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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복하거나, 죽거나-10화 (10/221)

010화 왕국의 권력자가 되다

귀족들이 그녀에게 구걸이라도 할 기세를 뿜어대는 것과 반대로 그녀는 여유로웠다.

홀로 테라스에서 하늘을 보며 사색에 빠졌다.

“가문을 지키고 가문의 명예를 드높였지만 부족하지. 어머니가 하늘에서 걱정하지 않도록 더 든든하게 만들어야 해.”

라스타 왕국에서 최고의 가문을 만들어 낸 그녀가 내뱉은 소감이었다.

부족하다…….

만약 귀족 중에 이 말을 들은 사람이 있다면 소름이 돋았을 것이다.

마치 더 죽이고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아야 했다는 말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녀는 라스타 왕국 사교계의 여왕이자 권력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최고의 권력자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일단 처음 봉기를 한 세력과 권력을 나눈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그러나 적어도 기존 명문 귀족 중에서는 최고가 되었다.

* * *

그렇게 왕국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중에 뜬금없이 아버지를 호출했다.

“나를 불렀다며? 무슨 일이니?”

앉아서 서류를 읽던 그녀가 아버지를 올려다봤다.

침묵하며 자신을 바라만 보자 백작이 입을 떨었다.

“페루제, 혹시 내가 너를 언짢게 했니?”

백작은 허리를 굽신거리면서 딸의 눈치를 봤다.

처음에 딸에게 당당했던 백작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를 분노케 하여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만 있었다.

그는 그녀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죽임당하지 않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했다.

여러 휴양지를 돌아다니며 조용히 인생을 보냈다.

갑자기 사람을 보내서 죽일까 봐 일부러 여러 지역을 이동하며 살았다.

그녀가 눈짓하자 시종이 백작이 앉을 의자를 대령했다.

“부모와 자식 간에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이세요? 당연히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모셔 온 거죠.”

그 말에 백작은 각오를 다졌다.

‘그래. 이만하면 오래 버텼다. 죽음을 받아들이자.’라고 말이다.

친부인 자신을 반년 간 매드리아 정신병원에 보냈던 딸을 그는 믿지 않았다.

매드리아 정신병원은 제정신인 사람도 미치게 만든다는 곳이었다.

오죽하면 매드리아의 ‘매드’가 ‘미친’이란 뜻의 은어로 백성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을까.

그곳에 있는 반년 동안, 그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미칠 수 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만약 페루제가 그곳에서 자신을 빼내 주는 것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정말로 미쳐 버렸을 것이다.

정신병원에 있던 때를 떠올린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떨었다.

“이제 혼인을 생각해 볼 때인 듯싶어요.”

그녀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페루제 루비로즈는 라스타 왕국 영애 중에서 가장 노처녀였다.

그동안은 결혼하면 가문을 떠나야 한다는 것 때문에 미뤄 둔 것이지만 이제는 달랐다.

가문이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으니 굳이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노처녀라고 뒤에서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었던 것도 한몫했다.

“가문도 단단해졌고 이제는 안심이니까요.”

그녀는 혼인할 가문에게 자신이 가진 대부분을 가지고 갈 예정이었다.

오직 ‘자신의 것’으로 말이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그러냐.”

“네.”

그녀가 대답하고는 다시 서류를 봤다.

백작은 페루제가 가문에서 손을 뗀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떨떠름했다.

거짓이었으니까.

그녀의 권력은 혼인한다고 해서 흔들리지 않는다.

그냥 혼인할 가문의 권력까지 손에 쥐게 되는 것이었다.

물론 백작에게는 중요한 것이 따로 있었다.

과연 딸의 말이 진심인지 아니면 아버지인 자신을 시험하는 것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과거에도 몇 번 시험당하여 큰일을 겪었다.

친부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페루제는 친부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언제든 치울 수 있는 먼지와 같았으니까.

그가 슬쩍 의심의 눈초리로 보다가 딸과 눈이 마주칠까 얼른 시선을 피했다.

서류를 보다가 다시 시선이 자신에게 닿으면 아니 되었다.

“저도 제 나이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상대의 나이가 많아도 좋고 재혼이라고 해도 받아들이려고요. 후계자가 이미 있어도 괜찮아요.”

백작은 그녀가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몇 번 데이고 나니까 딸에 대해서 없던 눈치가 생겼다.

“그, 그러니?”

“대신에 우리 가문과 격이 맞는 집안이었으면 좋겠어요. 최소한 백작 가문 이상이어야겠죠.”

“알겠다.”

나이가 있어도 초혼인 그녀였다.

나이가 많아도, 재혼이어도, 후계자가 있어도 괜찮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양보였다.

이런 양보를 했다는 것은 그만큼 좋은 가문의 안주인이 되고 싶다는 뜻이었다.

“할 말은 다 했으니 이제 나가 보세요.”

페루제 루비로즈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상태에서 아버지를 방에서 쫓아냈다.

“그래. 얼른 나가마.”

백작은 그 축객령이 너무 좋아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딸이 부를 수 있다는 무서움에 발걸음이 빨랐다.

딸의 명령(?)에 따라 백작은 혼인할 만한 가문들을 물색했다.

그런데 어디서 소문이 난 것인가?

그녀의 혼인 상대가 될 만한 가문의 가주가 직접 백작을 찾아왔다.

“제발 우리 가문은 빼 주십시오.”

제안을 받은 가문들이 애원하며 제발 그녀의 혼인 후보에 자신의 가문을 넣지 말아 달라고 했다.

모두가 어찌 그리도 한결같은지… 백작만 보며 무릎부터 꿇고 다리를 잡았다.

“어허!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괜찮다고 했네. 이런 혼처는 어디에도 없어.”

“그러면 뭐 합니까? 의문사 당할 것이 뻔한데요.”

나이가 많은 신랑 후보들은 자신이 그녀의 첫 번째 의붓어머니처럼 될까 봐 두려워했다.

그녀처럼 점점 아파지다가 중국에 가문의 주요 업무를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여겼다.

사실은 첫 번째 의붓어머니를 성심성의껏 모신 것이 아니라 독살한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때는 적어도 조심하며 일을 벌였겠지만, 이제는 그것을 무마할 힘을 가졌다.

독살사건이 일어나도 조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끝날 것이다.

“재혼이라도 괜찮다고 했네. 이렇게 재혼도 넓은 마음으로 받아 주는 여인이 어디에 있나? 게다가 후계자가 있어도 좋다고 하지 않나?”

“그 후계자가 자기 입맛에 맞지 않으면요? 그녀 성격에 가만히 있겠습니까? 아니,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요?”

나이는 적당했으나 재혼인 후보들은 걱정했다.

자식과 자신의 안위를 말이다.

둘째 의붓어머니를 누명 씌어 죽였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자신에게 방해가 된다는 생각이 든다면 언제라도 남편과 의붓아들을 죽일 여인이었다.

페루제가 정해 준 기한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마땅한 후보가 없었다.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쉬운 줄 알았던 일이 난관에 부딪혔다.

백작은 불안했다.

덩달아 그 아들도 불안했다.

그들은 같은 방에서 서로를 마주하며 떨었다.

“젠장, 이래서 눈치 빠른 것들이 싫다니까. 내 딸이 언제든 자기들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선수를 치다니! 나는 어쩌라고! 자기네들 목숨 좀 버려서 한 사람 살리는 것이 뭐 그리 어렵다고!”

쓰레기다운 발언이다.

젊을 적 쓰레기는 늙어서도 쓰레기였다.

그 말을 듣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삿대질하면서 소리쳤다.

“아버지, 뭐 하시는 겁니까? 이리 홀로 혼잣말할 때가 아니라고요! 이러다가 누님이 분노라도 하면요? 저에게도 그 화가 미치면요.”

친부에 대한 걱정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레무스는 조급함을 감추지 않았다.

누님의 변덕은 자신도 예측할 수 없었다.

가만히 있다가 괜히 아버지랑 같이 세상을 하직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웠다.

“고얀 놈! 아버지를 걱정하지는 못할망정 너 살길만 찾으려고 하는구나!”

레무스가 자신을 걱정할 것이라는 기대는 오래전에 버렸기에 백작은 말 한마디만 하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페루제가 준 차로 인해 미쳤던 아버지가 제정신으로 돌아오자 충고 하나 던지고 가 버렸으니까.

그 충고에는 아버지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얼른 생각해 보세요! 이러다가 타국에서라도 구해야 할 판국이라고요!”

레무스의 입에서 격하게 헛소리가 나왔다.

그 막말에서 백작은 이 일을 타개할 방도를 찾았다.

“그래! 그거야! 그거면 가능하지!”

“그거요? 무슨 소리세요?”

“타국의 귀족과 혼인하면 되지 않겠느냐!”

라스타 왕국에서 배우자를 찾는 것은 포기하고 타국으로 눈을 돌리기로 했다.

“주변국인 헬리오와 카플란의 고위 귀족들 사이에서는 그 악명이 자자한데 가능하겠어요.”

레무스는 허튼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들도 자기 목숨이 귀한 줄 알면 누님과 혼인할 리 없었다.

“아니야. 가능해! 알펜 왕국이 있잖니!”

알펜 왕국.

라스타 왕국의 북쪽에 있는 왕국이었다.

알펜 왕국은 라스타 왕국과 단교되어 있었다.

그래서 각 국가의 물품을 수출, 수입할 때에는 주변국인 헬리오와 카플란을 통해서 했다.

수입과 수출조차 제삼국을 통해서는 하는 실정이다.

서로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것은 당연했다.

즉, 고위귀족이라고 해도 그녀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알펜과 단교되어 있어도 바보가 아닌데 그녀에 대해 모르지는 않겠죠.”

그 말에 백작은 시무룩해져서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곧 희망찬 말을 듣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버지 말씀도 일리가 있어요.”

“그렇지.”

“단, 누님에 대해 조금만 연막을 쳐야겠죠. 마침 딱 적당한 가문이 떠올랐어요.”

“연막이라고?”

레무스는 헬리오의 상인들에게 들었던 가문에 대해 떠올렸다.

“알펜 왕국에 공작 가문이 하나 있거든.”

“공작 가문이 있는데?”

“오랫동안 신붓감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돈도 많고 힘도 있는 가문에서?”

“그러니까, 거기에는 심상치 않은 이유가 있다는 거지.”

“이유? 그게 뭔데?”

무려 알펜 왕국의 공작 가문에 대한 것이었다.

누님이 찾는 높은 가문이다.

아들이 주는 희망찬 메시지에 백작은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냈다.

“알펜 왕국에 벨로나 공작 가문이라고 있어요.”

“공작 가문? 페루제와 어울리는 가문이구나!”

어떤 가문인지 자세히 듣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이미 마음속에는 신랑 후보 가문이었다.

“그렇죠? 저희 남부 바로 아래에 있으니까 거리도 좋죠. 라스타 왕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우면 누님이 가겠습니까? 천운이죠.”

벨로나 공작 가문의 영지는 알펜 왕국의 북부로 남부와 맞닿아 있었다.

레무스는 타국이라도 자국과 접근하기 쉽다는 것을 높게 평가했다.

자신들이 원해도 그녀가 거절하면 답이 없었다.

괜히 짜증이라도 나게 했다가는 무슨 일이 터질지 몰랐다.

“단교가 되어 있는데?”

“그거야, 다른 정치 파벌의 수장들에게 말하면 금방 해결되는 일이죠. 왕과 그 일가를 제외하고는 춤을 출 거예요.”

나라 간에 외교가 단절되어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를 떠나보내기 위해서라면 모두 힘을 합쳐서 단절된 것을 억지로라도 붙여놓을 테니까.

페루제 루비로즈의 사람들은 당연히 그녀의 뜻을 따를 것이니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그만큼 그녀는 그들에게 위협적이었다.

페루제 영애가 떠나는 것을 반대할 사람들은 왕과 그 일가뿐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목이 잘렸을 것이다.

지금도 그들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이 있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없어진다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공포에 잠들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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