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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3화 (13/221)

013화 혼인을 서두르는 이유

레무스가 혼인 진척을 보고하는 서류를 읽었다.

누님처럼 우아하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말이지. 누님을 아주 만만하게 봤단 말이야.”

기본적인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페루제 루비 로즈를 하찮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고모라는 사람은 노후를 편히 보내기에는 글러 먹었네. 뭐, 내 이야기는 아니니까.”

아버지에 대한 걱정조차 없는 그가 타인을 걱정할 리 없었다.

“자기가 어떤 사람을 집안에 들이는지도 모르고 말이야. 다 자기 죄가 돌아오는 거라고.”

오히려 공작의 고모가 죄를 지어서 벌을 받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 죄란 페루제를 공작 가문의 안주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레무스는 그녀에 대한 조사 보고서의 내용을 떠올렸다.

벨로나 공작의 고모인 칸나 백작 부인은 공작 가문의 내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녀는 선대 공작의 여동생이었다.

갑작스럽게 죽은 오라버니를 대신하여 조카를 도우며 그가 공작자리에 적응하도록 도왔다.

가문의 재산과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일족들에게서 자신을 지켜주는 고모.

어린 나이에 친모를 여윈 공작에게 그녀는 어머니와도 같았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사랑을 줬으니까.

공작의 호의는 세월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았다.

오히려 단단해졌다.

단단해진 만큼 칸나 백작 부인이 공작 가문에서 가지는 위세는 엄청나졌다.

덕분에 그녀는 내정을 좌지우지하며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지금 누리는 것만으로 충분해 보이지만 사람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다.

“반역가문 태생의 장남만 죽으면 자기 자식을 다음 대 공작으로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지.”

자기뿐 아니라 자기 자식 그리고 손자까지 모두 누리게 해주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허접한 가문, 허접한 여인을 공작부인으로 내세워 허수아비로 만들려고 했다.

임신하면 유산하도록 손을 쓰면 되었다.

귀찮아도 감수할 만했다.

내정에 권한이 없기에 진실을 밝히고 싶어도 그 누구도 돕지 않을 것이다.

“아이를 못 낳는 석녀라고 밝히니까 좋아서 바로 허락을 하는 꼴이라니. 왜 밝혔는지 모르는 멍청이지.”

‘그런 번거로운 과정이 필요가 없다니!’

칸나 백작 부인의 입장에서는 횡재한 기분일 것이다.

여인으로 석녀라는 것은 아주 치명적인 흠결로 파혼당하고 이혼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약점이었다.

그런데도 이 사실을 칸나 백작 부인에게 알린 것은 그것이 나중에 그녀에게 비수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석녀라는 치명적인 흠을 알고 있음에도 혼인을 추진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 의중이 불순하고 사악했다.

둘 사이에는 어떤 친분도 없었으니까… 친분이 있어도 수상할 일이다.

예비 조카며느리를 위한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가문의 일은 누님이 알아서 하겠지만 그래도 자주 보지 않을수록 마음이 편하지.”

어차피 백작이나 레무스나 집안에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적었다.

그것도 페루제가 허락한 범위 내에서 가능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되어 있다.

“누님이 가시면 좀 숨을 쉴 수 있을까?”

반면에 가문과 귀족으로의 품위를 위해 지켜야 할 것은 많았다.

누님의 차가운 시선이 언제, 어디서든 느껴지는 기분은 당해 봐야 안다.

적어도 그녀가 타국으로 가면 그런 두려움은 덜 할 것이다.

* * *

생각만큼 혼인의 진척이 빠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많은 일을 생략하고 큰일들만 진행해야 할지도 몰랐다.

‘이미 차근차근 세운 계획들을 써보지도 못하다니!’

그런 안타까운 일은 없어야 한다.

그녀가 산책하면서 말했다.

“좀 앞당겼으면 좋겠구나. 혼인.”

산책 중에 말 한마디만 했을 뿐인데도 혼인 준비 기간이 엄청 단축되었다.

갑작스러운 변덕에 죽어 나가는 것은 아랫사람들이지만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서 움직여!”

“최대한 앞당겨야 한다! 지참금과 이동할 병사, 기사들 다시 확인해!”

“사람을 보내서 칸나 백작 부인에게 의견을 보내!”

그녀에게는 결과만이 중요했다.

그 수단과 과정은 관심 밖이었다.

그것을 그녀를 따르는 모두가, 그녀를 두려워하는 모두가 알았다.

* * *

“천박하기도 하지. 혼인을 빨리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구나.”

칸나 백작 부인은 흔쾌히 그들의 제안을 수락했다.

남자를 원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채근하는 모습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딱 좋았다.

사교계에서 고립시키기 좋은 조롱거리였다.

남자를 너무 원하여 몸이 달아오른 ‘천박한 여인.’

가진 것도 없는 이름만 귀족인 주제에 공작부인 자리를 원한 ‘자기 분수를 모르는 여인’.

그것이 칸나 백작 부인이 가진 페루제에 대한 느낌이었다.

예비 공작부인을 만만하게 보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그런 방심을 원해서 번거롭게 이런 결혼을 하려는 것이다.

* * *

페루제는 실리와 함께 마차 안에 있었다.

밖에서는 병사들과 기사들이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면 이제 알펜 왕국으로 가 볼까? 너희들은 먼저 영지로 가거라. 나중에 따라가마.”

“어찌 저희와 따로 가려고 하십니까?”

그녀의 측근으로 보이는 기사가 물었다.

영지에서 결혼식을 하기로 했었다.

아무리 허접한 가문인 척 속이고 있어도 형식은 갖춰야 한다.

“마음이 급하여 수도에 직접 가서 혼인하려고 한다.”

“알겠습니다.”

기사는 그 말에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의중이 무엇인지보다 그녀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어서 빨리 그이의 아내가 되고 싶구나.”

예비 공작부인과 공작부인은 달랐다.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예비 공작부인은 아직 정식 부인이 아니었기에 과하게 표현하자면 손님에 지나지 않았다.

조용히 곁을 지키던 실리가 입을 열었다.

“일국의 공작입니다. 공작의 결혼식을 날치기식으로 하겠습니까?”

뭐라고 사람들이 하던 간에 최대한 빨리 법적으로 공작부인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가문을 휘어잡는 것이 여러모로 편했다.

“허울뿐인 가문이라고 여기고 있지. 그런 가문 사람으로 안주인 삼는 것을 최대한 감추고 싶을 거야.”

알펜 왕국에 루비 로즈 백작 가문이 실제로 있었다.

빚에 찌들어서 도저히 유지가 되지 않는 가문이었다.

백작 가문이라도 해도 영지가 있는 것도 아닌 이름만 겨우 유지하는 중이었다.

그 백작 가문을 사려면 그 가문에 있는 빚까지 청산을 해줘야 하는데 그 금액이 너무 커서 누구도 사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페루제가 그 가문을 산 것이다.

누구도 함부로 건들 수 없을 만큼의 빚을 갚았다.

그런데 어째서 모두가 모를 수 있을까?

정확하게는 그 빚을 갚아 준 것이 아니다.

그 빚에 대한 권리를 가져온 것이다.

빚은 그대로이니 사람들에게 화제가 될 이유가 없었다.

“같은 루비로즈 가문인데 그곳의 루비로즈는 하찮기 그지없어.”

많은 빚 때문에 누구도 사지 않는 백작 가문, 그것은 세간의 인식이었다.

자신의 루비로즈와 알펜 왕국의 루비로즈는 엄연히 다른 가문임에도 기분이 나빴다.

“루비로즈는 언제나 완벽해야 해.”

“그럼요. 루비 로즈는 언제나 완벽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설마 그 가문을 누군가가 샀을 것이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칸나 백작 부인도 웃기는 사람이지요. 자기가 원해서 들인 사람을 정작 사람들에게는 숨기고 싶다니요.”

“가문의 권력을 위해 치부는 만들어야겠고 가문의 명성에 흠이 가는 것은 싫은 거지.”

백작부인을 떠올리는 페루제의 얼굴은 여전히 고고했다.

“그리 아둔하니까 돈을 쓴 보람이 있는 것이야.”

그녀는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둔하니까 자기 손바닥 안에서 춤을 추고 있지 않은가.

자기 생각이 그대로 이뤄지는 것만큼 재미가 있는 것도 없다.

* * *

그녀가 혼인이 파투가 날까 두려워서 수도로 달려왔다는 소문이 알펜 왕국의 수도에 퍼졌다.

누군가가 소문을 일부러 낸 것처럼 빨랐다.

칸나 백작부인과 알펜 왕국의 다른 귀족들이 그리 생각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말이다.

“제가 나이가 있다 보니 이리 마음을 참지 못하고 왔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아닙니다. 부인 될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제 탓이지요. 죄송합니다.”

벨로나 공작에게 혼인은 귀찮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가문을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는 그녀가 수도로 온 것이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귀찮게 결혼식 준비를 한다고 영지 분위기를 어수선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나았다.

얼른 끝내고 각자의 자리에 충실하면 되었다.

식은 정말로 작았고 빨리 끝났다.

공작의 권위를 위해 대신관이 주례를 보고 공작과 친분이 있는 소수가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 결혼식에는 단 하나도 페루제 영애의 생각이 반영되지 않았다.

그녀를 얼마나 무시하는지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심하게 있었다.

잠시의 하찮음만 참으면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다.

어차피 지금의 모욕은 나중에 갚아줄 수 있었다.

“이로써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대신관이 새로운 부부의 탄생을 알렸다.

결혼식 후 연회에서 공작은 지인들을 맞이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낯선 사람들 속에 신부를 홀로 두었다.

남편이란 작자는 어딘가로 가 버린 지 오래다.

남편의 가치는 공작 그 자신이 아니라 가문과 그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었다.

그래서 페루제는 그가 없어도 그다지 섭섭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뻘쭘하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결혼식에 참석한 부인들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집안 사정이 나아지셨나 봐요. 공작 가문에 줄 지참금을 내셨잖아요.”

“설마 빚을 내신 것은 아니죠? 듣기로는 지금도 힘들다고 하던데 말이에요.”

“어디서도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설마 지참금도 없이 오시는 건가요?”

그녀들은 사교계에서 왕성히 활동하는 부인들이었다.

루비 로즈 가문에 대해 소문을 들어봤지만, 그 가문의 실제 영애를 본 적은 없었다.

그 영애가 사교계에서 여유를 누리기에는 빚이 너무 많았다.

그들은 그 소문이 누군가의 의도로 퍼졌음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페루제 영애, 아니 페루제 공작부인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녀가 기가 죽었다고 여긴 부인들은 모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듣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부인들.”

결혼식 시작할 때부터 봤던 모습 중에서 가장 밝은 웃음을 보였다.

부인들은 순간 주춤했다.

뭔지 모를 오싹함을 느낀 것이다.

부인들은 그제야 그녀가 빚더미에 있는 가문의 영애라기에는 지나치게 우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페루제는 하찮은 파리 같은 것들이 나대는 모습이 웃겼다.

나중에 뒷감당을 어찌하려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저는 오늘의 일을 기억할 거랍니다. 가슴속에 담아두고 곱씹으며 기억할 거예요. 그러니 부인들도 오늘의 일을 잊지 마세요.”

공작부인은 그들의 인사조차 받지 않고 연회장을 나가서 신방으로 가 버렸다.

부인들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짜증을 냈다.

“뭐 저런 여자가 다 있나요?”

“그러게요. 역시 배운 거 없는 티를 낸다니까요.”

“자기가 기억을 하면 어쩌겠다고요.”

그녀들은 자신도 모르게 닭살이 돋은 팔을 만지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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