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화 한순간의 판단이 인생을 좌우한다
란델리노는 꿈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설마 이곳이 꿈속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어머니라고 불러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그에게는 확신이 필요했다.
그것은 공식적으로 어머니라고 말해도 된다는 확언이었다.
“세상 어디에 어머니를 공작부인이라 부르는 자식이 있단 말이냐?”
그녀는 란델리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봤다.
아까 말했는데 왜 다시 물어보는지 알기 어려웠다.
아이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 물어본 것이겠지만 그녀는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 자기 손바닥 위에서 모든 것을 두고 좌지우지하며 살아온 인생이지 않은가.
“앞으로 당연한 것은 물어보지 말아라.”
그러고는 잠시 뭔가를 고민하는 듯싶더니 실리에게 말을 걸었다.
“유모라는 것이 자기 책무도 제대로 못 하는구나.”
공작 가문의 후계자가 입기에는 좋지 않은 품질의 옷들을 보고 눈을 찌푸렸다.
8살이란 나이에 비해 작은 몸도 한몫했을지 모른다.
“내 아들을 이리 방치하다니 당장 새로운 유모를 구하거라.”
귀족 가문의 유모란 그 가문 자제가 일정 나이가 되기 전까지 모든 것을 케어해 주는 사람이었다.
식사부터 놀이까지 세세했다.
즉, 밖의 나들이에도 함께 있어야 맞았다는 것이다.
물론 아이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아이도 사람이니까.
그러나 그 혼자만의 시간이 너무 길었다.
그 긴 시간은 그가 제대로 귀족적인 교육을 받지 않고 있음을 알게 해줬다.
이렇게 그녀만 따라다니는 행동을 놔두고 있다는 것부터 문제가 있었다.
감히 귀족 가문의 아이를 방치하고 홀대했음이다.
자신이 안주인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여 기분이 나빴다.
기강이 바로잡혔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더 엄하게 다스리리라.
“그래도 그동안 이곳에 일한 시간이 있으니 별채에서 몇 가지만 물어보고 보내거라.”
고문을 하고 원하는 답을 얻어 낸 후 내보내라는 말을 기품 있게 했다.
가치도 없는 유모 하나가 사라진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 * *
명령을 내리고 집무실로 돌아왔다.
이제 다시 쌓여 있는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실리가 말을 걸었다.
“진심이신 것입니까?”
이것은 본래의 계획과 달랐다.
힘없고 방치된 어린 의붓아들에게 적당한 관심만 주는 것으로 끝내려고 했다.
물론 가문에 적응을 완전히 한 후에 말이다.
“무엇이 진심이라는 것이냐? 알기 쉽게 말하렴. 너답지 않구나.”
그 작은 관심만으로 그는 공작부인을 세상 그 누구보다 믿고 따르며 의지할 것이었다.
거기다가 교육도 기본적인 것만 시키고 방치를 할 요량이었다.
나중에 가문의 주인으로 해야 할 일을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공작이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영식께서는 이대로가 좋지 않겠습니까?”
의지할 사람은 페루제 공작 부인뿐이니 그녀에게 다 맡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몇 년만 꾸준히 거짓 애정을 주고 공작만 처리하면 손쉽게 공작 가문이 손에 들어온다.
내정은 장악하기 쉬웠으니까 넘어간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이뤄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공작이 소드마스터다.
검의 극에 도달했다는 존재인 소드마스터.
그를 죽이기는 쉽지 않았고 실패했을 때의 부담도 컸다.
그것을 가능하게 할 비장의 수가 있었다.
그것은 란델리노일 수도 있고 다른 수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공작을 잡고 난 후에 미래의 예비 공작만 잡으면 공작 가문은 페루제의 것이 된다.
그런데 그녀는 편하고 쉬운 길을 포기한 것이었다.
“훗날을 도모하기에도 그것이 더 좋고요.”
그녀가 그를 아들로 인정했고 제대로 양육을 하겠다고 결정했다.
란델리노는 공작이 가져야 할 지식들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훗날 란델리노가 공작이 되었을 때 그녀가 가진 권력을 자신이 가져오려고 한다면?
권력을 온전히 다 차지하기를 원한다면?
그를 이룰 능력과 힘이 있다면?
그녀는 지금 스스로 미래의 적을 만들고 그 적에게 무기를 쥐여 주고 있는 꼴이었다.
“당연히 좋지 않지. 내 아들이라면 그에 맞는 격식과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함이야.”
그것은 란델리노를 제대로 키워 보겠다는 그녀의 뜻을 천명한 것이었다.
실리는 그녀의 말투에서 느꼈다.
더는 물어볼 수 없음이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여기서 더 물어보려 한다면 주인의 심기가 불편해질 것이었다.
그녀는 바로 태세 전환을 했다.
“괜찮다. 요즘 바빴으니까. 피곤하면 생각을 깊게 하기 어렵거든.”
실리의 반응을 예상하고 일부러 그리 말했다.
실리가 물어도 답을 해줄 수가 없어서 말이다.
자신조차 모르는 답을 어찌 대답할 수 있겠는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이고, 누구도 알려 주지 않은 마음이었다.
“너도 이만 가서 너의 일을 보거라. 나는 나의 일을 볼 것이니.”
그녀가 무엇이 마음에 들어서 란델리노에게 호의를 가지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당사자인 란델리노도 그러했다.
자신조차 모르는 것을 타인이 알 리가 없었다.
그것은 그가 성인이 될 때에도 죽기 전에도 깨닫지 못할 진실이다.
* * *
실리는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와서 혼잣말을 했다.
그녀의 모습은 떨떠름해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는 일이야. 어찌하여 그런 무가치한 아이를 받아들이신 거지?”
그녀는 페루제 공작부인이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를 수 있었다.
그 어떤 변덕스러운 일도, 그 어떤 잔혹한 일도, 그 어떤 은밀한 일도 불만 없이 할 것이다.
이번 일도 의붓아들을 제대로 키우겠다고 급작스럽게 결정했지만 괜찮았다.
“그분께서 하시는 깊은 뜻을 하찮은 내가 알기란 어렵겠지만 그래도 이건 아닌데 말이지.”
그 아이가 자신의 주인과 격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녀가 보기에 영식은 그녀의 아들로 인정받기에는 그 자질이 부족했다.
실리에게 페루제 공작부인은 구원자이자 신이었다.
“페루제님께서 그런 선택을 하실 줄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어.”
그녀는 완벽했다.
우아함, 지혜로움, 잔혹함 모든 것을 겸비했다.
그런 그녀가 인정한 아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스스로 무언가를 배우려고 할 만큼 의욕적이지 않았다.
“수많은 아이 중에 왜 그런 아이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새로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마주할 용기도 없었다.
귀족으로의 자부심도 없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공작부인을 따라올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 아이였다.
“완벽하고 무결한 분이 자신을 스스로 흠집 내시다니!”
실리가 보기에 공작 가문의 후계자는 공작부인에게 흠이었다.
공작부인의 유일한 실패였다.
“만약 주인님의 치부가 된다면 내가 처리를 해야겠지.”
아직 8살에 불과한 아이에게 많은 것을 원하고 있었다.
“설령 내가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하더라고 말이야.”
실리는 아무리 아이라고 해도 주인의 아이라면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 * *
요즘 북부의 사교계에서 부인들이 만나면 하는 말이 있다.
“공작부인은 아직도 아무도 초대를 하지 않았죠?”
“그렇다니까요. 받았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가문의 새로운 안주인이 여성인 친척들, 남성인 친척들의 부인 혹은 가신들의 부인을 초대하는 것은 당연시되던 관례였다.
“방계 가문의 부인들도, 가신 가문의 부인들도 하나도요?”
“그렇다니까요. 외부인이야 그렇다고 쳐도 가문과 관련된 사람들도 초대하지 않다니 이상한 여자네요.”
페루제 공작부인은 그 관례를 무시했다.
그녀가 공작령에 온 지 상당 기간이 지났음에도 초대장 하나 보내지 않았다.
본래 칸나 백작 부인을 포함한 대다수의 부인이 초대장을 받아도 무시하기로 합의가 되어 있었다.
많은 빚을 감당하지 못해서 지참금도 내지 못한 하찮은 여인이었으니까.
재물과 사람을 좀 데려왔다는 소식이 들리기는 했으나 그것도 빚을 져서 가져온 것이거나 과장된 것이 분명하다고 그들은 여겼다.
그런 여인이 자신들 위에서 오만하게 굴기 전에 그 기세를 꺾어 놓으려고 했다.
초대장 자체를 보내지 않는 상황에서 그 합의는 가치가 없었고 그 의도도 빛을 보지 못했다.
“빚만 잔뜩 있어서 배우지 못한 티가 나는구나!”
칸나 백작부인은 자신이 계획한 것이 실행조차 되지 않자 짜증이 났다.
맛있는 간식과 차가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안달이 난 부인들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어찌 기본적인 것도 하지 않을 수 있나요.”
“부인께서 자격이 되지 않는 여인에게 과분한 자리를 주셨잖아요. 정말 은혜도 모르는 여인이에요!”
“예의라고는 하나도 배우지 못했나 봐요.”
힘이 없는 새로운 안주인보다 공작 각하의 신뢰를 얻고, 오랜 세월 내정을 운영하던 백작부인에게 줄을 대는 것은 그들에게는 당연했다.
약자는 강자의 편에 서야 편히 사는 법이다.
그리고 칸나 백작 부인은 그녀들보다 강자였다.
“아무래도 아니 되겠어. 가문의 어른으로서 가르침을 줘야지. 이런 식이면 어디 창피해서 벨로나 공작 가문의 안주인이라고 소개도 못 해.”
칸나 백작 부인은 집사에게 여러 번 서찰을 보냈다.
공작부인이 초대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였다.
“역시 부인이세요. 어쩜 이렇게 자애로우실까요? 세상에 부인 같이 조카의 부인을 신경 써주는 고모가 어디에 있어요.”
집사는 공작령에 적응하느라 지금 초대하기에는 이르다는 답변만 반복했다.
“집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니까 마치 앵무새 같다니까요.”
그 안이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전염병이 끝났다고 하면서도 ‘공작부인의 적응’ 따위를 이유로 출입을 통제를 하니까 부인들의 불만은 커졌다.
“정말 그래요. 전염병도 끝난 지 얼마나 지났는데 아직도 초대장을 보내지 않은 무개념이라니요. 부인께서 혼을 내셔야 해요.”
“혼이라니요. 엄연히 우리 윗사람이에요.”
칸나 백작 부인이 혼을 내는 듯한 말을 했지만, 말투는 부드러웠다.
‘혼을 낸다.’라는 표현이 만족스러웠다.
공작부인보다 위에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어른으로서 공작부인께 가르침을 주세요.”
그동안 살아가면서 쌓인 직감이 뭔가 이상함을 경고했지만, 그녀는 무시했다.
고용인 100 중에 90은 자신의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그녀에게 내부에 어떤 변화가 있음을 알리지 않았다.
손님들에게 형식적인 양해를 구하고 잠시 자리를 뜬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 터졌으면 연락을 줬겠지.”
칸나 백작부인은 몰랐다.
“그동안 그래왔으니까.”
그 90에 속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별채에서 고문을 당했음을 말이다.
상당수의 사람이 죽고 많은 사람이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음도 알지 못했다.
남은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서로 이야기조차 못 나누는 사태임도 파악하지 못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입성한 첫날, 그날의 사건을 그녀에게 알리기 위해 나섰던 고용인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그러면 날을 잡아서 공작령으로 가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