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화 죽이지 않은 것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다 (2)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녀라면 얼마든지 자신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과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한 번만 더 넘어가지. 세 번은 없네.”
정말 한 번만 더 짜증나게 하면 그때는 남편이고 뭐고 상관하지 않고 죽일 것이다.
오직 남편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살려 두고 있는 집사다.
솔직히 집사 자리에 자기 사람을 앉히는 것이 내정을 운영하는데 더 도움이 되었다.
“알겠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길 것이다.
집사는 어찌하여 공작에게 이런 무서운 여인임을 말하지 못했을까?
거기에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고용인들이 그만둘지 말지 고민하던 때, 공작부인이 집사를 불렀다.
우아하게 차를 마시면서 말했다.
“그대도 알겠지만, 고용인들이 계속 이곳에 있을지 아니면 떠날지 곧 선택할 것이야.”
“네. 그렇지요.”
“그런데 집사인 그대가 떠나면 여기 남으려고 했던 고용인들이 어떻게 생각을 하겠어?”
“불안하게 생각하겠지요.”
“그렇지? 내가 엄하기는 해도 공과 사가 분명한 사람이네. 잘못이 없는데 내가 사람을 잡지는 않아.”
“그러시지요.”
집사는 공과 사가 분명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을 화나게 하는 사람은 가만히 두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다.
시녀장을 때려죽인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 순간, 집사의 손에 땀이 났다.
“안주인이 자신의 일을 하겠다고 하는데 그대가 그이에게 뭐라고 주절거리는 서신이라도 보낸다면 나는 그대가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그이를 이용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괜히 집사가 공작에게 허튼 말을 해서 귀찮은 일을 만들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면 집사까지 죽여야 하지 않은가.
그이가 집사에게 사실 확인을 한다며 들쑤시기 전에 죽이고 깔끔하게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만드는 것이 좋았다.
그 말에 집사의 이마도 땀으로 젖었다.
“물론입니다! 내정은 안주인의 일인데 어찌 각하께 제가 함부로 말을 하겠습니까.”
“역시 역사가 있는 가문의 집사는 달라도 다르네. 이제 나가봐요.”
다행히도 집사가 바보는 아니었다.
원하는 대답을 들었으니 이제 다시 일해야 한다.
집사는 방을 나가면서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를 했다.
이미 방안에서 나가기 전에도 인사를 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 모습을 본 고용인들의 말은 공작성에 널리 퍼졌다.
“공작 각하께도 예법에 맞는 인사만 하시던 분이 90도로 허리를 숙였어.”
“90도로 허리를 숙이고는 계속 있더라고. 공작부인이 허락할 때까지 숙이고 있었던 것 같아.”
집사의 역할은 가문의 여러 일을 관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역할에는 고용인들을 보호하는 것도 있었다.
가주의 측근들이 고용인들을 괴롭힌다면 이에 관해 징계를 요청할 권리도 있었다.
요청이 들어오면 상대가 누구든 간에 무조건 조사하고 적법한 벌을 내려야 했다.
“집사님도 어쩔 수 없구나.”
“집사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지 않으면 누가 보호를 해 주지.”
그런데 집사의 그런 모습은 고용인 보호라는 역할을 전혀 수행할 수 없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그녀가 공작성에 도착하고 그 다음 날, 상당수의 고용인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 기회를 놓치고 후회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네.”
시녀장이 된 실리가 계속 있기로 한 고용인들에게 말했다.
“집사님께서는 계속 계실 예정이신가요?”
“저는 제 본분을 다하려고 합니다.”
집사는 차라리 자신도 그날 떠나야 했다고 후회했다.
* * *
성안에서 잘 쓰지 않던 별채를 수리했다.
너무 낡고 외진 곳에 있어서 없애려고 했던 곳이었다.
그리고 그 별채가 새롭게 탈바꿈이 되고 비극이 시작되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꺄아악!”
“제발 이러지 말아 주십시오!”
공작부인의 기사들이 공작성에 거주하는 고용인들의 방을 뒤지고, 밖에 사는 고용인들의 집까지 찾아가서 집 안을 헤집어 놨다.
“여기 수상한 것들을 발견했습니다.”
“여기도 찾았습니다.”
“끌고 가!”
페루제의 기사들은 분수에 맞지 않는 물품을 소지한 고용인들을 잡아들였다.
간간이 수상한 서신도 발각되었다.
자기 스스로 갈 기회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남자도 여자도 머리채를 잡혀 추하게 끌려갔다.
그들이 향한 곳은 새롭게 단장된 별채였다.
공작부인의 기사들에게 고용인들이 끌려갔다는 소식에 집사가 그곳으로 달려갔다.
“아무리 공작부인이라도 이리하실 수 없어!”
집사는 가문 내의 일을 돕는 존재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고용인들을 보호해야 하는 존재였다.
공작부인이 무서운 사람이라고 해도 그 본분을 전부 잊은 것은 아니다.
집사는 별채의 문을 열며 소리쳤다.
“꺄아아아악!”
“살, 살려 주십시오! 제발!”
“무엇이든 다 말하겠습니다!”
고용인들의 비명에 귀가 찢어질 듯했다.
그만큼 고통스러워한다는 뜻일 것이다.
집사는 그 비명이 들리는 쪽으로 빠르게 갔다.
여러 방이 있었다.
그 비명이 들리는 가장 가까운 문을 열었다.
“가지고 싶은 마음에 훔친 것뿐이에요. 배후 같은 것은 없습니다. 정말이에요!”
평생 겪을 거라 생각해 본 적 없던 고문이 가해졌다.
“어디서 이런 망행을 하는가! 그만두게!”
집사가 소리를 쳤다.
그러자 그를 고문하던 이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는 그를 바라봤다.
가면을 써서 눈만 보였는데 금방이라도 자신의 목을 꺾어 버릴 기세였다.
그가 고문 기구를 쥐고는 집사에게 다가갔다.
무서웠다.
자신과 비교하면 거구인 사내는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죽이리라.
그러나 이대로 외면하고 도망갈 수 없었다.
그것은 집사로 자신의 긍지였다.
“그만하거라.”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실리가 있었다.
다시 앞을 바라보자 거구가 허리를 숙이고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잠시 밖에서 쉬고 들어오거라.”
“네. 알겠습니다.”
집사에게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던 사내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대답하고 그 방을 나갔다.
그 방에는 집사, 고문당한 시종, 실리만 남았다.
“억!”
“이게 무슨 짓인가!”
그런데 갑자기 실리가 자기 품 안에 있던 단검을 꺼내서 묶여서 의자에 앉아 있던 시종의 목을 베어 버렸다.
시종의 눈빛에서 삶이 빠져 나가고 공허해졌다.
“아무리 집사께서 애를 써도 죽을 아이였습니다.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빠지시기 전에 제가 집사님의 마음을 구해드린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것인가!”
자신을 위해 시종을 죽였다는 실리의 말에 치가 떨렸다.
자신은 어차피 구할 수 없었다고?
고용인을 보호해야 하는 것은 집사의 의무이기도 했지만 시녀장의 의무이기도 했다.
그런데 실리 시녀장은 자신의 의무를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을 경멸하는 얼굴로 바라보는 집사에게 아무 감정도 없었다.
그가 있어야 내정 업무 파악이 더 수월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집사와 자신이 부딪힌 일은 아직은 없었다.
“그동안 집사의 본분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셨는지 모르지 않으나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뭐?”
“공작부인께서 결정하신 일에 감히 반대하며 이리 난리를 치신다면 그분께서는 집사님께도 밝혀지지 않은 ‘배후’가 있다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평소 집사님과 친했던 분들도요.”
“나를 협박하는 것인가!”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과 남은 이들을 지키고 싶으시다면 이만 나가시지요.”
그래서 그녀 나름대로 충고를 해줬다.
결국 그는 별채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나왔다.
실리의 말처럼 자칫 다른 사람들과 자신도 별채에서 고문당하는 이들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꼴을 보려고 이 자리를 지키겠다고 한 것이 아닌데…….”
다리 힘이 풀린 그가 주저앉으며 눈물을 흘렸다.
‘공작가문의 집사’라는 자긍심 따위는 버려야 했는데 버리지 못한 결과다.
“나 자신도 지키지도 못하는데 어찌 다른 사람들을 지켜.”
자신과 가문의 고용인들을 지켜줘야 할 공작은 너무 멀리 있었다.
이에 비해 공작부인은 이곳에 있었으니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하는지는 정해진 것과 같았다.
그만둘 기회를 줄 때에 그만뒀어야 했음을 깨달았다.
이 자리를 계속 지키겠다는 결심을 했던 과거의 자신이 너무 싫고 후회스러웠다.
갑작스러운 일에 고용인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낮이고 밤이고 비명에 무서워서 걷지도 못하겠어.”
얼마 전까지 웃고 떠들던 동료가 그렇게 되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그러게… 이러다가 우리도 잡혀가면 어쩌지?”
언제든지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
이 사태에 대해 벨로나 공작 가문의 기사들은 분개했다.
“어찌 이런 짓을 독단적으로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단호하게 이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수도에 있는 기사단 단장을 대신하여 부단장은 공작부인을 만났다.
항의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페루제 공작부인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녀는 성내의 안전을 담당하는 기사들과 인사를 하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이 왜 그들에게 인사를 해야 한단 말인가?
그들이 자신에게 인사를 와야지.
부름이 없다고 오지도 않다니!
부름이 없으면 불러 달라고 요청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버릇없는 것들이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모른 채 기사들은 성이 잔뜩 나 있었다.
“불온한 세력을 제압하는 것은 성내의 병사와 기사가 하는 것이옵니다! 어찌 공작성이 아닌 외부인사가 그런 일을 한단 말입니까!”
일단 공작 가문의 일은 가문의 기사가 아닌 자들에게 맡겼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였다.
이것은 그녀가 그들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이었으니까.
“저희를 믿지 못하는 부인을 어찌 저희가 지켜드릴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이는 저희를 믿는 주군을 믿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공작부인의 기사단이라는 말도 안 되는 작자들이 공작성을 마음대로 활보하는 것은 그들을 무시하는 행위였다.
나아가 주군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만약 그들이 삿된 마음을 먹고 성안에서 불손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막아내기 어렵습니다. 점령당한 성안에서 싸우는 것이 옵니다.”
세 번째, 공작 가문의 소속이 아닌 병사가 있다는 것 자체가 성내를 위험에 빠뜨릴 소지가 다분했다.
만약 그들이 내부에서 내란을 일으킨다면 진압하는 데 엄청난 희생을 치를 것이었다.
기사들이 봐도 공작부인이 데려온 자들의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전체적인 수준이 그들과 비등했다.
“어찌 고용인들을 함부로 한단 말입니까! 자기 사람들을 이렇게 험하게 대한다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것입니다!”
부단장의 말에는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만한 말들이었다.
듣기만 하던 그녀는 부단장을 비웃었다.
비웃음에 부단장의 얼굴이 굳었다.
이런 반응 정도는 예상했다.
당연히 그 대응책도 마련하고 왔다.
어떤 책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