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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2화 (12/221)

012화 방심하는 신랑과 준비하는 신부

그녀는 누군가와 티타임을 가졌다.

그 상대는 오스트리 후작으로 중립적인 성향이었다.

또한 그녀의 지배하에 있는 영토 근처에 후작의 영지가 있었다.

위협이 된다면 언제든 쳐들어가서 함락할 수 있었다.

“혼인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축하드릴 일이지요.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군요.”

그가 능청스럽게 말을 하자 그녀가 입가에 대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라스타 왕국에서는 남부 끝자락인데 벨로나 공작령을 포함한 알펜의 북부와 합치니까 딱 중심지이지 않습니까? 만약 과거처럼 다시 교류하게 된다면 말이지요.”

알펜 왕국과 라스타 왕국 간의 직접 거래가 가능해진다면 그 지역은 교역의 중심지가 될 것이 뻔했다.

딱 돌아다니기 좋게 길도 편했다.

주변국을 통해서 이동할 할 필요가 없으니 교역품 가격도 내려갈 것이다.

물품을 구하는 시간도 절감된다.

사람들이 물품을 거래하기 위해 몰려들 것은 자명했다.

더불어 그 도시들의 주인인 페루제는 어마어마한 부를 손에 넣게 된다.

그 도시들은 그녀가 혼인을 추진하기 전부터 건설되고 있었다.

“이 혼인, 영애의 계획이 아닙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저는 아버지께서 주선하신 분을 받아들인 거뿐이에요.”

루비 로즈 백작이 가문에서 결정권이 전혀 없음은 라스타 왕국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녀가 백작이 하라고 해서 혼인을 할 여인이었다면 라스타 왕국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그는 눈치가 빨라서 좋았다.

바로 본론부터 훅 치고 들어오는 것도 좋았다.

대화를 나누기 수월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면 때문에 그와 만나기를 자청한 것이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영애에게 이득이 되는 듯해서 말이지요.”

“사람들 헛소문을 믿고 자꾸 이러시니 민망합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미소 지었다.

미소를 지을 만한 대화 내용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웃음을 거둔 후작은 그녀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페루제 영애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겠군요. 영애가 저를 적대하지 않는 한, 저희 가문은 결코 루비 로즈 가문을 적대하지 않겠습니다.”

자금이 많을수록 양질의 병사를 기를 수 있다.

상재에도 재능이 있던 그녀는 그를 통해 번 돈으로 군사를 양성하고 영지전을 통해 더 거대한 부를 쌓았다.

훗날 나라를 가지려고 할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쫓아내야 한다는 사명감에 빠진 사람들은 이 진실을 보지 못했다.

일단 그 도시 건설부터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 한몫했다.

세간에서는 사치의 끝판왕이라 할 만한 화려한 휴양지 건설로 알았다.

“후작 각하의 배려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후작께서 저희 가문을 위협하지 않는 한 결코 오스트리 가문을 적대하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떠나면 정치 파벌들이 가문을 해칠 것을 염려했다.

“저를 대신하여 라스타 왕국을 잘 부탁드립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게 시킬 만한 대행자를 찾아야 했는데 그 사람이 오스트리 후작이었다.

그에 대한 대가는 그녀가 후작과 적이 되지 않는 것으로 충분했다.

감정보다 실리를 우선하는 사람은 결코 아둔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 * *

알펜 왕국의 고위 귀족들은 뜬금없는 라스타 왕국의 접촉에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그것은 왕과 벨로나 공작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서로 연을 끊은 지 거의 100년이었으니까.

“무슨 의도가 있어서 갑자기 먼저 우리에게 비밀리에 연락한 것일까요? 의심해 봐야 합니다.”

“의심해야 하지. 해야 하고말고. 그런데 그들의 의도를 의심하고 싶어도 몇 가지 조항만 빼면 우리에게 나쁘지 않아.”

과거 라스타 왕국과 알펜 왕국은 하나의 나라였으나 왕자들 간의 분쟁으로 갈라졌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단교된 것은 아니었다.

나라가 둘로 나누어졌어도, 각 나라의 왕들이 사이가 나빠도 교류는 활발히 이뤄졌었다.

오히려 동맹을 맺고 주변국들을 견제하면서 합심했으니 서로 득이 되는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실리를 추구한 결과였다.

그런데 그 동맹이 100년이 좀 지나고 깨졌다.

알펜 왕국이 힘을 좀 기르고 나서인지 침략을 한 것이다.

그때 라스타 국왕은 영토를 되찾기 위해 나섰다.

당당한 참전이었지만 대패를 하고 국왕은 병에 걸려 죽어 가면서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알펜 왕국의 간악한 것들과는 상종하지 말라.’

그 유언이 발단이었다.

처음에는 일부분만 제한을 두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그것으로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 국왕은 라스타 역사상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모든 귀족과 백성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성군이었다.

그렇게 귀족과 백성의 민심을 의식하여 시작했던 일이 점점 커지면서 아예 교류가 끊어져 버렸다.

그 빼앗겼던 라스타 왕국의 영토는 벨로나 공작 가문의 영지가 되었다.

“얼마나 멍청한 일이야. 패배하고 열 받아서 죽은 왕의 유언 때문에 100년 가까이 직접 교류를 할 수 없었다니 말이야.”

왕은 그 유언을 내린 라스타 국왕이 속이 좁은 인사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서로 바로 붙어 있는 나라잖아!”

그따위 말을 유언이라고 내려서 나라 간의 교류를 아예 멈추게 했으니까.

“아니지. 상대가 그런다고 덥석 우리도 그러자고 한 여기도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야.”

선조들의 어리석음을 엿보이는 듯했다.

어느 한쪽이라도 손을 내밀었다면 100년 가까이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헬리오와 카플란 몰래 우리에게 밀서를 보내왔다는 것은 진심이라고 볼 수 있지.”

두 나라는 직접적인 교류를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각 나라에서의 수출품을 들여와야 할 때가 있었다.

그때 중개자를 맡은 것이 카플란과 헬리오였다.

제삼국의 입장으로 중개자가 되어서 얻는 이득은 어마어마했다.

만약 알펜과 라스타 왕국 간에 직접 교류가 가능하게 된다면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러니 두 나라는 알펜과 라스타 간의 화친을 막으려 할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알펜 왕국에서는 그런 골치 아픈 일이 생기지 않게 비밀리에 일을 진행하려 했다.

“저희가 보냈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이번에 마음이 바뀌었나 봅니다.”

“뭐, 봉기가 일어나면서 권력층이 바뀌었다고 들었으니까.”

개혁을 주장하며 들고 일어난 세력인 만큼 뚜렷하게 보이는 변화가 필요했다.

왕은 여인 하나를 타국으로 보내기 위해 권력층이 뭉쳤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알펜 왕국의 그 누구도 못 할 생각이다.

“예전과 같은 원망이 백성과 귀족들 사이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어서 추진할 수 있지만 뭔가 수상합니다.”

벨로나 공작 또한 계속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비밀리에 연 회담에서 라스타 왕국의 신하들이 꺼림칙한 시선을 보냈기 때문이다.

시선뿐이랴?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말을 걸기까지 했다.

회담과 관련도 없는 말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벨로나 공작 각하, 힘내십시오.”

“각하의 가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합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합니다.”

“세상에 나쁜 일도 있지만 좋은 일도 있는 법이지요.”

그러면서 무한한 호의를 보였다.

어떤 이는 초면에 어깨까지 두들겨 줬다.

라스타 왕국의 귀족들은 그가 ‘페루제 영애’의 혼인 상대임을 알았다.

공작 각하에게 힘내라고 한 것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그녀와 엄청난 싸움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고 한 것은 그 싸움은 그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희생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나쁜 일도 있지만 좋은 일도 있다고 한 것은 그녀에게 패배할 것이니까 위로 차원에서 한 말이었다.

그들의 호의는 훗날 벨로나 공작 가문에 다가올 비극에 대한 동정에서 나왔다.

벨로나 공작은 그들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했다.

소드마스터이자 왕의 측근으로 권력을 누리고 있는 그를 감히 동정할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 찜찜한 눈빛의 의미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이 회담으로 저희가 가지는 이득이 너무 큽니다.”

알펜 왕국의 이득이 라스타 왕국에서는 손실이었다.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일을 추진한다는 것은 뭔가 생각하는 바가 있다는 의미였다.

벨로나 공작의 걱정은 당연했다.

“그렇기는 해도 우리가 얻는 것이 너무 커. 포기하기에는 너무 매력적이지. 그래서 라스타 왕국에서 요청한 이해할 수 없는 조항들도 몇 가지도 받아들인 거 아닌가.”

그 이해할 수 없는 조항 중 하나가 바로 여성 영주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라스타 왕국 덕분에 알펜 왕국 최초의 여성 영주가 탄생하는군.”

남성의 전유물인 영주를 여성이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파장이 컸다.

본래라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허락하지 않기에는 얻는 것이 컸다.

라스타 왕국 일부 지역을 그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몇 가지 조항’을 해주는 대가로 알펜 왕국에 넘기기로 했으니까.

그러니 그 법이 가능하도록 요청한 사유도 타당했다.

그곳의 영주로 여인을 임명할 예정이기에 알펜 왕국에서도 여성 영주를 인정해야 넘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지역만 인정한다면 문제가 될 것은 없어 보였다.

또한, 여성이 영지 운영에 대해 배우는 경우는 없었다.

“그래도 의외였습니다. 대리인 없이 그 여성 영주 홀로 영지를 운영해야 한다는 조건을 승낙할 줄은요.”

영지 운영을 맡게 된다면 그녀가 금세 포기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얼마나 좋아? 힘들어하면서 영지에 적자를 내고 문제를 일으키면 돕는다는 명목으로 우리 사람을 보내면 될 일이지. 정말로 간단해.”

알펜의 입장에서는 라스타 왕국의 사람이 분명한 남자 영주보다 영지 운영에 대해 무지한 여성 영주가 괜찮았다.

“여인이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어. 라스타 왕국 녀석들도 제정신이 아니야.”

왕은 라스타 왕국의 어리석은 결정을 비웃었다.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한번 알아보시지요.”

“뛰어나 봤자겠지. 여인이 아닌가. 집에서 자수나 놓는 사람이 잘하면 얼마나 잘하겠어. 너무 걱정하지 말게.”

왕은 비웃음이 아닌 경계를 해야 했다.

그 여성이 영주로 삼을 만큼 뛰어나거나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뜻일 수 있었으니까.

아쉽게도 그녀는 둘 모두에 해당하였다.

벨로나 공작은 왕이 알아보지 말라고 해도 알아봐야 했다.

그녀는 알게 되어도 싸우기 힘든 상대였다.

실제로 알펜 왕국으로 넘어갈 여성 영주에 대해 알면 기겁을 할 것이다.

불운하게도 알펜 왕국 그 누구도 그녀에 대해 알아보지 않았다.

여성이라는 성별이 방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벨로나 공작도 왕도 크게 후회할 실책이었다.

* * *

벨로나 공작과 왕의 반응을 뒤로하고 말하자면 레무스의 예상이 맞았다.

부하가 보고한 소식에 입이 벌어졌다.

“정말 이대로 하자고 했다고?”

“네, 그렇습니다.”

“이야, 정말 미쳤네.”

벨로나 공작 가문의 혼사는 그 고모라는 부인이 주도했다.

“일이 쉽게 풀린 것을 자축하는 의미로 신전에 성금을 내야겠어.”

듣기로는 중매인이 처리한 가문 간의 혼인 합의문을 읽어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합의를 봤어도 부당하다고 판단이 되면 이의를 한다는 것은 머릿속에 없었던 모양이다.

“누님이 원하는 상황이 되었으니까 적어도 지금은 나를 살려두겠지.”

혼인 합의문의 수정에 대해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손해를 입더라고 파혼시켜야 함이 마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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