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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24화 (24/221)

024화 서신 하나만 잘 쓰면 일이 해결된다

‘대충 일이 끝났군. 얼른 저것들을 내 시야에서 벗어나게 해야겠어. 아름다운 것만 봐도 부족한 삶인데 저리 추한 것들을 계속 담을 수 없지.’

“죄를 짓기는 하셨지만 이렇게 일단락이 되었군요. 어서 원치 않은 손님들을 일으켜 드리고 집으로 모셔다 드리렴.”

페루제 공작부인은 불청객들을 죄인 취급했다.

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으로 치부함으로써 그들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게다가 그들이 불청객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면서 그들이 무례했음을 알렸다.

“그리고 제가 원칙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거든요.”

그녀들은 공작 가문의 세작 색출 조사를 방해한 죄인인 동시에 예의도 모르는 무뢰배가 되었다.

수치스러운 말이었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무서웠으니까.

“칸나 고모님 때문에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만 말이에요.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해요.”

그녀가 말을 하자 칸나 백작 부인을 제외한 부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 모두 죽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다음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

“물론입니다. 다음에는 절대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예요.”

“당연한 말씀입니다.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깊은 깨달음을 얻고 갑니다.”

온갖 비굴함을 다 보이고는 그녀들을 시녀들이 일으켜 세우고는 마차로 데리고 갔다.

칸나 백작 부인도 그들을 따라가려고 나섰는데 목소리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칸나 백작 부인”

고모님에서 호칭이 백작 부인으로 바뀌었다.

가르침을 줬음에도 아직도 예의를 모르다니 벨로나 공작 가문의 수준이 보였다.

가르칠 것이 산더미겠구나 싶었다.

뭐, 어쩌겠는가?

힘들고 귀찮아도 안주인의 도리를 다해야지.

“아랫사람이 감히 윗사람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나는 것입니까?”

훈계하며 꾸짖었다.

자식뻘 되는 여인에게 혼이 났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칸나 백작 부인에게 모멸감과 수치심을 줬다.

그렇지만 그녀는 항의를 단 한 번도 하지 못하고는 공작성을 빠져나왔다.

* * *

이 사건에 대한 소식은 금방 공작성을 뒤덮었다.

고용인들의 반응은 2가지였다.

칸나 백작부인의 패배가 너무 빠르다는 반응과 그 공작부인이라면 벌써 이겨먹고도 남았다는 반응으로 나뉘었다.

“그 칸나 백작부인이 쓰러져서 나갈 줄 누가 알았겠어.”

“아니야. 평소에 차갑고 감정도 없어 보이는 모습을 떠올려봐. 충분히 이기고 남지.”

“그래도 오랜 세월 이곳의 내정을 운영하셨던 분이잖아. 이렇게 쉽게 무너질 줄이야.”

“기사들로 기선제압을 하더만.”

“아무리 칸나 백작 부인이라도 공작부인처럼 고용인들을 고문하지는 않으니까.”

모두가 공작부인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시기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그녀는 보통 여인이 아니었으니까.

그 공작 각하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거나 말거나 그건 페루제 공작부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집무실에 돌아와서 우아하게 앉았다.

“후처리를 해야겠군. 우리가 처리해야 할 일이 뭐지?”

그녀가 질문하자 실리가 대답했다.

“죽은 여인에 대한 처결과 공작각하의 대응에 대한 대비이옵니다.”

죽은 여인이란 공작부인의 기사가 죽인 귀부인이었다.

그녀는 그 죽은 여인을 귀족 취급조차 하지 않았다.

죄인은 죄인이지 귀족이 아니지.

귀족은 고귀해야 하니까.

죄인이라는 더러움이 생긴 시점에서 그것은 더는 귀족이 아니다.

“별로 어렵지도 않군.”

죽은 여인의 가문에서 항의를 하며 공격할 것이 뻔했고 공작이 분노할 것이 뻔했으나 공작부인은 고민하는 기색이 없었다.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어렵게 생각하는 작자들이 어리석은 것이다.

금방 처리될 문제였기에 산뜻한 기분이다.

“그 여인의 가문에 서신을 보내야겠어.”

“어떤 내용으로 말입니까?”

공작가문의 부단장이 물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자칫 이를 막지 못한 책임을 물어 쫓겨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의연했다.

그녀가 해결할 자신감이 있었기에 이번 일을 벌였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세작을 공작성에 잠입시키려고 했으며 그에 대해 조사를 받으러 오라. 어떤가?”

그런 의혹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그 가문에는 불명예인데다가 자칫하면 귀족 사회에서 외톨이가 될 수 있었다.

“이 일이 알려지게 되면 다들 괜히 엮일까봐 그 가문과 멀어지려고 하겠죠.”

공작 가문 뒤에서 수작질을 한 가문과 친하게 지냈다가는 오해를 하기 딱 좋았으니까.

귀족 사회에서 ‘고립’이란 몰락으로 가는 길 중 하나였다.

귀족의 인맥이란 사람 대 사람이 아니라, 곧 가문 간의 교류였다.

그 교류는 정치, 무역 등 여러 분야로 이어졌다.

“너무 좋군요. 그렇게 된다면 도리어 그들에게 책임을 묻고 보상을 받을 수 있겠어요.”

부단장은 입이 찢어지게 웃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으며 맞장구쳤다.

잘 무마시키는 것을 넘어서 상대 가문을 옭아맬 수단으로 쓸 줄은 예상치 못했다.

여기서 누군가는 생각할 수 있다.

그곳에 있던 다른 부인들이 진실을 말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아쉽게도 그것은 어려웠다.

“아무리 예의도 없고 생각도 없어도 이 일의 진실을 말하면 큰일이 난다는 것은 알겠지.”

사람들은 진실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진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다.

공작부인이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한들 사람들에게 중요할까?

아니다.

‘연루된 사건’을 언급하고 관심을 받을수록 불리한 것은 부인들이다.

그 사건을 빌미로 상대를 끌어내리고 가문의 명예를 흠을 내려고 난리를 칠 것이 뻔했다.

소문에 따르면 빚이 많은 집안 출신의 공작부인이, 한미한 집안의 공작부인이다.

이 사건으로 강단이 있는 공작부인으로 인식이 되겠지만 중요인물은 아니다.

사교계에서는 공작부인이 아닌 칸나 백작부인의 측근들을 더 주시하고 공격할 것이다.

북부 사교계의 중심인 그들을 떨어뜨리고 오르기를 원하는 야심가들은 어디에나 있다.

사교계의 영향력이 준다는 것은 가문의 영향력도 준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가문의 안주인들이 사교활동에 열을 내는 이유 중 하나다.

“그 세작은 누구로 하실 요량이십니까?”

“같이 온 마부가 딱이지. 그가 아주 적극적으로 공작성에 들어오려고 했다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졌다.

그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믿을 만했다.

칸나 백작부인만 믿고 멋대로 굴던 마부는 세작으로 죽게 될 것이다.

“이번에 죽은 부인이 칸나 백작부인의 사람임을 모르는 북부 귀족들은 없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실리가 말했다.

“그렇지. 이번 일로 그녀를 따르는 무리는 칸나 백작부인이 자기 사람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고 생각할 거야.”

믿음을 주지 못하는 리더는 결국 힘을 잃게 된다.

불신은 분열을 가져오고 분열은 그녀의 영향력을 깎아내릴 것이다.

“누구나 자기 수준과 위치를 알아야 오래 살 수 있지.”

자기 위치도 모르고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있던 이들은 언제나 적을 만들었다.

그런 이들이 서서히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웠다.

“새로운 공작부인이 칸나 백작부인보다 훨씬 세다는 것을 깨닫게 되겠죠.”

실리가 말했다.

이 일은 칸나 백작부인이 믿음을 잃게 되는 계기가 아니라, 자신의 주인이 더 강함을 증명하게 되는 계기였음이다.

“그녀에 대한 처리는 그리하게.”

“알겠습니다.”

귀부인의 죽음은 참으로 쉽게 끝났다.

누군가는 허무하다고 말할 것이다.

“귀부인에 대한 건은 저희 선에서 처리 가능하지만 칸나 백작부인의 일은 다릅니다.”

그것은 공작부인의 사람들 모두가 하는 공통된 생각이었다.

고모를 어머니처럼 생각하는 공작이 이 일에 대해 알게 된다면 그냥 있지 않을 것이다.

상대가 공작이라서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 처리하기 쉬운 문제다.

“칸나 백작부인이 이 일에 대한 서찰을 보내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지?”

“네. 빠르면 가문에 도착하자마자 써서 보낼 것이고 충격에 쓰러진다고 해도 내일에는 보낼 것입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눈을 떴다.

그리고는 빠르게 종이에 글을 써내려갔다.

멈칫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쉬운 문제지만 미루면 미룰수록 어려워지는 문제였다.

“지금 이 서찰을 공작께 보내라. 가장 빠른 자가 가야 할 거야.”

“당장 명을 이행하도록 시키겠습니다.”

“좋아. 이제 이 일에 대해서는 해결이 된 거군. 서류 가져오게. 그들 때문에 지체되어서 못 한 업무를 해야지.”

모두가 그 서찰의 내용을 궁금해 했지만 아무도 물어보지 못했다.

그녀의 분위기를 보아 하니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또한, 그녀가 해결했다고 말하면 해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페루제가 침묵한 것은 사실, 내용을 알면 모두가 경악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쉬운 문제일수록 빨리 처리를 해야지. 괜히 돌아가려고 하면 일이 꼬이는 법이야.”

칸나 백작부인과 있었던 일에 대해 상세하게 썼다.

최대한 공작이 알게 되는 때를 늦추고 방도를 찾아야 하는데 도리어 알려서 공작의 분노를 앞당긴 꼴이었다.

“이제 해결했으니 본래 하던 일을 하지.”

그럼에도 그녀는 해결했다고 말했다.

어찌하여 그러한 것일까?

* * *

그 일에 대해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진실이었다.

‘그 일’ 자체는 진실이었다.

단지 그 사실 중에 몇 가지만 빼거나 바꾼 것뿐이다.

그녀가 찾아낸 세작은 가문 내의 일을 밖에서 말한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가문 내의 일과 흐름에 대한 것이었지 군사적 기밀이라든가 하는 것은 없었다.

물론 가문 내의 일도 흐름도 중요했다.

하지만 기밀까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편지에는 가문 내의 온갖 정보를 빼낸 무리를 찾았다고만 썼다.

누구라도 오해할 만한 내용이었다.

칸나 백작부인을 위협하고 귀부인 한 명을 죽인 일도 솔직하게 썼다.

미묘한 거짓들을 넣어서 말이다.

공작성을 방문한 것에 대해서는 죽은 귀부인이 세작을 잠입시키기 위해서 칸나 백작부인을 이용한 것으로 탈바꿈되었다.

부인들에게 칼을 겨눈 것은 세작인 마부가 수상함을 보인 끝에 자신의 신분이 들키자 두려움에 부인 중 배후가 있음을 밝혔기 때문으로 바뀌었다.

마부는 큰돈을 받고 일을 받아들인 것으로 거짓을 꾸몄다.

그리고 마부도 정확하게는 몰랐지만 공작성을 방문한 부인들 중에 배후가 분명히 있음을 알렸다고만 적었다.

그 서찰 내용 중 일부는 아래와 같다.

[고모님을 따로 모시고 상황을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럴 틈이 없었습니다. 정체모를 배후가 자칫 허튼 수작을 부릴 수 있었습니다.

—중략…….—

게다가 고모님과 너무 가까이 있어서 구출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부단장은 차라리 우리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유도함이 맞다고 판단을 내렸다고 하더군요.

저도 그 생각이 맞다고 여겼습니다.

칼로 위협을 하기는 했지만 나중에 이해해주실 거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눈치를 챘는지 그녀가 고모님을 해하려고 했고 어쩔 수 없이 기사는 고모님 앞에서 그녀를 죽이게 되었습니다.

고모님께 진실을 말하려고 했으나 제가 자신의 벗을 죽였다는 사실에 분노하신 나머지 들어주지 않고는 저택으로 가버리셨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제 판단이 이런 일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중략―

고모님을 지키려고 했으나 그분이 받으실 마음의 상처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중략―

저에 대한 불신이 너무 커서 죄송스러운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전해지라 믿고 있습니다.

부디 이런 저를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누가 봐도 고모님을 지키려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조카며느리였다.

이 편지 내용만 본다면 남편의 고모님을 위한다고 오해할 것이다.

이 편지를 먼저 본 공작은 뒤에 칸나 백작부인의 서찰을 받아도 부인이 고모님을 위해 그리했을 것이라며, 이해해 달라는 내용으로 답장을 보낼 것이다.

무심한 공작은 분명히 그리한다.

그녀는 확신했다.

칸나 백작부인이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진실 같은 거짓’은 그 진실을 덮고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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