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화 가문을 장악하다 (1)
“감히 아버지를 밟고 올라서려고 해?! 어림도 없지!”
백작이 본연의 업무를 하겠다며 그동안 받지 못했던 서류들을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이는 난관에 부딪혔다.
그가 책상을 두 주먹으로 내리치며 분노를 표출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분통이 터졌다.
“내 몸 상태를 핑계로 그러는 것도 치가 떨리는데 가신들까지!”
페루제가 아직 몸이 쾌차한 것이 아니니까 천천히 업무를 늘리자고 한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는 가신들을 불러 모아서 가신 회의를 열었다.
가신 회의란 영주와 가신이 한데 모여 영지의 전반적인 일을 논의하는 회의였다.
이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느냐와 없느냐에 따라서 가신이 가진 영향력을 알 수 있었다.
“다 같이 한통속으로 나를 아직도 미친 늙은이 취급을 해?!”
가신들은 백작에게 천천히 업무를 늘리라고 청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마치 이미 입을 맞춘 것처럼 보였다.
“가신들의 상당수가 내가 처음 보거나 예전에 말단직을 하던 놈들이었어.”
백작을 따르던 가신들이 가신 회의에 없다는 것은 그들이 영지 내에 힘을 잃었다는 뜻이었다.
“내 팔다리를 자르겠다고? 나를 아주 허수아비로 만들려고 했군!”
그러나 그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영주의 권한으로 가신 회의에 참석할 가신들을 바꾸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 * *
“아버지, 제발 가만히 있으세요.”
“뭐?”
막내아들인 레무스가 찾아왔다.
그가 아버지를 보자마자 뱉은 말은 쾌차한 백작에게 할 말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문에 기대서 팔짱을 낀 모습은 아버지를 반가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아버지를 반가워하기는커녕 주변을 경계하며 두려워했다.
그 눈빛에는 왜 정신을 차려서 이런 상황을 만드느냐는 원망도 담겨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말란 말입니다. 누님이 저까지 엮어서 아버지와 함께 죽여 버리면 저는 평생 원망할 것이에요.”
“어찌 그런 유약한 말을 하는 것이야! 가문의 후계자가 자기 자리를 찾을 생각을 해야지!”
아들이 가문의 후계자로 권위를 세울 생각조차 하지 않음에 백작은 실망이 컸다.
“그거야. 누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 모르시니까 하실 수 있는 말씀이죠.”
그런 백작의 마음을 눈치를 챈 레무스가 비웃었다.
백작은 몰랐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페루제는 언제나 순종적이고 아버지를 생각하여 계모까지 환영해 주는 완벽한 딸이었으니까.
반면에 레무스는 알았다.
누님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말이다.
페루제는 첫 번째 새어머니를 향해 언제나 상냥하게 웃었다.
어머니로 대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아팠을 때는 최선을 다해서 병간호했다.
그래서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선량한 페루제라고 누님을 생각했다.
선량한 페루제는 그에게 가장 좋은 누님이었다.
첫 번째 새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나는 날, 자신에게 하던 귓속말만 아니라면 끝까지 그리 믿었을 것이다.
‘정말 속이 시원하구나. 내정을 장악하기 위해 천천히 죽이는데 얼마나 속이 탔는지 몰라.’
그 말을 하면서 자신에게 보인 찰나의 웃음은 결코 잊혀지지 않았다.
누님이 진심으로 행복하면 보이는 웃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니까.
‘나는 네가 건강했으면 좋겠구나. 어머니처럼 되지 않도록 기도하마.’
곧 동생을 걱정하는 누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슬프게도 올곧이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이 너도 어머니처럼 만들 수 있다는 의미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의 13살 겨울에 있던 일이었다.
“누님은 가치가 없는 것을 싫어해요. 살아 있는 사람이든 죽어 있는 사람이든요.”
레무스는 방을 나가며 떠올렸다.
두 번째 계모가 외간 사내와 사통하다가 걸린 일, 형님들이 죽은 일.
증거는 없지만, 그는 누님이 했다고 확신했다.
겉으로는 모른 척했다.
계모야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아무리 행실이 나빠도 형제였다.
어머니가 같은 형제였다.
그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누님이 티타임에서 말했다.
찻잔을 들면서 말했다.
‘가문을 지켜라. 어머니께서 나에게 남긴 유언이란다. 그러니 가문에 해악이 된다면 잘라야 해. 너도 그리해야 한다.’
자신의 본분을 하고 있다는 당당함에 그는 깨달았다.
‘가문에 해를 끼치는 존재’라고 여기면 그 누구라도 처리를 하겠구나.
설령 가족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너도 그리해야 한다.’라는 말은 너도 형제들처럼 될 수 있다는 말임도 알았다.
그가 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누님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는 것도 그 자신의 몫이었다.
첫 번째 계모가 죽은 후 후계자로 능력을 선보이겠다는 생각은 사라졌지만, 더욱 마음을 다잡았다.
절대로 누님을 ‘가문의 명성과 부’와 관련하여 화나게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레무스는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 단정하게 살았다.
귀족 가문 자제들과 어울릴 때에도 조심에 조심을 더했다.
“사내라면 무릇 여인의 품을 알아야지 않겠는가?”
“성서에 따르면 여인은 아내만으로 충분하다고 되어 있네. 나는 괜찮으니 그대들만 가게.”
남들이 호기심에 가 본다는 창관도 가지 않았다.
루비 로즈 가문의 가풍이 그를 올바르게 만들었다는 말을 듣기 위해.
가문을 위해 아카데미에서도 상위권의 성적을 받았다.
“역시 자네야. 또 상위권이군.”
“교수가 될 것도 아닌데 좀 쉬엄쉬엄하게.”
“아닐세. 누님이 가문을 위해서 힘내시지 않는가. 나는 공부라도 해야지.”
루비 로즈 가문에서 후계자 교육을 잘 했다는 말을 듣기 위해 사교계에서도 활발히 움직이며 이미지를 좋게 했다.
“어쩜, 이렇게 품행이 좋으세요?”
“누님께서 저와 가문을 위해서 고생을 하셨습니다.”
“루비로즈 영애가 참 동생을 잘 길렀어요.”
루비 로즈 가문의 후계자는 인성, 지성, 사교성까지 부족한 것이 없다는 말을 듣기 위해 모든 것은 가문을 위해서였다.
그는 가문을 드높이기 위한 수단이다.
그 결과, 라스타 왕국에서는 딸 가진 집안에서 가장 원하는 사윗감으로 정평이 나게 되었다.
거짓된 유명세였다.
그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는 가문의 후계자이지만 누님의 살아 있는 인형이었으니까.
레무스가 그렇게 자신의 위치를 이해하고 복종하며 살고 있을 때, 백작은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아들의 경고가 전혀 먹히지 않은 것이다.
슬픈 일이었다.
“아돌프 단장이 아직 기사단을 맡고 있지. 그 아이가 곁을 지키는 바람에 저번에 만났을 때는 말을 제대로 나누지 못했어.”
기사단 단장인 아돌프는 그의 가장 최측근이다.
그가 단장을 맡고 있음은 아직 군권이 페루제에게 넘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제 시종과 하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어.”
쾌차 후 첫 만남을 뒤로 하고 그가 몰래 단장을 불렀었다.
그런데 단장은 오지 않았다.
대신에 페루제가 자신을 찾아왔었다.
‘아버지, 밤중에 흉흉한 꿈을 꿨답니다. 걱정이 되어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악몽에 아버지가 걱정되어 달려왔다고 하기에는 단정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걱정하는 척하는 딸이 가증스러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문에서 백작보다 백작의 딸이 우선시된다는 것이다.
가문의 고용인들은 백작이 아닌 페루제를 주인으로 생각했다.
그는 밤 몰래 홀로 저택을 나섰다.
아돌프는 우직했다.
그리고 열정적이었다.
매일 야근을 자청할 정도였다.
그는 단장의 집무실로 향했다.
“백작 각하, 이 늦은 시간에 어인 일이시옵니까?”
“아돌프, 나를 도와다오.”
그는 자신의 충신에게 페루제가 저지른 만행을 알렸다.
아돌프는 분개했다.
“간악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주군, 저에게 당장 명을 내려 주십시오! 이 간악한 여인과 그 추종자들을 처리하겠습니다.”
“흥분하는 자네의 마음은 알지만 참아 주게. 기사 중에도 배신자가 있을 거야.”
가슴이 아프지만 고용인까지 완벽하게 장악한 그녀가 기사단에 손을 대지 않았을 리 없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다.
“자네가 가장 믿을 만한 기사들로만 모으게. 가까운 시일에 신속하게 움직여야 하니 최대한 빨리.”
“알겠습니다!”
백작이 바라던 가문의 기강을 바로잡을 날이 도래했다.
늦은 밤, 그는 딸을 불렀다.
상복을 떠올리게 하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아버지 이 시간에 어찌 부르셨나요? 그것도 기사들까지 여기에 있네요.”
방에 있는 기사들은 그녀가 오자 그녀를 둘러싸고 검을 겨눴다.
검이 목을 향하고 있지만,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이죠?”
검들이 자신의 목을 향하고 있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크게 눈을 뜨며 물었다.
백작이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손가락으로 딸을 가리키는 태도에서 승리자의 오만함이 엿보였다.
“아버지에게 독을 먹여 혼미하게 만들고 가문을 좌지우지한 죄를 지었다. 슬프지만 가문을 위해 너를 죽이겠다.”
가문을 가지려고 아버지에게 패륜을 저질렀다.
그 죄에 대한 벌로 그녀를 죽이고 나머지 잔당도 처리할 것이다.
“아버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녀는 슬퍼하는 표정을 지었다.
백작은 그것을 후회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 예상은 벗어났다.
“제가 레무스와 아버지의 만남을 허락한 이유를 모르시겠습니까?”
“허락? 아버지와 자식이 만나는데 어찌 네년의 허락이 필요하단 말이냐!”
“그 아이의 충고를 듣고도 정녕 그리 생각하십니까?”
“그래!”
그 대답을 듣고 그녀의 표정이 지워졌다.
감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인간이 인간처럼 보이지 않아서 백작은 흠칫했다.
그것이 페루제라는 사람의 본모습이었다.
“기회를 드렸는데 그것을 버린 것은 아버지입니다.”
그녀가 몸을 돌려서 방을 나가려고 하자 그녀에게 향해 있던 검들이 갑자기 백작에게 돌려졌다.
아까와 반대가 된 것이다.
그녀는 이미 기사단을 장악했었다.
백작은 그녀의 손바닥에서 놀아난 것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
“모셔라.”
“네 이놈들! 이거 놔라! 놓으란 말이다! 설마 아돌프가 배신한 것이냐!”
그녀가 백작의 악 받친 소리에 몸을 돌려서 말했다.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하나 말씀드릴게요. 아돌프는 아버지에게는 충신이었어요. 가문에도요. 그의 죽음이 가문을 지켜 내게 해 줄 것이니까요.”
“뭐? 네 이년!”
그녀는 백작의 발악에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얼마 뒤에 아프신 백작 각하를 이용해 가문을 위협한 역도들의 무리 중 일부를 토벌했다는 소식이 라스타 왕국에 퍼져 나갔다.
곧 그 잔당들도 처리했다는 말이 들렸다.
백작이 움직이기 전에 이미 비밀리에 그들을 죽일 군대를 보내 놓았다.
급작스러운 습격이었다.
“역도들이다! 한 놈도 남기지 말아라!”
“네!”
루비 로즈 백작의 측근들은 한꺼번에 죽임을 당했다.
숙청의 칼은 어른, 아이, 여성, 남성, 고용인을 가리지 않았다.
소문에 따르면 갓난아기도 죽였다고 한다.
“살려 주십시오!”
“억울합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희는 모르는 일입니다!”
죽임을 당하면서 지른 비명이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 정도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를 위해서 아버지가 정신이 돌아온 것을 그대로 둔 것이고 아돌프를 가만히 기사단 단장 자리에 있도록 한 것이었음을 그제야 백작은 알게 되었다.
아름답고 정숙한 영애.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아직 성인이 아닌 동생을 지킨 영애. (남성은 20살이, 여성은 18살이 성인이었다.)
동생과 가문을 위해 혼인을 못 하고 있던 영애, 계모조차 받아들이는 선량한 영애.
그렇게 불린 페루제는 25살에 가문을 완전히 장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