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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23화 (23/221)

023화 일이 터지면 책임질 사람이 있어야 한다

수비대장은 자신과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

“네 이놈들! 어찌 내가 전달한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것이냐!”

공작부인이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부하들에게 분노하며 체벌을 가했다.

그러면서 공작부인의 눈치를 봤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충분히 때린 것 같다고 여긴 수비대장은 그녀가 만족하고 부하들을 보내줄 거라 믿었다.

병사들도 그 폭행의 의미를 알기에 애절하게 소리치며 사과를 하고 과하게 아픈 척을 했다.

병사들은 공작부인이 적으로 인식하기에는 약하고 가치가 없었다.

“잘못했다고? 처음부터 잘못할 행동을 하지 말았어야지! 공작부인께서 진노하시게 만들어?!”

수비대장인 자신과는 달리 병사들에게는 자비심을 보일 만했다.

슬프게도 상황은 수비대장의 뜻대로 흐르지 않았다.

칸나 백작부인의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처럼…….

“그동안 이런 식으로 대충 넘어갔나 보지?”

주변의 공기가 차가워졌다.

그녀는 두들겨 맞은 병사들과 때린 수비대장을 훑었다.

정말 기분이 나빴다.

자신을 얼마나 만만히 봤으면 이러는 것일까?

“이딴 가당치 않은 짓거리를 내 앞에서 벌이다니 말이야.”

자기 죄에 대한 정당한 벌을 회피하려는 수작질을 벌였다.

바로 자신 앞에서!

“성서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도 화가 나는데 감히 내 앞에서 이래?”

신께서는 사람은 본디 죄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거늘!

이는 성서를 따르지 않는 행위이며 죄였다.

신실한 신자인 자신 앞에서 대놓고 성서를 부정하는 짓거리를 하다니 용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때리면 내가 충분히 벌을 줬다고 생각하고 넘어갈 줄 알았나?”

공작부인의 눈썹 하나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수비대장이라는 작자부터 공작부인을 기만하려고 하다니…….”

그녀는 말을 잇다가 잠시 멈추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자신이 이딴 짜증을 유발하는 모습을 보게 만든 원흉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죽이지 않기로 결정은 했지만 지금 심정으로는 그냥 죽이고 싶었다.

“백작 부인 따위가 내 위에 있으려고 하는 것도 이해가 되는군.”

칸나 백작 부인은 모멸감에 치를 떨었다.

공작의 고모를 ‘백작 부인 따위’로 격하시키며 쓰레기를 보듯이 바라봤으니까.

공작의 고모를 수비대장과 같은 수준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둘을 동시에 언급한 것이 이를 알려 줬다.

병사들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직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제가 잘못되면 그 아이들은 어찌한답니까!”

“저에게는 홀어머니가 있습니다. 저 이외에는 그분을 모실 사람이 없습니다.”

“그동안 있던 빚을 이제야 갚고 사람답게 살려고 하던 차입니다. 제발 사람답게 살 기회를 주세요!”

애원하는 모습에 동정심이라도 생길 듯싶었으나 공작부인은 무심했다.

고문당하러 끌려가는 고용인들에게도 느껴지지 않던 동정심이다.

그런 동정심이 갑자기 그들에게 생길 리가 없었다.

그냥 그런 사정이 있구나 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그들을 빤히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용서를 빌지 말렴. 왜 용서를 비니? 빈다고 그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닌데?”

병사들과 그녀의 말을 듣던 모든 사람이 당혹해했다.

라스타 왕국 출신들을 제외한 사람들은 공작부인이 자비를 베풀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자신이 저지른 죄에 맞는 책임을 져야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일을 잘 했으면 될 일이었다.

자기 책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서 벌을 받는 것이다.

왜 이번 일과 관계도 없는 가족을 끌어들이는가.

가족을 끌어들이든 끌어들이지 않든 간에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그들 자신 때문에 가족들의 인생이 불행해지는 것이지 ‘자신’ 때문이 아니다.

자신이 보기에는 구질구질한 모습이었다.

“아이를 핑계로, 홀어머니를 핑계로 벗어나려고 하지 말렴. 그들이 너희를 구해 주지 않으니까.”

냉정하고도 잔인한 말이었다.

그리고 공작부인은 그 냉정함의 명분을 설명해 줬다.

“내가 허락되지 않은 사람의 출입을 금한 것은 이유가 있단다.”

그 친절한 설명은 부인들도 들어야 하는 내용이었다.

“공작성의 사람 중에 내부 정보를 빼돌리는 세작들이 있거든.”

그녀는 높낮이 없이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상대에 대한 유감도, 분노도, 안타까움도 없었다.

“그들을 심문했는데 칸나 백작 부인을 포함한 여러 부인이 연루되어 있었어.”

자신은 그들과 감정적 교류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무슨 감정을 느끼겠느냐.

남에 불과한 존재들의 죽음은 마치 소설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물론 감정적 교류가 있어도 쓸모가 없으면 버려야 마땅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야!”

칸나 백작 부인이 목숨을 잃을 수 있음에도 소리쳤다.

물론 그녀는 성내의 자기 사람들에게 수많은 정보를 듣고 있었다.

내정 업무를 보니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칸나 백작 부인 그만하세요!”

“부인은 공작님이 계시니 안전할지 몰라도 저희는 아니라고요!”

그녀에게 아부를 떨던 몇 명의 부인들이 화를 냈다.

그녀들을 겨누고 있던 칼이 목에 닿았다.

“고모님, 제가 발언을 허락할 때까지 입을 다무세요.”

공작의 고모라는 타이틀은 여기서 쓸모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분노를 가슴에 삼켰다.

그 와중에도 페루제 공작부인은 병사들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물론 억울한 누명일 수 있지. 그렇지만 누가 누명이고 죄인인지 아직 확실하지 않아.”

차근차근하게 그녀가 설명했다.

이것은 그들이 벌을 받게 되는 이유를 이해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공작 가문에 출입을 시킨다는 것은 적에게 스스로 정보를 내주는 꼴이지.”

이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 병사들이 벌을 받는 것은 확정이었다.

“그래서 막은 것이다. 너희가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적이 누군지 확실해질 때까지 출입을 막았겠지.”

수비대장과 공작 가문 기사단의 부단장은 일이 생각 이상으로 커졌음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공작부인의 무감정에 가까웠던 표정이 점점 분노로 채워졌다.

공작부인은 살기를 담아 말했다.

라스타 왕국에서는 자신에게 이따위로 구는 무리가 없었기에 더 화가 났다.

“만약 저들 사이에 그 세작의 배후가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차라리 공작부인의 명령을 어긴 것으로 벌을 받는 것이 나았다.

그런데 단순한 벌로 끝날 수 없게 되었다.

세작을 잡아들이고 있으며 외부출입을 맞은 상태였다.

“너희가 한 짓은 스스로 적을 성안에 들인 것과 같다! 감히 공작성에 정체불명의 적을 말이야!”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설마 그들 중에 없을 거라는 말을 하면 책임이 회피될 줄 아느냐?”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몰라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던 것이 부질없어졌다.

“저들 중에 그 배후가 없더라도 너희의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병사들은 단순히 공작부인의 명을 어긴 것을 넘어서 공작 가문을 세작의 배후에 노출시킨 죄인이 되었다.

공작부인의 일갈에 사방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할 만큼 조용해졌다.

“알았느냐?”

공작부인이 웃으며 물어보자 병사들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력은 빠른 모양이네. 만족스럽군’.

“그래? 그러면 이제 죽어.”

그녀가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부인들에게로 향하자 비명이 들렸다.

“으악!”

공작부인의 기사단 부단장이 순식간에 칼을 뽑아 그들을 죽여 버렸다.

곧 다시 조용해졌다.

수비대장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신이 부하들에게 강하게 경고를 하고 업무를 원칙대로 하도록 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비극이었으니까.

“이것이 자신의 죄를 가볍게 생각한 이들의 결과다!”

별채에서 사람들이 고문당하는 것을 봤다. 무섭고 공작부인이 진짜 엄청난 사람이구나 싶었다.

수비대장이 그 모습에 작게 혼잣말을 했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구나. 내 탓에 부하들이 죽었어.”

동시에 설마 진짜로 수비대장인 자신을 고문하겠느냐는 생각을 했다.

안일했다.

그래서 명령만 내리고 확인하지 않았으니까.

그의 실책이었다.

시선조차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이 감히 공작 가문을 백작 가문보다 낮게 본 작자들의 말로다!”

공작부인의 명령을 무시하고 칸나 백작 부인을 입성시킨 것에 대한 대가는 컸다.

“이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외면한 것에 대한 대가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부인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기사들이 길을 터주자 공작부인은 그들 앞에 섰다.

“고모님, 고모님 때문에 이게 무슨 일입니까?”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칸나 백작 부인은 식은땀이 나며 손이 떨려왔다.

상대는 사람 죽이는 것을 쉽게 생각하는 여인이었다.

귀족 중에 그런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이렇게 드러내는 사람은 없었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을 처음 겪어 보는 백작 부인은 눈을 바닥에 대고 말했다.

“그러니까 왜 제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예의를 어기고 오셨어요? 고모님 때문에 사람들이 죽었잖아요.”

짜증이 좀 풀렸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허망한 죽음을 모두 공작의 고모 탓으로 몰았다.

너무 당당하여 마치 그것이 진실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그녀가 초대장 없이 오지만 않았어도 생기지 않았을 일이다.

“자꾸 이러시면 저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권위를 세울 수밖에 없어요.”

“쉬운 방법?”

“그건 고모님이 알 필요가 없어요. 아직은요.”

그녀는 다정하며 따스하게 말했다.

남들이 보면 자애로움을 가득 안고 있는 여인처럼 보일 것이다.

사람을 여럿 죽음으로 몬 여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이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동요하는 것이 웃긴 일이다.

자기 본분을 다했으면 뿌듯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고모님은 참 운이 좋네요. 대신 죽어 준 사람들이 있었잖아요.”

칸나 백작부인과 다른 부인들을 대신해서 죽어 준 사람들은 조금 전에 죽임을 당한 병사들이었다.

‘정말 운도 좋다니까. 원래도 칸나 백작 부인은 살려두려고 했지만 이렇게 살려줄 명분도 생겼잖아. 아니었으면 살려둘 이유를 생각해야 해서 귀찮았을 거야.’

“물론 여기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부인들도요.”

겸사겸사 다른 부인들도 처음에 죽은 부인을 빼고는 살아남았으니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귀부인들이 떨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눈이라도 마주쳤다가는 변심하여 자신을 죽일 것 같았다.

“책임을 질 사람이 있었으니 다행이지요. 그 책임질 사람마저 없었으면…….”

병사들이 죽지 않았다면 공작의 고모라고 할지라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을 내포하는 말이었다.

얼굴색이 하얗게 질린 것이 마치 희극에 나오는 광대 같아서 웃겼다.

백작 부인씩이나 된 사람이 흰색으로 얼굴을 분칠한 광대의 모습이라니!

화가가 있었으면 그림으로 남기라고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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