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화 눈앞에 칼날이 있으니 무섭다
모두가 벨로나 공작의 눈치를 보며 칸나 백작부인을 따랐다.
그녀의 당당함과 공작 각하를 믿고, 다른 부인들도 용기를 내어 소리쳤다.
“맞습니다. 어찌 이런 무도한 짓을 하십니까!”
“아무리 배우지 못했다고 이러는 것은 아니지요!”
“지금이라도 공작 각하께 용서를 받고 싶다면 멈추세요!”
아까는 살기에 놀라서 생각하지 못했지만, 칸나 백작 부인의 말이 맞았다.
그녀 뒤의 공작을 생각한다면 자신들을 죽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리하지 않았다.
겨우 공작에게 기대어서 소리치는 것이 전부인 것들이다.
지금 중요한 사실을 잊고 공작만 외쳐대는 꼴이라니!
비웃음을 참을까도 했지만 어려울 듯싶다.
“고모님.”
그녀가 비웃으며 말했다.
눈빛에는 당신은 세상에 둘도 없을 멍청이라는 뜻이 있었다.
칸나 백작 부인을 백작 부인으로 지칭하며 고모로 인정하지 않았던 여인이 고모라는 말을 담았다.
“뭔가 착각을 하시는군요. 그것이 고모님과 부인들이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요?”
“어?”
생각하지 못한 대답이 나왔다.
그 누구도 그런 말이 나올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공작께서 저에게 어찌 나오든 고모님과 저분들이 죽은 후일 텐데 뭘 그리 신경을 쓰세요.”
수도에 잘 먹고, 잘 자며, 잘 지내는 공작을 찾아댄다.
그가 무슨 신도 아니고 이 상황을 어찌 알고 도울 수 있을까?
지금 당장 도움을 줄 수 없는 공작을 믿는 것이 웃기는 희극처럼 보였다.
“?!”
모두가 경악했다.
지금 공작이 어떻게 나올지 생각하지 않고 그냥 죽이겠다는 뜻이니까.
“네년이 정녕 그리할 수 있겠느냐?!”
칸나 백작 부인은 그녀가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판단했다.
자기가 가진 것이 뭐가 있다고 그리한단 말인가!
설령 있다고 해도 세상 이렇게 대놓고 남편의 고모를 죽이려고 한단 말인가!
“고모님께서는 아직도 그리 생각하시는군요.”
페루제 공작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사람이 진실을 말하면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꼭 칸나 백작부인 같은 사람이 있어서 일을 벌이게 만든다.
사실을 말하면 사실대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왜 미련하게 구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죠. 고모님이 아니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일이라는 것만 알아두세요.”
상대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움직여야 하지 않는가.
귀찮게 말이다.
그녀가 부인 중에 누군가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기사의 칼이 그 누군가를 베어 버렸다.
운이 나빴던 부인은 싸늘한 시신이 되었다.
“꺅!”
“살려 주십시오!”
“다시는 이리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지금 자신들이 진짜로 죽임당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들은 깨달았다.
칸나 백작부인도 말이다.
이래서 멍청한 것들과 상종하기 싫은 것이다.
멍청해서 꼭 눈앞에 죽음이 다가와야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숙이고 애원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어찌 아무도 우리를 구하지 않느냐!”
많은 고용인과 병사, 기사가 있음에도 누구 하나 나서서 그들을 구하려 들지 않았다.
“공작께서 나를 어떻게 여기는지 모르고 이러는 것이냐!”
공작이 어머니처럼 따르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서 저것을 막지 못해!”
모두가 그녀들을 보던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만큼 짧은 기간에 성안을 장악했다는 의미였다.
피와 칼은 사람을 쉽게 지배할 수 있도록 했다.
“누구라도 나서서 막으란 말이야!”
누구나 자기 목숨은 귀했다.
그들은 공작이 뒤에 있는 칸나 백작부인보다 새로운 안주인이 더 두려웠다.
공작은 한 번도 고용인들을 고문하거나 죽이거나 하지 않았지만, 공작부인은 했으니까.
“어서!”
칸나 백작부인도 과한 체벌을 할지언정 그 사실이 드러나게는 하지 않았다.
반면에 그녀는 여유롭게 명령을 내린다.
“오늘 수상한 행적을 보인 인사들이 있다고 하더구나. 별채에서 몇 가지 물어보고 밖으로 보내. 대답을 거부하면 고문을 해.”
마치 산책을 하러 가겠다고 말하듯이.
“공작부인! 살려 주십시오!”
“오해이십니다!”
“제발 선처를 해 주세요!”
끌려가는 고용인들이 소리를 치며 애원했다.
동정심이 느껴질 정도로 불쌍하게 보였다.
그렇지만 자신에게는 살기 위한 가증스러운 연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쓸모가 없는데 왜 내가 너희를 봐줘야 하니? 그런 말은 쓸모가 있어야 할 수 있음을 명심하렴.”
고용인들은 그녀가 자신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음을 느꼈다.
그녀에게 그들은 도구였다.
“쓸모도 없고 수상하기만 한 너희를 거둬야 할 이유가 없잖니. 그러니까 별채에 가서 물어보는 것에 잘 대답하고 나가렴.”
쓸모가 없으면 언제든 버려도 되는 것이 그들이었다.
이런 이유를 제쳐 두더라도 그들이 나서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공작부인이 공작에게 질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수상한 짓을 너무 티 나게 하니까 너희의 무능함이 잘 드러나잖니. 적어도 수상한 짓을 숨기려는 노력은 해야지. 그럼 내가 쟤는 능력은 있구나 하고 고민은 해보지 않겠니?”
길지 않은 기간 동안 그녀에 대한 공포가 각인된 고용인들은 확신했다.
실제로 패배할 여인이 아니다.
칸나 백작부인은 싸늘한 분위기에 얼굴이 굳어 버렸다.
“고모님, 그렇게 소리쳐 봤자 소용이 없어요.”
자신이 장악한 내정은 그리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겨우 늙은 여우 한 마리에 흔들리는 기강이라면 다 죽이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나았다.
“제가 제 말을 듣지 않는 쓰레기를 여기에 뒀겠어요? 다 처리했죠.”
칸나 백작부인은 상황의 심각성이 피부로 느껴지는 듯했다.
공작부인의 말이 맞았다.
공작의 분노보다 그녀의 칼날이 더 먼저였다.
지금 이 순간 공작이 가진 힘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저는 가치가 없는 것은 물건이든 사람이든 곁에 두지 않아요.”
당장 앞에 죽음이 있었다.
그녀들은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기사가 하나를 더 죽이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다가왔다.
“공작부인, 여기서 더 나가시면 아니 됩니다.”
공작 가문 기사단의 부단장이었다.
그는 난감해하며 공작부인에게 말했다.
그녀들은 살아나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부단장을 바라봤다.
공작 가문에서 결코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여기서 그를 무시하는 발언을 한다면 그와 척을 지겠다는 그 이상의 의미가 된다.
그들은 당장 성을 나가면 이 일에 대해 항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살려 달라고 기었던 것이 조금 전임에도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자 이러고들 있었다.
그 얕은 마음이 표정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한편의 희극처럼 느껴졌다.
“왜 그래야 하지?”
희망은 밟아 줘야 제 맛이다.
그들을 놓아줄 생각이 없다.
부인들에게는 아쉬운 일이다.
“어차피 살려서 보내나 죽여서 보내나 각 가문에 항의를 받게 될 것은 자명한데 말이야.”
부단장은 난처했다.
그녀는 여기서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신이 그녀의 편이 되기로 했지만, 공작과 맞붙기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공작 가문의 부부싸움은 페루제 공작부인의 성정으로 미루어볼 때 피바람이 불 것이었으니까.
멈출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귀부인 하나를 죽이지도 않았을 것이긴 하다.
“결과가 같다면 후환거리를 없애는 편이 낫지.”
칸나 백작 부인을 비롯한 부인들이 아직 목숨을 위협받고 있음이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아닙니다. 절대로 항의 따위는 하지 않겠습니다!”
“저희의 잘못을 반성하며 자중하도록 하겠습니다!”
“제발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칸나 백작부인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줄 것처럼 굴던 사람들이 싹 다 그녀에게 빌고 있었다.
평소 백작부인을 등에 업고 나대던 모습과 비교하자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추했다.
처음부터 말을 잘 듣고 여기에 멋대로 오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페루제는 그런 생각을 하니까 확 열이 났다.
칸나 백작부인만 빼고 다 죽일까 잠시 고민했다.
그렇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사람이 ‘적당히’를 알아야 한다.
“살려서 보낸 후의 항의와 죽인 후의 항의의 강도가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것 정도는 감수할 만하지.”
페루제 공작부인은 굳건했다.
공작 가문의 부단장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는 페루제 공작부인의 편이 되면서 그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충분히 그들의 항의를 침묵으로 바꿀 힘이 있었다.
부단장은 뭔가 더 말을 하려고 했으나 멈췄다.
공작부인 뒤에서 실리가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더 말을 했다가는 큰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경고였다.
부단장이 포기하려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부인들을 출입시킨 병사들입니다.”
이 사단을 만드는 데 일조한 병사들이 그녀에게 왔다.
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찌 그대가 이들을 끌고 오는가?”
그녀가 말하는 ‘그대’는 ‘페루제 공작부인의 기사단 부단장’이었다.
“마침 부인께 보고할 일이 있었던 차에 그들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왔습니다.”
투구를 쓴 부단장은 정중하게 말했다.
“그런데 어찌 이들을 데려오라 명하신 것이옵니까?”
“저들이 내 앞에 있도록 했거든.”
그 대답으로 충분했다.
그녀의 부단장은 더는 그녀에게 뭔가를 물어보지 않았다.
병사들은 칼이 겨눠진 부인들을 보며 상황이 나쁘게 흘러가고 있음을 알았다.
그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가 그들 중 하나를 보며 물었다.
“왜 저들을 출입시켰지?”
“그, 그것이… 말이옵니다.”
그 병사는 우물쭈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떠올리지 못했다.
“설마 내 명령을 전달받지 못한 것이냐? 아니면 전달받았음에도 무시를 한 것이냐?”
그 질문에 수비대장의 얼굴이 하얗게 되었다.
만약 그들이 명령을 전달받지 못했다고 대답을 한다면 이 일의 원인은 수비대장인 자신이 되었다.
“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느냐?”
귀부인 하나가 죽어 버린 사건에 연루가 된다면 자신도 목숨 보전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명령 전달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불복종하겠다는 의사를 비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공작부인이 ‘그런 불온한 자’를 가만 놔둘 리 없었다.
하찮은 작자라면 넘어갈지 몰라도 수비대장은 나름대로 힘이 있고 중요한 자리였다.
성을 지키는 일을 맡고 있었으니까.
문만 지키는 병사들은 잘 몰랐을 것이다.
소문이 들려도 과장된 것이라고 넘어갔을 것이 뻔했다.
반면에 그녀의 부름을 받고 별채로 갔던 그는 잘 알았다.
고문당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공작부인이 말했으니까.
* * *
“으으아아아아!”
“불순한 무리이네. 윗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오만방자한 것들이지. 그동안 공작께서 어찌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이제까지처럼 대충대충 넘어가면 큰일이 날 것이야.”
“물론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별채의 고용인들처럼 되고 싶지 않으면 납작 엎드리라고 부른 것이었으니까.
그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숨기지 않았다.
회상하느라 대답하지 않는 공작성의 수비대장을 날카롭게 바라보며 말했다.
“설마 불온한 자들과 동료냐?”
그는 자칫하면 별채로 끌려갈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그런 불손한 자들과 함께하겠습니까! 오해를 거둬 주십시오.”
그리고 선수를 쳤다.
그들이 거짓을 고하기 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