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화 알고도 당하는 모욕이지만 기분이 더럽다
결혼식을 마치고 그날 밤 첫날밤을 보냈다.
“혼인계약서만 아니었다면 피곤한 일이 없었을 것인데 아쉽군.”
첫날밤을 보낼 방에서 공작이 한 첫말이었다.
첫날밤을 바람 맞추지 않는 것은 혼인서약서에 기재된 내용이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업무를 빌미로 첫날밤을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신가요?”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신혼 방에서 다시 만난 그들은 서로 간의 교감이나 호기심은 없었다.
벨로나 공작은 부부간의 관계조차 계약에 넣은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도 많은데 그런 것까지 해야 하니까.
“일도 많은데 내가 이런 것까지 신경을 써야 하나?”
그녀도 공작과 같았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다.
그렇지만 첫날밤을 제대로 보내지 않는다면 계속 뒤에서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여인으로 얼마나 매력이 없으면 거절당하냐는 소리 따위를 듣느니 귀찮아도 하는 것이 더 나았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첫날밤도 못 지낸 안주인은 무시당하기 딱 좋았다.
신부가 소박을 맞으면 왜 신랑이 아니라 상대방이 욕을 먹는지 모르겠다.
아내에 대한 예의를 어긴 것은 남편이니 당연히 그가 욕을 먹어야 했다.
“저야 아버지께서 하신 것이라서요.”
아버지에게 명령을 내린 것이니까 아버지가 이 혼인을 진행한 것은 맞았다.
그녀는 있는 사실을 말했다.
“바쁘신 것 같으니 얼른 하고 끝내죠.”
“귀찮게 하지 않아서 좋군.”
짐승 간의 교미처럼 의무적이었으며 형식적이었다.
행위가 끝나고 공작은 바로 나가 버렸고 페루제 공작부인은 해가 뜨자마자 분주하게 움직였다.
“벌써 가신단 말입니까?”
“네, 원래의 일정대로 이제는 해야지요.”
* * *
공작의 보좌관인 세베루스는 당혹스러웠다.
첫날밤을 마친 아침에 공작령으로 떠나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남녀 간의 밤일은 서로에게 힘들지만, 특히 여인에게 힘든 일이었다.
그것이 처음이라면 더욱더 그러했다.
“좀 더 쉬시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세베루스는 걱정되는 마음에 한 소리였다.
그런데 그녀의 한쪽 눈이 움직이더니 그녀가 입을 열었다.
떠나겠다고 결정을 내렸는데 감히 자신을 막는 보좌관이 거슬렸다.
“충고를 하나 해드리지요. 그이가 아끼는 분이니까요.”
그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을 막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빨리 떠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보좌관님, 보좌관으로의 일을 하세요. 그 선을 넘으면 그건 조언이 아닙니다.”
한결같이 웃고 있던 미소가 지워졌다.
공작의 곁에서 그를 보좌하던 그는 공작부인의 눈빛이 뜻하는 바를 잘 알았다.
그 눈빛은 적을 죽이겠다는 광기가 담긴 병사의 눈빛과 같았다.
결국 세베루스의 표정은 굳어지고 말았다.
상당히 위험한 여인을 가문에 들인 것인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 그의 걱정이 무색하게 그녀는 다시 다정하게 웃었다.
“괜한 말을 한 것 같네요. 잘 하시겠지요. 그이 곁을 오랫동안 지키신 인재이신걸요.”
아까 자신이 본 인물과 동일하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저는 이만 가 보도록 하죠. 공작령으로 가고 있는 제 사람들과 만나야 해서요.”
그녀는 보좌관을 지나쳤다.
거기에는 혼인 생활에 대한 기대감이라든가 남편에 관한 관심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신에 그녀는 처음 벨로나 공작 가문에 발을 딛게 되면 일어날 일들에 대한 기대감을 품었다.
“아 참, 그분에게 저 간다고 대신 전해주세요.”
첫날밤을 지낸 남편조차 보지 않고 가 버리는 것이 이를 입증시켰다.
목소리는 담백했다.
그 어떤 아쉬움도, 그 어떤 실망도 없었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할 부인이 될 것을 하루 만에 느꼈을 텐데 말이다.
사랑 따위에 시간과 감정을 낭비할 틈이 없었다.
최대한 빨리 공작령으로 입성해야 했다.
공작이 없는 틈을 노려야 내부를 장악하기 쉬웠다.
“알겠습니다.”
보좌관의 대답을 듣고는 다시 자기 갈 길을 갔다.
그는 공작부인에 대해 공작 각하에게 보고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잠깐의 대화만으로 유난을 떠는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빚도 많고 아무 힘도 없는 가문의 여인이잖아. 괜한 말로 각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말자.”
그는 공작부인이 수도에 어떤 모습으로 왔는지 떠올렸다.
“가문에 돈이 없어서 허름한 마차도 겨우 빌려온 모양이었잖아. 마차를 끌 마부와 시녀 하나 딸랑 데려왔지. 그것도 겨우 데려온 것 같았어. 그래. 과한 생각이야.”
차라리 이때 공작에게 말해서 조금이라도 경계를 하게 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일이다.
“공작부인께서 공작령으로 가신다고 하니 기사단장에게 말하게.”
* * *
천박하게 몸이 달아서는 수도까지 달려와 공작과 혼인을 했다는 불명예를 뒤집어썼어도 공작부인이었다.
공작은 기사들 몇을 호위로 붙여 줬다.
공작부인과 같이 공작령으로 가야 하는 기사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필 공작 가문의 안주인으로 그런 여자가 들어올 게 뭐람.”
“야 이놈아, 그런 소리를 왜 하냐.”
“어찌 되었든 이제는 공작부인이시다. 아무리 진심이라고 해도 속으로 삼켜라.”
“집안도 하찮아. 품위도 없어. 주군과 비교하면 할수록 부족하니까 이러지.”
“지참금 낼 것도 없어서 자기가 가진 것만 가지고 오기로 했다고 하더군.”
아무래도 공작 가문의 품격을 떨어뜨린 여인이었으니까.
그런 여인 때문에 주군의 곁에 있지 못한다는 것은 짜증이 나는 일이었다.
거기다가 더 짜증이 나는 일은 따로 있었다.
“내가 들러야 하는 곳이 있어서 그러니 그곳부터 가지.”
바로 공작령으로 갈 것이지 다른 곳부터 갔다가 간다고 하지 않는가!
공작 가문의 안주인으로 가문을 우선시해야 하는데 그녀는 아닌 듯했다.
첫인상이 너무 나쁘다 보니 별것도 아닌데 트집이 잡혔다.
“저기 내 사람들이 있군. 저기로 가게.”
그러나 그 불만은 당혹과 경악으로 바뀌었다.
기사 중 일부가 눈을 비볐다.
“내가 본 것이 맞냐?”
“너도 보이냐? 나도 보여.”
엄청난 길이의 물품들과 사람들,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가 탄 마차가 다가가자 그 무리의 대표로 보이는 자가 앞으로 왔다.
그리고 그녀가 마차에서 나오자 소리치며 허리를 굽혔다.
“오셨사옵니까! 부인의 기사단이 이제부터 모시겠사옵니다.”
그 우렁찬 목소리에 병사들이 검과 창을 높이 들며 소리쳤다.
“부인께 인사드리옵니다! 부인을 따를 영예를 주십시오!”
그 우렁찬 목소리에 병사들이 검과 창을 높이 들며 소리쳤다.
주변이 그들의 목소리에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제야 자신의 격에 맞는 대우를 받게 되었다.
마땅한 대우를 받는 것이었기에 기분이 더 좋아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런 그들의 대단함에 아랑곳하지 않고는 한마디 했다.
아주 작지만 정확한 발음이었다.
“죽여.”
윗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멍청이들이다.
자신이 듣고 있는데도 대놓고 뒷담화를 까지 않았던가.
자신을 모욕하는 자들과 함께 가는 것은 자신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짓이었다.
모욕은 받은 것 이상으로 갚아 줘야 권위가 바로 세워진다.
“저딴 것들이 공작 가문의 기사라니 실망이군. 쯧”
그녀의 기사들은 공작 가문의 기사들을 죽였다.
수적인 열세와 실력 차이는 그들을 손쉽게 죽음으로 인도했다.
하찮게 본 만큼 하찮은 기사들을 보낸 것이다.
“도착하게 되면 썩어빠진 정신부터 고쳐놔야겠군.”
기사들조차 이리 분수를 모르고 나댄다.
기사란 가장 기강이 잡혀 있어야 하는 존재다.
주군을 지키고 주군을 대신하여 앞장서서 싸워야 하며 병사들을 이끌어야 하니까.
그런 기사들이 주군의 부인이자 가문의 안주인을 무시하는 짓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교육해도 정신 못 차리는 것들은 치워버리고 말이야.”
기사도 이러한데 일반적인 고용인들도 어떤 상태인지 보지 않아도 알 듯싶었다.
그녀가 자신이 타던 평범한 마차가 아닌 화려하고 누구나 고개를 숙이게 하는 웅장한 느낌을 주는 마차에 탔다.
최측근인 실리가 먼저 타고 있었다.
“부인, 여기 차를 준비해 뒀습니다.”
“역시 마음에 들어.”
그녀는 눈을 감고 실리가 준 차를 음미했다.
차를 마시니까 치밀어 오르던 화가 조금 진정이 되었다.
“그이가 호위로 붙여준 기사들이 내가 가지고 온 소소한 재물에 욕심이 나서 나를 죽이려고 들었지.”
“그런 탐욕스러운 작자들이 공작 가문의 기사가 될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죄송한 말이지만 공작 각하의 안목이 너무 낮아서 걱정될 정도입니다.”
찰나의 순간에도 공작을 낮잡아 보는 말을 하는 실리였다.
“공작 가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기는 했지.”
일행과 마주치고 바로 죽임당한 기사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것이 사실인 양 말했다.
아직은 공작이 자신에 대해 몰라야 했다.
최대한 자신이 누군지 몰라야 일이 쉬워진다.
상대의 방심은 승리를 쉽게 만드는 요인이다.
“거기에다가 감히 공작부인의 시녀들에게 모욕을 주려고 했지요. 그 죄를 다른 기사들이 덮으려고 저희를 모두 죽이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실리도 그것이 진실이라는 듯이 말을 이어 갔다.
그녀는 기사들이 공작부인의 심기를 거슬리게 해서 죽임 당했다고 확신했다.
일부러 모욕을 당하려고 수도까지 간 것이었지만 더는 참기 어려웠던 모양이라고 말이다.
그녀는 자신의 주인이 겪었을 짜증을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신이 곁에서 보필했다면 간접적으로라도 그들에게 벌을 줬을 것이다.
그렇게 몇 마디 대화로 순식간에 기사들에게는 없던 죄가 생겨 버렸다.
“그래. 그래서 나를 공작령으로 바로 데려가지 않은 거지.”
그녀가 바로 공작령으로 가지 않은 것은 기사들의 모략으로 인한 것으로 둔갑했다.
“혹시 보좌관도 연관이 되어 있는 것일까?”
“글쎄요. 그건 아닐 것입니다. 그분은 공작 각하의 최측근이니까요.”
보좌관까지 엮어서 한번 몰아붙여 볼까 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실리는 공작이 신뢰하는 가신을 건드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아직 자리를 잡은 것이 아니지요. 자리를 잡으시고 나서 생각하시는 것이 어떠실까요?”
실리의 의견은 타당했다.
방심을 시켜야 하는데 괜히 엮으려고 했다가 의심을 살 수 있다.
조바심은 일을 그르치게 만든다.
차근차근 하나씩 하면 된다.
“그래. 실리 네 말이 옳겠구나. 나중에 천천히 하지.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는 법이니까.”
“지당하신 말씀이 옵니다.”
만약에 보좌관을 처리해야 할 경우가 생긴다면 나중에라도 엮으면 될 일이었다.
가문 내에서 힘을 탄탄하게 가진 후에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이 편지를 그이에게 보내렴.”
“알겠습니다.”
“이런 큰일은 그이가 제일 먼저 알아야지.”
누가 들으면 완전 사이가 좋은 부부인 줄 알 것이다.
그녀는 알았다.
자신에게 무관심한 공작이라면 자신이 보낸 서찰은 읽어보지도 않을 것을 말이다.
읽게 된다고 해도 그것은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다.
그에게 자신의 가치는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공작도 그의 측근도 자신이 이렇게 대놓고 일을 저지르는데 모르고 있다.
전날에도 비웃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혹시 모르니 신전을 통해서 보내렴. 혹시 누락될 수 있으니까.”
신전을 통해서 서찰을 전달하면 그 내용을 신전에서 기록하고 보관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활을 제삼자가 보기를 누가 원하겠는가.
그래서 공식적인 업무에 대한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나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나중에 억울한 일이 생기면 아니 되니까.”
혹시라도 거짓이 아니냐고, 그런 내용으로 보낸 적이 없는 거 아니냐고 몰아세울 때를 대비하는 철두철미함은 기본이었다.
“날 모욕하는 것들 때문에 잠시 기분이 나빴지만 생각해보니 오히려 나에게 좋은 일이었어.”
“일이 맞아떨어지는 듯합니다.”
공작령으로 가는 길은 평안했다.
누가 감히 날카로운 검과 같은 기사와 병사, 그리고 하인들을 거느린 존재를 위협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