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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1화 (11/221)

011화 모두가 한마음이 되니까 일이 성사되었다

레무스가 아버지를 마주하며 앉았다.

확신에 찬 미소였다.

“가문도 가문이지만 시어머니가 없어요. 돌아가신 지 오래라고 합니다.”

“세상에나! 우리를 위해 준비된 가문이구나.”

루비로즈 백작이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시어머니가 없다니!

누군가에게 고개 숙이기를 싫어하는 그녀가 들으면 좋아할 소리라고 생각했다.

아니, 시어머니가 살아 있어도 상관이 없었을 수 있다.

몰래 죽이면 그뿐이니까.

“그 아이는 ‘귀찮은 과정’을 싫어하니까 정말 좋구나.”

백작의 말에 레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동의했다.

그 ‘귀찮은 과정’이란 페루제가 시어머니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렇죠. 그것 때문에 아버지를 그렇게 갈구잖아요.”

루비로즈 백작이 만든 ‘귀찮은 일’은 많았다.

가령 첫 번째 재혼을 해서 계모를 죽이게 만든 일이라든가, 두 번째 재혼으로 계모에게 누명을 씌우게 만든 일이었다.

또는, 아버지가 괜히 자신을 쳐내겠다고 나댔던 일이라던가 말이다.

레무스는 누님이 아버지니까 지금까지 살려 둔 것일 뿐 그것이 아니면 벌써 죽였다고 여겼다.

“내가 깨달은 것이 많다.”

헛기침한 백작은 질책이 담긴 눈빛을 피하며 말했다.

“뭐, 그에 대한 화풀이는 아버지가 감당할 문제니까 넘어가죠.”

끝까지 아버지에 대한 걱정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아들이었다.

“젊은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은 공작이에요.”

그 가문의 가주인 벨로나 공작은 성년이 되기 전에 부모를 잃고 공작이 되자마자 야만족 토벌을 위해 전장에 나섰다.

토벌 이후에는 당시 태자였던 현왕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수도 정치에 발을 들이밀었다.

“공작이 되자마자 야만족 토벌, 중앙 정치를 시작했죠. 영지에서 쉴 틈도 없이요.”

“그러면 내정은?”

백작은 간략한 말에도 무엇이 요점인지 알아챘다.

대부분 중앙 권력을 얻은 귀족들은 영지의 주요 업무를 수도에서 처리했다.

적어도 그들은 자기 영지에서의 권력이 탄탄했다.

어느 후계자나 자신이 그 자리를 잇게 되면 하는 일이 있다.

선대 가주가 가졌던 권력을 인계받는 것이다.

그런데 벨로나 공작은 그 인계를 받는 과정을 생략하고 수도로 입성했다.

그러면 공작에게 인계되지 않은 권력은 어디로 갔을까?

“그의 친인척들이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하더군요. 특히 공작의 고모가요.”

백작은 침을 삼켰다.

눈은 계속 희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젊은 공작이 혼인하지 않았을 리는 없지. 그러면 자식은 있고?”

“네, 전 부인이 죽고 남긴 아이가 하나 있어요.”

솔직히 백작은 죽은 공작부인의 가문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을까 했었다.

다행히도 그들은 힘이 없었다.

아니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반역으로 그 가문이 멸문되었기 때문이다.

그 충격으로 당시 임신 중이던 공작부인은 조산했고, 몸조리하는 과정에서 주었다고 한다.

“그러면 그 아이는 아버지도 없는 가문에서 멸시를 당하며 살고 있겠군.”

멸문된 가문의 아이에게 애정을 쏟아 줄 사람이었다면 내정을 공작의 고모와 그 일당이 차지하지도 않았다.

“그렇죠. 그런 아이가 사랑을 받으면 얼마나 고마워하고 따르겠습니까?”

“정말 하늘이 페루제에게 행운을 몰아주는구나.”

“맞아요. 상대를 대놓고 죽여도 될 명분까지 마련되어 있잖아요.”

가문을 멋대로 하며 후계를 죽이려고 했다.

이런 명분으로 사람 여럿 죽이기는 쉬웠다.

감히 후계를 죽이려고 함은 반역이니까.

“뭐, 우리가 죽는 것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자.”

백작은 공작 가문을 신랑 후보에서 신랑으로 확정지었다.

“아까 연막이라고 했는데 어떤 연막이니?”

“상인들에게 들어보니까 그 공작은 혼인에 관심도 없다고 하더라고요.”

공작이 자신의 혼사에 관심이 없다.

그러면 관심을 가질 인물은 그들의 친인척들뿐이다.

“게다가 공작 가문과 사돈이 되려는 집안의 영애, 영식이나 가주가 죽임을 당하는 바람에 라스타 왕국에서는 혼인하려는 사람이 없죠.”

처음에는 약혼이 성사된 영애가 죽었다.

다음에도 또 죽었다.

영애가 계속 죽었음에도 공작 가문과 혼인을 추진하는 집안은 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애뿐 아니라 가주 혹은 아들이 죽었다.

영애가 죽은 것처럼 계속 죽었다.

그 다음엔 결혼을 추진한 가문의 가주까지 죽어나가자 사람들은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죽은 공작부인의 원혼이 저주해서 그렇다고 하네요.”

그렇게 셀 수 없이 많은 혼인요청서가 사라졌다.

“걔네가 진짜 저주를 모르는구먼.”

백작의 입장에서 진짜 저주는 페루제 같은 딸을 가진 것이었다.

세상의 어느 딸이 아버지를 정신병원에 가둬 미치기 직전까지 있게 하느냐.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하는 현실이다.

레무스는 그런 백작을 짠하게 보고는 말을 이었다.

“고모라는 사람이 계속 한미한 가문의 영애들을 들이밀어도 뭐라고 하지 않던 공작이죠. 이번에도 그 고모에게 모든 것을 맡길 거예요.”

공작 가문과 격이 맞지 않는 영애들을 약혼녀라고 소개를 해도 화조차 내지 않는 멍청이였다.

소드마스터로 싸움의 고수지만 페루제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만약 누님이 공작이었다면 그딴 영애들을 추천하던 날에 피의 축제가 벌어졌을 것이다.

“그렇겠지.”

게다가 어디 믿을 사람이 없어서 가족을 믿는단 말인가!

자식 믿다가 정신병원을 갔다 왔던 백작은 공작의 아둔함을 비웃었다.

“간단해요. 알펜 왕국 법의 허점을 노리는 거죠. 알펜 왕국에서는 가문을 사고팔 수 있다고 하잖아요.”

“그 얼마나 멍청한 법인가 싶었지. 타국인도 세금만 낸다면 살 수 있다고 하니까.”

과거 라스타 왕국에서 알펜 왕국에 관한 비방 기사를 썼을 때 있던 내용으로 귀족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

알펜 왕국과 라스타 왕국은 역사적으로 최악의 관계를 자랑하고 있기에, 서로를 비방하는 일은 흔했다.

“그 사고팔 수 있는 가문 중에 ‘로즈 가문’이 없겠어요? 게다가 누님은 헬리오 왕국의 명예 귀족 작위도 있잖아요.”

과거 헬리오 왕국이 기근으로 고통받을 때 많은 식량을 기부한 대가로 받은 작위였다.

“레무스! 너의 지혜가 우리의 목숨과 가문을 살리는구나. 고맙구나.”

길고 긴 대화였지만 결국에는 사기 결혼을 시키자는 것이다.

“그러면 페루제에게 줄 보고서를 써야겠어.”

“보고서요?”

“정말 중요한 문제인데 어찌 내 말만 듣고 고개를 끄덕이냐며 그에 관해 설명해 달라고 하는구나.”

말이 설명이지, 그냥 발표하라는 것이다.

친부에게 한 말로는 적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레무스나 백작이나 그러려니 했다.

* * *

“이런 근거들로 벨로나 공작 가문이 가장 너와 어울린다는 결론이 났단다.”

열정적인 발표를 그녀는 경청했다.

듣고 나서는 곧바로 답을 줬다.

“공작 가문이라 작위가 마음에 드네요. 왕과 왕비 그리고 그 자식들만 아니면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되니까요.”

페루제의 승인이 떨어졌다.

정말 마음에 드는 가문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었다.

“가문의 역사와 가문에서 이룬 공적도 상당하고요. 역사와 공적만큼 재산도 있을 것이고 왕의 신임을 받는다고 하니 권력도 괜찮겠지요. 대대로 강병을 가진 가문으로 유명했다고 들었어요. 공작께서는 좋은 분이시네요.”

가문이 가진 것만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공작이 좋은 사람이라는 이상한 결론이 나왔다.

공작이 좋은 분이라는 말은 마치 예의상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것보다는 백작의 제안을 허락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페루제 루비로즈의 혼인 계획이 정식으로 승인되자 왕궁의 신하들은 바빠졌다.

“그분께서 원하는 것을 이뤄드려야 한다!”

“자신의 결정이 성사되지 않으면 어찌 나올지 모르는 분이야!”

“법적인 근거가 될 사례를 조사해야 해. 우리 쪽 사례뿐 아니라 알펜 왕국의 사례까지 싹 모아와!”

“얼른 세작들을 최대한 알펜 왕국으로 보내!”

온갖 국가 서류들이 멈추지 않고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반드시 그녀가 원하는 조건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해야 하네!”

“물론이지. 이번 기회가 아니면 그녀는 죽을 때까지 이 왕국에서 살 거야!”

“변심하기 전에 빨리 진행하게!”

루비로즈 가문의 반대파 세력까지도 그녀의 뜻을 이뤄 주기 위해 분주했다.

페루제 영애를 떠나보내고 싶다는 염원이 통한 것인지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페루제 영애, 그 소문이 사실인가? 아니지? 아닐 거야? 제발 계속 있어 주게나. 자네가 없으면 우리는 어쩌라고!”

“맞네. 자네가 우리를 지켜주고 있어서 그나마 안심하고 살았거늘. 제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게.”

오직 왕과 왕비만이 그녀를 붙잡으며 애원했다.

자신의 목숨이 그녀에게 달렸음을 알았으니까.

* * *

라스타 왕국의 지배층이 밤을 새우며 노력하는 것과 대조되는 곳이 있었다.

바로 알펜 왕국이었다.

“무슨 수작질을 부리려는 거지?”

“너무 호의적이고 저희에게도 좋은 조건이라 당황스럽습니다.”

“저희에게 불리한 것도 있지만 받아들일 만한 수준이고요.”

갑작스러운 호의에 알펜 왕실이 놀라 할 정도였다.

왕은 황당함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계속 그들이 제시한 조건이 적힌 서류를 읽었다.

그들은 라스타 왕국이 한 여인을 타국으로 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알펜 국왕은 라스타 왕국과 직접적 교류가 다시 시작되면 생길 왕국의 이익을 생각하느라 바빴다.

그 이득을 극대화하여 왕국을 부유하게 만들어야 했다.

* * *

루비로즈 백작은 딸에게 호출 당했다.

덤으로 레무스도 함께였다.

(일종의 사기)결혼이 추진되면서 자주 불려갔다.

그는 긴장하며 딸 앞에 섰다.

“아버지, 잘 진행되고 있나요?

“물론이지. 잘 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일이 잘 진행되고 있음에도 딸이 무서워서 손에 땀이 흘렀다.

“제가 원하는 조건으로 꼭 결혼계약서를 작성해 주셔야 해요.”

결혼계약서란 혼인 전에 부부생활을 하면서 지켜야 할 것들을 서류로 남기는 것으로 각자의 재산관리도 이에 포함되어 있었다.

결혼계약서에 자신이 원하는 내용이 단 하나라도 포함이 되지 않는다면 기존에 세웠던 계획이 상당히 어그러진다.

귀찮은 일은 아예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 좋았다.

“그럼, 그래야지!”

불가하다고 했다가는 칼이라도 던질 듯한 눈빛에 백작은 격하게 대답했다.

레무스도 이 일에 사활을 걸었다.

“아버지가 이렇게 열심히 하시는데 네가 돕지 않아서 실패하면 슬프지 않겠니?”

실패했다가는 네가 내 동생이라도 슬픈 일을 당하게 될 거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반드시 성사시키겠습니다! 누님!”

레무스는 대답하면서 성공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다행히 그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성공입니다. 공작 가문에서 미끼를 물었어요!”

“좋았어! 혼인하겠다는 집안이 없으니 금방 낚였군!”

“멍청한 놈들! 지금 어떤 사람을 집안에 들이는지도 모르네요!”

혼인요청서를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 합의를 보자는 답변을 들었을 때 백작과 함께 일을 추진하던 인사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무슨 특수임무를 성공시킨 요원 혹은 팀처럼 말이다.

백작은 자연스럽게 나오는 미소를 억누르고 말했다.

“끝까지 방심하지 말게! 이렇게 기뻐하다가 실패라도 하면… 알겠지!”

모두가 정신을 차린 듯이 표정을 굳히고는 대답했다.

“네! 긴장을 늦추지 않겠습니다!”

그들이 나름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도, 그들이 나름 고심하는 것도, 그녀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다른 아주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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