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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9화 (19/221)

019화 아이가 나에게 먼저 다가왔다

실리는 단단히 고용인들을 갈궜다.

그 수위가 어느 정도냐면 고용인들이 그녀에게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다.

집사는 그녀의 과한 행동을 묵인했다.

그뿐만 아니라 친인척들과 유독 가까웠던 고용인들에 대해 간접적으로 알려 주기까지 했다.

“억울합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그 누구도 예외는 없다! 당장 끌고 가!”

“누가 뭐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거짓입니다!”

“그것은 별채에서 밝혀질 일이다!”

기사단 부단장은 집사와 시녀장이 알려 준 공작 가문의 세작들을 잡아다가 처리하는 데 앞장섰다.

그가 공작의 기사인지 공작부인의 기사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적극적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은 내부의 세작 색출과 관련된 서류를 읽으며 말했다.

“이래서 집안에 여인이 잘 들어와야 한다는 말이 있는 것이지. 그렇지? 실리.”

“네, 맞습니다. 부인께서 여기에 오신 것이야말로 벨로나 가문의 가장 큰 복이지요.”

집사도 그렇고 부단장도 그렇고 말을 잘 들으니까 집안이 잘 돌아가기 시작한 듯싶다.

이래서 가문의 안주인이 중요한 법이다.

자신이 안주인으로 왔을 뿐인데 예전의 나태하고 해이한 모습은 사라졌으니까.

최대한 빨리 칸나 백작부인이 망가뜨린 가문을 고쳐놔야지.

“아직 멀었어도 나쁘지 않아. 너무 빨리하려고 하면 일을 그르치는 법이니까.”

더 속도를 내고 싶지만 참아야겠지.

과하면 부족함보다 못하잖아.

불과 한 달이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공작성 내부를 자기 세력권으로 재구축하는 데 걸린 기간이었다.

* * *

그녀는 걷는 것을 좋아했다.

“걸으면서 내가 이룬 것들을 보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지.”

말을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뭔가 이해가 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얼마 전부터 느끼고 있던 위화감은 불편함을 줬다.

“언제까지 나를 따라다닐까? 이럴 거면 그냥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이 낫지 않나?”

“그만큼 가문 내에 입지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실리는 시녀장의 업무도 많았으나 시간이 날 때마다 페루제 공작부인 곁을 지켰다.

“언제까지 따라다니려고 하는지 모르겠군.”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슬슬 해결을 봐야겠어.”

언제부터인가 느껴지던 시선과 작은 걸음소리는 무심한 자신이라도 완전히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갑자기 사라졌다.

이에 작은 걸음 소리가 빨라졌다.

“앗!”

그녀가 갑자기 멈추자 작은 걸음의 주인은 미처 멈추지 못하고 그녀의 뒤를 따르던 시녀와 부딪쳤다.

그제야 그녀는 그 상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소년이 있었다.

“어, 어.”

소년은 안절부절못하며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은 어디에 둘지 몰랐다.

“너는 누군데 자꾸 나를 따라다니니?”

그녀는 상대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물어봤다

소년의 이름은 란델리노.

벨로나 공작 가문의 유일한 적통이자 반역 가문의 핏줄이었다.

란델리노는 반역자의 후예라는 명목으로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전 공작부인이 혼인한 후에 이뤄진 반역이었다.

그녀는 벨로나 공작 가문의 사람으로 여겨져서 반역자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란델리노가 반역 가문의 핏물이라는 사실을 지우지는 못한다.

결국 아버지조차 자식을 보호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아이가 나를 따라다니니 당혹스럽구나.”

막 가문에서 적응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아직 소년과 자신이 서로 연관될 만한 것은 없었다.

자신이 호의를 베푼 것도 아니고, 자신이 훈육에 나선 것도 아니며, 소소한 관심을 준 것도 아니었다.

그런 자신을 따라다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네가 누구인지 말해 주겠니?”

소년은 눈이 커졌다.

그 물음 안에는 그 어떤 경멸, 무시, 우월감 등의 감정이 없었으니까.

“저, 저는…….”

소년은 손과 다리가 떨렸다.

자신 소개를 했는데 새어머니께서 싫어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었다.

* * *

란델리노는 새어머니가 온 첫날을 잊지 못했다.

몰래 밖으로 나와서 본 새어머니는 대단하셨다.

“엄청 아름다우신 분이구나. 그리고, 그리고…….”

공작성에 온 첫날부터 자신의 권위를 세우던 그 모습은 그에게 감동이었다.

공작의 유일한 자식임에도 아랫사람들의 무시와 냉대에 저항조차 하지 못했던 그와는 전혀 달랐다.

“멋있는 분이야.”

시녀와 시종들도 그를 무시했다.

대놓고 괴롭히거나 때리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눈빛과 태도에서 그것이 드러났다.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지? 나는 보기만 해도 손이 떨리는데.”

노골적일 때도 많았으나 그는 힘이 없었다.

그의 발언은 어린아이의 거짓으로 치부되었고 칸나 백작 부인의 힘에 눌려 묻혔다.

지배자의 위치에 있으면서 권리를 누리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공작이 그를 보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켜줄 외가가 없는 란델리노에게는 공작의 보호가 절실했음에도 외면당했다.

그런 란델리노에게 페루제 공작부인은 동경의 대상이자 애정의 대상이었다.

“태양처럼 환하게 빛나는 거 같아.”

너무 높아서, 너무 강해서 절대로 잡을 수 없는 태양처럼 느껴졌다.

참기만 해야 하는 자신과 달리 원하는 것을 바로 이행할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어머니는 나를 부담스러워하시겠지.”

반면에 그녀에게는 란델리노는 박힌 돌이었다.

자신의 자식이 가져야 할 공작자리를 가져갈 적이었다.

소년의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

“나는 어머니의 자식이 아니니까.”

일반적으로 그게 맞았다.

단지 그녀가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차이였다.

이런 이유로 소년은 자신을 싫어할 것이라고 여겼기에 곁에 다가가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기만 했다.

* * *

그는 이런 식으로 대면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저, 저는, 그, 그러니까 누구냐면…….”

자신의 정체를 알고 그녀가 거부하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그는 울고 싶었다.

멀리서라도 새어머니를 보지 못할까 봐서.

그 모습에 페루제 공작부인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뭔가 말하기 어렵지만 말해야 할 때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 뱉은 다음에 말하렴. 그러면 편할 거란다.”

아이를 위하는 듯한 말이었지만 말투는 지극히 기계적이었다.

귀족적이지 못한 태도를 고쳐야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자신이 귀족적이지 못한 것도 싫었지만 눈앞의 상대가 귀족적이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싫었다.

“숨을 들이켜고 내쉬고 해 보렴. 어서”

소년은 그것도 좋았다.

반역자의 핏줄, 버림받을 예정인 공작 가문의 영식 등의 타이틀 없이 란델리노라는 사람에게 해주는 말처럼 느껴졌다.

그는 어머니의 말에 따라서 숨을 쉬었다.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진정이 되니? 말할 수 있겠어?”

란델리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란델리노 벨로나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머니는 가증스럽게 친한 척, 착한 척을 하다가 그에게 칼을 찌를 사람처럼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녀는 무심하게 그를 바라봤다.

어차피 알고 있던 사실이라서 감흥은 없었다.

“그러면 란델리노 벨로나 영식은 어찌하여 나를 쫓아다녔는지 알려 줄 수 있을까?”

질타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었다.

계속 생각을 해봤다.

그가 자신을 따라다닐 이유가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공작부인이 너무 좋아서요.”

“내가?”

그녀의 뒤를 따르던 시녀들이 속으로 경악했다.

저 서슬 퍼런 눈빛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하는 아이가 존재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네! 하늘만큼 땅만큼 좋아요.”

아이의 눈빛은 귀한 보석을 보듯이 반짝였다.

그 어떤 아이도 자신을 그런 눈으로 보지 않았다.

눈빛에는 두려움이 가득했고 빨리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예전에 어떤 아이가 자신을 보고 뭐라고 했더라?

“웃는데, 웃는데 무서워요. 예쁘신데 무서워요.”

그리 말하면서 울었다.

그 아이의 부모는 사죄하면서 아이를 엄격한 기숙학교에 보내 버리고 자신에게 많은 선물을 보냈다.

“죄송합니다! 아이 교육을 잘못시켰습니다.”

“용서해 주신다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아이의 교육에 어울릴 만한 학교로 보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자신은 별로 화가 나지 않았는데 지레 겁을 먹고 그런 것이다.

“아이가 그럴 수 있지요. 저는 괜찮습니다.”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당시에 그들의 반응보다 다른 것이 신경이 쓰였다.

아름다운데 무서운 것은 뭘까?

궁금했지만 인생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궁금함이었다.

그래서 잊고 있었는데 떠올랐다.

“진심이니?”

일반적인 아이의 반응과 비교해 볼 때 자신의 의붓아들은 신기한 아이였다.

“네. 첫날부터 지금까지 멋있으세요.”

란델리노는 얼굴이 빨개졌다.

멀리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던 새어머니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마치 저 하늘에 닿을 수 없는 태양과 같으세요.”

호의는 없을지라도 적의가 없는 대화였다.

그래서 더 좋았다.

마음에도 없는 호의를 적선하듯이 주는 사람보다 그녀가 나았다.

적어도 그녀는 란델리노와의 만남을 통해 적의를 가질지 호의를 가질지 결정할 테니까.

“태양처럼 거짓 없이 밝게 세상을 비추시는 것 같아요.”

만나기도 전에 그를 판단하는 사람들과 달랐다.

소년은 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길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본 새어머니는 앞과 뒤가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

“어, 어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공작부인의 손이 어린 소년과 가까워졌다.

작은 행동마저도 귀족적이라는 표현을 써야 할 만큼 격식이 있어 보였다.

페루제는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다.

자신도 뭐라고 표현하지 못할 감정이 들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은 그녀답지 않은 말을 하게 만들었다.

“고개를 들어라. 너는 귀족이다. 귀족은 지배하는 자. 고개를 숙이고 명령을 받드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턱을 올려서 자꾸 바닥을 향하게 되는 시선을 그녀에게로 고정했다.

아이는 벨로나 가문의 적통, 벨로나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이 아이를 품어야 할 책무가 있다.

아이가 귀족적이지 못해서 가르침을 줘야 한다.

“허리를 세워라. 허리를 숙이고 조아리지 마라. 그것은 아랫사람의 일이다.”

그녀는 굽어 있는 아이의 허리에 손을 대며 말했다.

그러자 그는 얼른 허리를 폈다.

그녀는 어깨를 만지며 계속 말을 했다.

“어깨를 펴라. 자신이 흔들리지 않음을 보여 주지 못하는 귀족은 신뢰를 줄 수 없는 법이다.”

공작 가문의 영식은 아직 어색했지만 조금 전과는 달라졌다.

자세가 달라지는 것만으로 그 사람의 분위기가 변한 것이다.

“내 아들이라면 그래야 한단다.”

아이가 귀족적이지 못하다면 훈육을 담당하는 법적 어머니가 욕을 먹는다.

괜히 아이 때문에 욕을 먹을 필요는 없었다.

자신이 느낀 정체모를 감정을 이렇게 합리화했다.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귀족적으로 행동해야 해.”

란델리노는 그 말에 화색이 돌았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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