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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5화 (15/221)

015화 자기 위치를 모르면 죽는다

마차의 창문 밖으로 보이던 공작령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드디어 도착했다.

당했던 모욕에 나빴던 기분도 서서히 나아지고 있었다.

“그들은 잘 도착했겠지.”

“지금쯤이면 잘 도착했을 것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다 끌고 오고 싶었거늘.”

페루제 부인이 슬쩍 마차 뒤쪽을 바라봤다.

합류했을 때에 비하면 엄청나게 줄어든 행렬이었다.

기사들이 경악할 만한 규모가 아니라 좀 돈이 있는 여인이구나 싶을 정도였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흔들리는 기강을 바로잡지 못했으니까.”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그녀가 말한 ‘흔들리는 기강’은 공작 가문의 인척들이 내정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완전히 내정 업무에 적응하면 그때는 집안이 잘 돌아갈 거야.”

자신이 자유롭게 쥐고 흔들고 밟을 수 있도록 장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입니다. 게다가 지금 공작 성에 들이지 못한 재물들은 부인을 돕는 데 쓸 예정이니까요.”

실리가 찻잔에 차를 따랐다.

주인을 닮아 과하지 않으며 격식에 맞는 자세를 보였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공작성에 입성했다.

그녀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눈을 찌푸렸다.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사람들은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좋지 않은 얼굴을 바꿀 생각조차 하지 않고는 걸었다.

자신을 마중을 나온 고용인들에게 시선이 향했다.

고용인들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집사 앞에 섰다.

“공작부인께 인사드리옵니다.”

집사와 시녀장 그리고 하인들이 품위 있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만족할 만한 아랫사람의 자세였다.

“이게 전부인가?”

“예?”

그러나 아쉽게도 그녀는 정상적인 사고와는 거리가 멀었다.

가문의 안주인이 처음으로 가문에 온 날이다.

그런데 겨우 이따위로 자신을 대접하다니!

이것은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무시하는 것과 같았다.

겨우 이것들을 모아 놓고 인사를 하겠다고 서 있다니!

공작 가문의 안주인을 하찮게 여기는 태도는 공작 가문의 수준을 낮추는 짓거리였다.

“집사라는 사람이 주인이 두 번 말하게 하는군. 이게 전부라고 물었네.”

혀를 차는 듯한 눈빛으로 집사를 바라봤다.

그는 표정이 굳었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것이다.

“예, 여기 올 수 있는 사람들은 전부 왔습니다.”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오랜 경험은 그것을 드러내지 않게 말했다.

베테랑다운 모습이었다.

“고용인만 있고 가신 가문의 안주인과 방계가문의 안주인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 전부 왔다?”

공작 가문과 관련된 사람들이 그녀를 얼마나 만만하게 보고 있는지 알려 주고 있었다.

사실, 그녀에 대한 평가는 수도와 다르지 않았다.

몸이 달아 결혼하려고 수도까지 달려간 천박한 여인.

지참금도 가져오지 못한 여인, 딱 그것이었다.

그래서 고용인들은 그녀가 가져온 재물과 데려온 사람들에 조금 놀라기는 했다.

그렇지만 소문보다 가문의 재정 상태가 괜찮은 듯하다고 여겼을 뿐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는 고용인들과 달리 집사는 제발 조용히 넘어가기를 바랐다.

새로운 공작부인이 소문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그는 그녀가 큰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확신에 가까운 걱정이 들었다.

“내가 언제 오는지 서찰을 보냈는데 말이야.”

그녀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살아 있는 사람이 말하는 것 같지 않아서 소름이 돋았다.

공작과 왕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찮은 가문의 여인인 것처럼 속였다.

이득을 위해서 잠시의 모욕을 참아내는 것은 할 수 있다.

“내가 빚만 있는 집안의 딸이라고 해서 그런가?”

그렇지만 이것은 다르다.

자신이 실제로 하찮은 가문의 여인이든 대단한 가문의 여인이든, 어쨌든 벨로나 공작 가문의 안주인이다.

그런 자신에 대한 예우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당히 열이 받는 일이다.

“정말 상상했던 것보다 더 기분이 더럽군.”

그들의 무례함과 모욕을 어느 정도 예상했음에도 말이다.

그것조차 계획에 있던 것이라도 기분이 나쁜 것은 나쁜 것이다.

“그들이 오지 않은 것은 자네가 소식을 알리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그들이 알면서 오지 않은 것인가?”

집사는 난감했다.

여기서 소식을 전했다고 말하면 공작 가문의 아랫사람들은 위계질서를 무시한 것이 된다.

나중에 그의 대답을 근거로 그들을 훈계한다면 입장이 난처하게 될 것이다.

고자질한 꼴이니까.

그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이들과 한순간에 척을 지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고 하면 자신들이 맡은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는 질타를 받게 된다.

“왜 대답을 하지 않지? 솔직하게 말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녀가 대답을 종용했다.

집사의 갈등에 고용인들은 의아했다.

어찌하여 저런 공작 가문과 어울리지 않는 여인에게 눈치를 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집사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려고 했다.

“공작성에 오신 첫날부터 이리 기품 없이 행동하십니까.”

한 여인이 입을 열었다.

집사와 함께 공작 가문을 이끌었던 시녀장이었다.

또한 그녀는 칸나 백작 부인의 끄나풀이었다.

칸나 백작 부인의 위세를 믿고 공작부인 머리 위에 있는 듯한 오만한 태도를 드러냈다.

페루제 공작부인이 시선을 그녀에게로 옮겼다.

“그대가 시녀장인가?”

“네, 이 벨로나 공작 가문의 시녀장입니다.”

그녀가 데려온 사람들은 움찔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하얗게 질린 얼굴을 공작 가문의 고용인들이 보았을 것이다.

고개를 숙인 고용인들이 작게 속삭였다.

“저 여자 곧 죽겠지?”

“만약 죽지 않는다면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꼴이 아닐걸.”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네.”

기품이란 몸가짐의 수준이 높고 훌륭하며 아름다운 것을 말한다.

그녀는 그 기품을 지키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

어머니가 죽어가는 동안에도, 계모와 형제가 죽어가는 동안에도, 라스타 왕국의 남부를 장악하고 수많은 귀족을 죽이는 동안에도 그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시녀장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시녀장은 그녀가 일생을 바쳐서 지금도 노력하고 있는 것을 모욕했다.

페루제는 최악의 수치를 준 시녀장이 용서가 되지 않았다.

“기품이 없다고?”

무표정한 얼굴로 시녀장과 눈을 마주쳤다.

순간, 시녀장은 오한이 드는 착각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렇습니다. 우아한 귀부인이라면 하지 않을 행태이시옵니다.”

“자네, 그만!”

집사가 분수에 맞지 않는 시녀장의 행동을 막으려고 했다.

공작부인이 손을 들어서 막았다.

정말 궁금했다.

죽기 전에 어떤 말을 내뱉는지 진심으로 알고 싶었다.

“아니, 더 들어보지.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하군.”

“공작부인이 되셨으면 응당 가문의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려야지요. 그분들을 오라 가라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시녀장이 자신은 도리를 했다는 듯이 당당한 표정으로 말을 끝냈다.

여기서 그녀가 말하는 가문의 어른들에는 칸나 백작 부인이 있었다.

칸나 백작 부인에게 고개를 숙이고 복종하라는 것이다.

공작부인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정말 아둔한 사람이야.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니 말이야.”

공작 가문에 빌붙어 있는 노부인 따위에게 복종하라고 하다니 웃겼다.

그 노부인이 자신에게 목숨을 구걸해야 할 판국인데 그걸 모르고 나대는 꼴도 말이다.

“그게 무슨…….”

그 말에 시녀장이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물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물음은 끝을 맺지 못했다.

“부인! 이런 망측한 일이 벌어진단 말입니까!”

실리였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큰 목청으로 말을 이었다.

“감히 공작부인께 아랫사람들을 찾아가서 인사를 하라니요! 아무리 집안의 어른이라고 해도 공작부인의 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시녀장이 황당해하며 한소리를 하려고 하는데 실리가 더 빨랐다.

“이는 벨로나 공작 각하를 아래로 보는 행위! 이런 일을 묵과한다면 공작 가문의 치세에 누가 될 것이 옵니다!”

공작 가문의 고용인들이 사색이 되었다.

하찮고 만만한 공작부인을 모욕주고 기를 꺾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공작이 언급된 순간,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시녀장의 발언은 공작이 집안 어르신들의 아랫사람으로 그들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니까.

공작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말이었다.

누군가가 이에 대해 말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한 번 뱉어지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말이란 것은 주워 담을 수 없었으니까.

“그래 실리, 네 말이 맞구나. 내가 온 첫날부터 이러는 것을 보니 얼마나 기강이 해이해졌는지 알겠어.”

“부인!”

시녀장이 반박을 하려는데 공작부인이 눈짓했다.

어차피 기회를 봐서 죽이려고 했다.

첫날부터 스스로 죽임을 당할 명분을 주니 그 기대에 부응해야겠다.

이에 일사불란하게 실리 뒤에 있던 시녀들이 시녀장에게 다가왔다.

“무, 무엇이냐!”

그녀의 발악에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각각 하나씩 잡았다.

또한 입에 재갈을 물렸다.

그 과정에서 시녀들은 그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흔들리는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본보기가 필요하지.”

집사는 막고 싶었으나 막지 못했다.

막으려고 든다면 시녀장과 같은 꼴이 될 것을 직감했으니까.

그녀는 다정하게 실리를 일으켰다.

“실리, 너에게 그 기회를 주고 싶은데 괜찮겠니?”

“물론입니다.”

어느새 페루제 공작부인 옆에는 시녀가 쟁반을 들고 서 있었다.

그 쟁반에는 채찍이 있었다.

“이것으로 이 성안의 모든 고용인이 이곳으로 올 때까지 ‘전 시녀장’을 때리렴.”

그녀는 그 채찍을 실리에게 쥐여 줬다.

실리는 이런 일은 깔끔하게 처리한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믿고 맡길 수 있다.

“이런 모욕을 막지 못한 저에게 벌이 아니라 기회를 주시다니요! 힘껏 부인의 은덕에 보답하겠습니다.”

그리고 채찍 소리가 공작성 안에 울려 퍼졌다.

거대한 성에 고용인도 많았다.

“아직 다 오지 않은 듯싶구나. 더 때려라.”

그녀는 자신의 주인만큼 냉혹했다.

“부족하구나. 계속해라.”

많은 고용인이 그녀가 있는 곳으로 왔음에도 채찍질은 멈추지 않았다.

“이쯤 했으면 충분하겠지.”

해가 질 때쯤에야 끝났다.

쉬지 않고 한 매질에 시녀장의 등 뒤는 피가 범벅이었다.

사람인지 고깃덩어리인지 모를 만큼 흉측해져 있었다.

사람이라고 표현하기에도 미안한 상태였다.

그녀는 쓰러진 시녀장의 등을 밟았다.

피범벅이 된 이의 등을 자신의 짜증만큼 강하게 눌렀다.

그냥 밟아도 고통스러운 상황인데 그녀의 신발은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

발끝이 뾰족했다.

그래서 다른 신발들보다 배로 고통을 줬다.

“으으으으…….”

재갈이 물렸지만, 그 신음을 막지 못했다.

“실리, 저딴 것보다 네가 훨씬 시녀장에 맞는구나. 번거롭겠지만 수고를 좀 해다오.”

실리를 보는 페루제의 표정은 지금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게 자애롭게 보이기까지 했다.

“기대에 부응하겠사옵니다. 제가 가문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들을 이 채찍으로 바로 잡겠나이다.”

공작성의 고용인들은 망했다고 생각했다.

해가 질 때까지 쉬지 않고 채찍으로 때리던 새로운 시녀장의 말이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만만한 여인이 아니라 완전 무섭고 잔인한 여인이 공작부인이 되었으니까.

칸나 백작 부인도 만만치 않은 여인이지만, 이 여인을 이기기에는 부족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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