 사람들은 너처럼 포기하지 않고 뛰어넘으려고 하지.”
오라버니들 말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어쩔 수 없는’ 혹은 ‘그 어려운 일보다 우선시 되는’ 일이 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 어려운 일을 가족 때문에, 사랑 때문에, 우정 때문에 포기한 적이 없었으니까.
언제든 ‘그 어려운 일’을 위해 그것들을 버릴 사람이었다.
“가치가 없는 것에 뒤돌아보거나 멈추지 않아서 너무 좋구나.”
그것을 뛰어넘었을 때 가질 수 있는 것들이 더 소중했다.
“승리를 향해 가는 자세를 어린 나이에 익히다니 만족스러워.”
그것은 권력을 향해 가는 단계였으니까.
“저는 패배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거예요. 어머니처럼 승리하는 사람이 될게요.”
그리고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준 공작부인이 주는 가르침은 란델리노에게 법이고 진리였다.
페루제는 자신의 양육 방법이 틀리지 않았음에 기분이 좋아졌다.
공작부인은 아들의 대답에 만족해하며 물었다.
“가정교사들은 어떠니?”
란델리노는 어머니가 데려온 가정교사들을 떠올렸다.
어머니는 기존의 가정교사들과 일대일 면담을 가지고는 바로 다 치워버렸다.
‘격에 맞지 않는 것들은 너의 격을 떨어뜨리지. 너에게 맞는 사람들로 구해주마.’
칸나 백작 부인이 데려온 가정교사들은 침 뱉을 가치조차 없는 것들임을 새롭게 들인 가정교사들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 * *
“긴장하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수업의 난이도를 정하기 위함이니까요.”
첫날, 란델리노의 수준을 파악하기 위한 시험을 치렀다.
제대로 배운 것이 없으니 창피할 정도로 망치는 것은 당연했다.
가정교사의 위로는 전혀 와 닿지 않았다.
“영식, 이것은 단지 지금의 수준에 불과합니다. 제가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드릴 것이니 슬픔을 거둬 주시지요.”
어머니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그는 그날 침실에서 몰래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그의 수준이 다른 귀족 자제들에 비해 떨어지는 것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기존의 가정교사들과 달랐다.
태도와 말투 그리고 말의 내용도 말이다.
“정말 공작 가문에 어울리지 않는 수준이군요. 공부하시는 것이 맞기는 하는가요?”
“공작님의 아들이라고 어디 가서 말하지 마세요. 그분도 창피해서 말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들은 란델리노의 수준에 대해 말하면서 비아냥도 같이했다.
반면에 새로운 가정교사들은 시험 결과에 따라서 그에 맞는 커리큘럼을 만들어 왔다.
“예법교육을 하기에 앞서서 먼저 고개를 들고 다니는 법, 어깨를 당당하게 펴는 법부터 배울 거예요. 예법을 완벽하게 숙지했다고 해도 움츠려 있다면 다른 귀족들은 깎아내리려고 할 테니까요.”
그에게 커리큘럼에 관해 설명했다.
란델리노가 이해하고 따라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알려주니까 의욕이 생겨서 더 열심히 할 수 있었다.
“처음보다 많이 나아지셨네요. 이대로만 하시면 금방 적응하시게 될 거예요.”
“영식께서는 책임감이 있고 집중력이 좋으시네요. 가르치는 보람이 있어요.”
그들은 란델리노가 잘한 것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부분은 다시 해볼까요? 천천히 해도 되니까 제가 가르쳤던 것을 떠올리면서 해보세요.”
“숙제는 한꺼번에 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작정 칭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고쳐야 할 것도 꼼꼼하게 알려줬다.
* * *
“역시 어머니가 선택한 분들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란델리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을 했다.
그에게 어머니는 가장 멋있고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정말 최고의 가정교사들을 데려왔다고 자부할 수 있다.
아들에게 인정을 받으니까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자신의 노력이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참으로 알 수가 없었다. 같은 칭찬을 받아도 왜 이 아이가 하는 칭찬이 더 기분이 좋은 것일까?
“사실을 말하는 것인걸요.”
그들은 누가 봐도 사이가 좋은 모자지간이었다.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따스한 분위기에서 모자가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이었다.
“조만간 네 또래의 귀족 자제들과 부인들을 초대할까 하는데 어떠니?”
“예?”
공작부인의 말에 란델리노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화사했던 안색은 중병에 걸린 사람처럼 좋지 않게 변했다.
칸나 백작 부인은 손님들을 초대하여 차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공작 가문의 후계자인 란델리노의 인간관계를 위해서’라는 명분이었다.
“공작 각하께서도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아무래도 돌아가신 공작부인이…….”
“그렇죠. 반역가문이라니. 제가 공작 각하였으면 이곳에 있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에요.”
어른들은 그의 혈통을 문제로 삼았으며 눈치를 줬다. 란델리노는 후계자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후계자임을 깨닫게 해주려는 듯이 말이다.
그런 어른들의 모습을 아이들은 눈치챘다.
“우리 엄마가 말했는데 너 쫓겨날 거라며!”
“공작 각하께서 새 부인을 들이고 그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너는 신전 같은 곳에서 평생 있어야 해”
“공작 가문에서 쫓겨날 아이인데 우리가 왜 너랑 놀아야 해?”
아이들에게 밀침을 당하고 맞았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상처가 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 어떤 어른도 란델리노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체는 없지만 그의 가슴에 크게 새겨진 흉터였다. 자신에게는 그 어떤 가치도 없음을 새삼 다시 느끼게 해줬으니까.
보호받을 가치도, 애정을 받을 가치도 없는 아이.
그것이 페루제 공작부인이 오기 전까지의 란델리노였다.
“란델리노? 무슨 생각을 그리하느냐?”
정신을 차린 그는 어머니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봤다.
그런 시간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지금처럼 어머니와의 시간만 누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