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화 공작만 믿다가 큰 코 다친다
칸나 백작부인은 자신을 따르는 몇 명의 부인들과 공작성에 방문하기로 했다.
“역시 칸나 백작부인의 혜안은 남다르세요.”
“맞아요. 공작부인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진작 가 봤어야 했어요.”
그녀를 따르는 무리의 아부를 받으면서 말이다.
공작부인이 없던 때에 그녀는 내정 업무를 보느라 자유롭게 공작성을 왔다 갔다 했다.
“내정은 안주인의 역할이라 이건가?”
이제는 달랐다.
본디 내정 업무는 그 가문 안주인의 책임이자 권리였다.
그 책임에는 집안에 초대할 사람을 정하는 것도 있었다.
지금 그녀는 그런 안주인의 권리를 무시하는 행동을 하려는 것이었다.
“감히 나를 무시하고 멋대로 한다 이거지? 가만 놔두면 큰일 나지.”
얼마나 페루제 공작부인을 하찮게 생각하는지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이 당도했다.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분이 누군지 모르는가?”
마부는 황당해했다.
그동안 아무 검문도 없이 잘만 왔던 공작성이었다.
오늘처럼 마차를 막고 출입을 불허한 것은 처음이었다.
“칸나 백작부인이시네. 공작 각하께서 가장 아끼고 존경하시는 분. 이 일을 각하께서 아시면 어찌 나오실 것 같은가?”
마부는 자신이 모욕을 당한 것처럼 분노했다.
“각하의 고모님을 이리 대우하면 어떤 일이 생길지 아느냐 말이야.”
칸나 부인이 자유롭게 출입을 한 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에게도 그것이 ‘당연한 권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난감해했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들어가십시오.”
그들은 나중에 일어날 참사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 * *
“뭐? 누가 들어왔다고?”
공작부인은 시녀가 전하는 소식에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 이 성안에서 자신의 명령을 어긴 놈들이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자신의 권위가 떨어지는 일이었다.
자신의 명령에 복종을 하지 않는 부하를 둔 장수는 비웃음거리가 된다.
이것도 그것과 같았다.
“칸나 백작 부인을 포함한 여러 부인이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인가? 나는 그들의 출입을 허락한 적이 없는데?”
소파에서 눈을 감고 누워 있던 그녀는 일어났다.
차가운 시선과 말투에 소식을 전한 시녀는 자신이 칼에 살이 베여 죽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손이 떨리는 것을 애써 참았다.
감히 공작부인의 권위를 훼손시킨 것들이다.
벌을 내리지는 못하고 응접실에 앉아 있다니!
자신의 명령보다, 자신의 권위보다 상대를 높게 생각하는 것과 같았다!
“너희는 그것을 가만히 두었느냐?”
실리는 공작부인의 말투에 고용인들을 다시 한번 교육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교육은 각오해도 혹독할 것이다.
쉬고 계신 분을 감히 일어나게 만든 일은 용서받아서는 아니 되었다.
주인의 휴식을 방해받는 것은 주인이 바란 것이 아니었으니까.
실리의 입장에서 이것은 자신이 제대로 아랫사람을 다스리지 못해서 생긴 일이었다.
“실리, 너를 시녀장으로 세운 것은 너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찌 네가 나를 실망하게 하느냐?”
그 생각은 공작부인도 같았다.
실리도 그 시녀처럼 차갑게 쏘아보았다.
남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공작 가문의 사람들이 공작부인보다 백작 부인의 말을 들었다고 하지 않겠는가!
공작부인이 얼마나 내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 이런 일이 생기냐고 하지 않겠는가!
백작 부인에게 밀렸다고 조롱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
모욕적이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가문의 어른을 쉽게 들여보냈다고 사람들이 권위까지 운운하며 뭐라고 하진 않겠건만 과할 정도로 진노했다.
“죄송합니다. 얼른 이 일을 해결하고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시녀장은 당장 고용인들을 불러 불청객들을 성 밖으로 끌어내는 것으로 이 일을 처리하려고 했다.
실리는 이가 갈리는 것을 참았다.
그녀가 가면을 써서 다행이었다.
만약 시녀가 그녀의 표정을 봤다면 오늘 죽기 직전까지 가겠다고 절망했을 것이다.
“아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다. 나를 기다린다고 하는데 가 줘야지.”
“죄송합니다.”
실리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주인에게 실망감을 줬다는 것은 그녀에게 수치였다.
공작부인은 그녀에게 신과 같았고 그 신의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를 한 것과 같았다.
“내 믿음을 깨버리지 말아다오.”
“알겠습니다.”
시녀장은 주먹을 힘껏 쥐었다.
눈빛에서 살기가 나왔다.
순간 고개를 들다가 눈이 마주친 시녀는 기겁하며 얼른 바닥으로 시선을 옮겼다.
공작부인은 당당하게 응접실로 향했다.
이 망신스러운 일을 만회해야 했다.
자신과 가문의 격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가자. 이 짜증스러운 일을 정리해야지.”
소파에서 잠들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갈한 모습이었다.
실리가 그 뒤를 따랐다.
“열어라.”
페루제 공작부인은 불청객들이 있는 방에 들어왔다.
짜증이 난 와중에도 시녀에게 문을 열게 하는 우아함을 잊지 않았다.
칸나 백작 부인을 비롯한 여러 명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그녀는 눈처럼 하얀 피부에 핏빛처럼 붉은 입술의 미인이었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이를 돋보이게 해줬다.
그녀는 완벽하다 못해 질리게 할 만큼의 자세로 인사를 하고는 말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이렇게 오실 줄은 몰랐어요.”
말투는 예의가 있었으나 태도는 오만했다.
그것은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자연스러운 하대는 그녀가 그들을 어떻게 여기는지 드러냈다.
칸나 백작 부인은 얼굴이 굳었다.
누구 덕분에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는 아둔한 사람에게는 가르침이 필요했다.
누가 위에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대가 예의를 잊은 듯하여 이렇게 왔네.”
다른 사람이었다면 바로 고개를 숙였겠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백작 부인보다 공작부인이 높은 것은 당연하다.
응당 칸나 백작 부인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해야 마땅했다.
“예의요? 어떤 것을 말하는 건가요?”
“가문과 관련된 여러 부인을 초대하는 것은 안주인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
저런 욕심만 많은 노부인에게 고개 숙여야 했다면 이 타국까지 오지 않았다.
“자네는 나태하고 아둔하여 그 책무를 하지 않는 듯하여 이리 왔네.”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기개에도 그녀는 흔들림이 없었다.
저딴 노부인의 훈수 따위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초대장도 없이 멋대로 오는 것이 공작 가문의 예의는 아니지요?”
그 서슬 퍼런 눈빛에 칸나 백작 부인을 따라온 부인 중 몇은 팔을 쓸어내렸다.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삶에 대한 본능이었다.
고개를 조아리며 죄송하다고 경솔했다고 외쳐도 부족할 판국에 도리어 그녀를 탓했다.
“뭐? 감히 나에게 너 따위가 그딴 말을 해?!”
칸나 백작 부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빚만 많고 역사도 없는 천박한 가문 출신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칸나 부인에게는 이것은 천민이 그녀를 모욕한 것과 동일했다.
“내가 아니었으면 네가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었겠어!”
“그건 맞지요.”
분노하며 소리친 것에 비해 허무한 대답이었다.
그녀는 한결같이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너무 열을 받으니까 머리가 차분해진 기분이 들었다.
지금 분노를 표출해야 할 사람이 누군데 저따위로 구는지 모를 일이다.
알아도 몰라도 그 대가를 치르게 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러면 무례하셨지만, 격에 맞는 대우를 해야겠네요. 따라오시지요.”
그들은 이제야 페루제 공작부인이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다.
‘격에 맞는 대우’가 그들이 생각하는 가문 내의 위치, 계급 등이 아님을 깨닫지 못했다.
* * *
그들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어딘가를 향해서 걸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정원이나 다른 좋은 곳에 데려갈 줄 알았다.
“도대체 어디를 가는 것이냐?!”
칸나 백작 부인은 짜증을 냈다.
여기까지 와서 저런 것에게 한마디 들을 것으로 이미 인내심이 바닥이었다.
“조금만 기다리시죠. 아주 좋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해드릴 테니까요.”
그녀는 품위가 있는 말투를 유지했다.
마치 감정이 없어 보이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공작부인을 자기 아랫사람으로 두고 무시하는 태도임에도 전혀 아무렇지 않아했다.
기가 죽었거나 우울해하거나 하는 부정적인 감정이 없어 보였다.
“거기서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저도 어쩔 수 없고요.”
정말 자신을 화나게 만든 대가를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장소로 가고 있다.
좋은 깨달음도 얻게 될 것이다.
거기서도 깨닫는 것이 없다면 살아서는 쓸모가 없다는 뜻이니 모두 죽여야겠지.
칸나 백작 부인은 그동안 권력을 휘둘렀던 것에 적응이 되어 눈치채지 못했지만, 일부의 부인들은 알아챘다.
“제발 좋은 깨달음을 얻었으면 좋겠어요.”
“자꾸 깨달음, 깨달음 거리는데 어디서 어른을 가르치려드는 것이냐!”
칸나 백작 부인 곁에서 눈치를 보며 붙어 있던 경험이 준 눈치 덕분이었다.
새로운 공작 가문의 안주인이 보통 이상이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그 이상이었지만 일단 넘어가도록 한다.
가까운 시일에 깨닫게 될 것이었다.
“이제 곧 아시게 될 거예요.”
그녀가 온 곳은 바로 그들이 마차를 타고 들어온 문이었다.
그녀들이 타고 온 마차를 이끈 마부도 그곳에 있었다.
마부는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몰랐다.
다른 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공작부인께 인사드리옵니다. 어찌 이런 곳까지 행차하셨습니까?”
성내의 수비를 담당하는 수비대장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부대장도 함께였다.
“이 귀부인들을 들여보낸 병사들을 데려오게나.”
“알겠습니다.”
수비대장은 부하를 시켜서 그들을 데려오도록 명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칸나 백작 부인은 생각하지 못한 전개에 당황하며 소리쳤다.
무슨 짓거리를 하려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자신들에게 좋은 일은 아님을 눈치챈 것이다.
“내 오늘의 굴욕은 잊지 않을 거야! 공작께도 말할 것이니 그리 알게!”
그녀가 몸을 돌려 부인들과 가려고 할 때였다.
“제가 허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뭐?”
“제가 허락을 하지 않았다고요.”
페루제 공작부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한기가 느껴지게 했다.
“내가 가겠다는데 너 따위가 뭐라고 막아!”
칸나 백작 부인은 그대로 가려고 했다.
“꺅!”
부인들을 향해 있는 검만 없었다면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너 따위가 뭐냐고요? 백작 부인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공작부인이지요.”
공작부인이 부인들을 하나하나 바라보고는 칸나 백작부인과 눈을 마주쳤다.
그들을 보자마자 하길 원했던 말을 쏟아냈다.
“공작부인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멋대로 백작부인이 일어나려고 하다니요.”
그녀는 아까와 다른 사람인 양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마주하자마자 칼로 베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문의 기강이 얼마나 해이해졌는지 알 것 같군요.”
‘공작부인의 기사들’이 언제라도 그녀들을 죽일 듯이 살기를 뿜어냈다.
일개 평범한 귀족 부인들이 견딜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 살기는 진짜로 죽이겠다는 의미가 있었으니까.
한 명은 소변을 지렸고 다른 한 명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이런 짓을 하고도 네가 괜찮을 줄 아느냐! 공작께서 너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칸나 백작 부인은 자신을 따르고 아끼는 조카를 무기로 그녀에게 소리를 질렀다.
벨로나 공작은 그녀를 지켜주는 방패이자 무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