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7화 (7/221)

007화 아버지는 자기 위치를 몰랐다

백작과 침대에 같이 누워 있던 계모는 아양을 떨었다.

“성인이 된 지 한참 지났는데 어서 혼처를 구해야지요.”

“물론 그래야겠지. 페루제가 내정 업무를 다 인수인계하면 그때 찾아보지.”

두 번째 백작 부인은 첫 번째 계모와 달랐다.

성인이 된 의붓딸을 처리하기 원했다.

그다음에는 의붓아들들에게 하자를 만들어서 훗날 생길 자신의 소생이 백작이 되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페루제를 괴롭혔다.

지금처럼 은근슬쩍 다리를 차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자신에게 당하면서도 아버지에게 이르지 않는 페루제가 만만하게 보였다.

“너무 인수인계를 느리게 하는 거 아니니? 너 혼인하기 싫어서 일부러 그러는 거야?”

“아니에요. 제가 무엇이든 느려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주세요.”

그녀는 언제나 저자세로 의붓어머니를 대했다.

자기 또래임에도 한결같은 태도였다.

인수인계가 끝날 때쯤에 큰일이 벌어졌다.

영지 시찰에서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백작이 다른 사내와 침실에서 누워 있는 백작 부인을 본 것이었다.

그 사내는 백작 부인이 백작을 만나기 전에 사귀었던 사람이었다.

“이런 못된 것들! 감히 나를 기만해!”

“아니에요! 오해예요! 믿어 주세요!”

그녀가 이불로 자기 몸을 가리며 백작의 다리를 잡았다.

낯짝도 두껍게 나체로 둘이 누워 있었음에도 억울함을 주장했다.

그 누구도 믿지 않을 말이었다.

“눈을 떠 보니 이 남자가 있었다고요. 저는 절대로 바람피우지 않았어요.”

“용서를 구하지는 못할망정 감히 끝까지 거짓을 말해?!”

티가 나지 않게 바람을 피우는 것은 암묵적으로 묵인해도 이렇게 대놓고 피우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날 이후, 그녀와 그 사내는 한겨울에 두들겨 맞고 눈 속에 버려져서 얼어 죽었다.

사람들은 어린 여인을 부인으로 들인 백작의 하찮은 안목을 비웃었다.

반면에 그런 부도덕한 여인의 어머니로 모시며 힘들어했을 페루제를 가엾게 여겼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 밤에 그녀와 페루제가 같이 차를 마셨음을 아는 사람은 오직 페루제의 사람들뿐이었다.

그 해에 장남과 차남이 차례로 죽음을 맞이했다.

평소 백작을 닮아서 여인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장남이 창부와 관계를 맺는 것은 일상이었다.

“헉헉헉! 역시 최고의 창부군. 앞으로 자주 오지.”

“저야 너무 좋죠. 대신 돈 많이 챙겨 와야 해요.”

“물론이지, 억! 억! 헉!”

“이봐요! 갑자기 왜 이래? 괜찮아요?!”

창부와 관계를 하던 도중에 심장마비가 와서 죽었다.

차남은 도박에 미쳐 있었다.

거의 도박장에서 살았다.

그러던 중에 참으로 운이 좋은 날이 왔다.

평소에 잃기만 하던 것이 무색하게 하는 족족 돈을 땄으니까.

“너! 속임수를 쓴 거지?! 맞지!”

“무슨 헛소리야! 네가 운이 나빠서 잃은 것을 누구 탓으로 돌려!”

“이 개자식!”

“으악!”

계속된 차남의 승리를 의심하던 작자가 시비를 걸었고 결국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

루비 로즈 가문에 찾아온 비극들은 페루제를 불쌍하게 만들며 돋보이게 해줬다.

비극의 해가 지나고도 페루제는 한결같았다.

“여기 제가 기르는 나무에서 따온 차를 가져왔어요.”

“아버지를 위해 직접 나무를 기르는 딸은 너뿐일 거다. 너를 따라하는 영애들이 늘었다지만 너처럼 직접 하지는 않지.”

“저야말로 언제나 좋아해 주셔서 감사하죠.”

매일 같이 정성 들인 차를 들고 백작을 찾았다.

다정함이 가득한 얼굴로 말이다.

어느 날, 백작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가 자신이 쥐고 있는 서류를 향해 시선을 뒀다.

“뭐지? 원래 서류가 이렇게 적었나? 아닌데?”

기존에 자신이 하던 업무가 확 줄어들었다.

예전과 비교하면 거의 1/10 수준이었다.

“업무량이 이렇게 줄었는데 그동안 어떻게 모를 수 있었지!?”

그는 서류를 차근차근 다시 읽어봤다.

그는 눈이 주먹만 하게 커졌다.

“게다가 백작으로 해야 하는 중요 업무는 하나도 없잖아! 집사를 불러라!”

다급하게 집사를 불렀다.

집사는 집안 내부의 일을 소상히 알고 있는 총괄자였다.

지금 어떤 상황인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인사였다.

불안해하며 집사를 기다리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뒷짐을 지고 왔다, 갔다 하던 백작이 멈췄다.

“들어오라!”

허락이 떨어지자 집사가 들어왔다.

백작은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자신이 백작이 된 이래로 곁을 지키던 집사가 아니었다.

당혹스러웠다.

“제임스는 어디에 있고 그대가 들어오는가?”

“백작 각하, 제임스님은 노환으로 인해 은퇴하시고 제가 하게 되었습니다.

집사는 담담하게 전임 집사에 대해 말했다.

“노환이라니! 나조차 이렇게 정정한데 제임스가 노환이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 당장 그를 불러오너라!”

“죄송합니다. 그리할 수 없습니다.”

집사는 과하게 비굴하지도 과하게 오만하지 않은 자세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귀족 가문의 주인인 백작의 명령을 어겼다.

그러나 불복했다는 사실에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놈! 집안 꼴이 말이 아니구나. 감히 네놈 따위가 내 명을 무시해!”

백작은 눈앞에서 그가 보인 태도에 소리를 치며 난리를 쳤다.

책상 위에 있던 물품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집사는 그가 던진 잉크로 옷이 더러워졌다.

그런데 그가 이리 난리를 치면 사람들이 오고도 남았을 텐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어찌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이야! 내가 이리도 분노하거늘!”

그가 소리를 치르고 있는데 누군가가 들어왔다.

페루제였다.

“아버지!”

그녀는 소리를 치는 그를 보자마자 달려오며 안겼다.

그녀는 울고 있기까지 했다.

딸이 눈물까지 흘리며 자신을 안자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버지, 정신이 돌아오셨군요. 동생을 불러와야겠어요.”

“정신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오열하던 그녀가 진정이 되자 그들은 소파에 앉았다.

딸에게 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그나마 집무실에서 간단한 업무를 하실 때나 방에 계실 때는 해괴한 행동들을 하지 않아서 업무를 드리고 있었어요.”

“내가 정신을 놓았다는 말이냐! 어디서 그런 막말을 하고 있어!”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아버지의 손목을 페루제가 잡았다.

“아버지, 얼마 전 일은 기억이 나시나요? 얼마 전에 왕실 파티에 갔던 일이요.”

“왕실 파티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동공이 흔들렸다.

자신에게는 왕실 파티에 갔던 기억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가겠다며 자해를 해서 같이 참석을 했었다고 한다.

“제 나이는 아시나요? 저 이제 25살이에요.”

“뭐? 25살?”

그가 아는 딸의 나이는 21살이었다.

셋째 부인이 외도로 쫓겨나서 죽은 년도였다.

“아버지! 조심하세요.”

충격에 일어났던 몸이 휘청거렸다.

그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미쳐 버릴 거 같았다.

그런 그를 부축하려고 페루제가 일어나서 그의 어깨를 잡았다.

“놀라신 거 같으니까 우선 쉬시고 다시 이야기 나눠요. 그때 동생도 데려올게요.”

그녀는 백작을 침실로 모시고 누운 모습까지 챙긴 뒤에야 안심한 표정으로 아버지 곁을 떠났다.

그는 누워 있다가 참지 못하고 종이를 꺼내어 자신이 기억하는 것을 최대한 써 내려갔다.

떠올리려고 집중을 하니 낯선 기억들이 머리에 들어왔다.

천천히 생각했다.

그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

이유도 없었고 급작스러웠다.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음에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병이 한순간에 낫는다고?

그것은 부자연스러웠다.

백작은 그 부자연스러움의 원인에 대해 생각했다.

스스로 머리를 때리며 소리쳤다.

“멍청아! 얼른 알아내! 알아내란 말이야!”

그렇게 소리치며 머리를 때리는데 갑자기 번쩍했다.

“차?”

매일 딸이 주던 차.

애정을 담았다며 주던 차.

우연히 그날은 차를 마시지 않았다.

딸이 슬퍼하는 것을 염려하여 방에 있던 식물에 줬던 것이다.

그렇게 하면 말이 되었다.

그러면 자신이 왜 이상해졌는지 말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맹점이 있었다.

하루 마시지 않았다고 효과가 떨어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것도 매일 마시던 차를 말이다.

어쩌면 차에 독을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수 있었다.

심증뿐이지만 그는 눈을 빛내며 확신했다.

백작이 나름대로 결론을 냈을 때, 페루제는 복도를 우아하게 걷고 있었다.

페루제는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차를 마시지 않은 날이 있었나 봐.”

“상정하지 않았던 상황이군요. 그 차는 같은 행동을 반복하게 하니까요.”

그랬다.

그 차는 마시면 마실수록 기억이 혼미해지고 반복하는 행동이 많아지는 효과가 있었다.

“그래. 평소와 달랐던 그 행동까지 반복하게 되었겠지. 그러면서 점점 효과가 떨어졌을 거야.”

시녀로 보였으나 평범하지 않았다.

가면을 쓰고 다녔다.

그 가면은 눈과 코와 입만 뚫려 있었다.

“이 저택에서는 굳이 가면을 쓸 필요가 없어.”

그 시녀는 사람들이 절로 얼굴을 찌푸리며 침을 뱉을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나의 사람이야. 그 누구도 너를 손가락질하지 못하도록 할 테니까.”

그녀는 아가씨를 모시기에 적합하지 않은 외모임을 알고 스스로 얼굴을 감췄다.

“아가씨, 제발 가면을 벗으라는 말은 하지 말아 주세요.”

그녀는 추한 외모 때문에 몸조차 팔지 못했다.

사람들은 악마가 깃든 여인이라고 모욕하고 조롱하고 수치를 줬다.

하던 일도 얼굴 때문에 구토가 나와서 할 수가 없다며 쫓겨나서 종국에는 끊기고 말았다.

그렇게 굶주리며 홀로 죽어갈 줄 알았다.

그런 그녀를 구해 준 페루제는 그녀에게 은인이자 신이었다.

그들은 동갑으로 15살 때에 만났다.

“저는 아가씨에게 누구보다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기품과 지성을 지닌 아가씨에게 제 외모는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녀는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수 있었다.

그 각오가 느껴졌는지 페루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언제라도 벗고 싶으면 벗어다오. 실리.”

“알겠습니다.”

‘실리’라는 시녀는 절대로 그럴 리 없었다.

페루제 루비로즈는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런데도 그녀를 위해 말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아가씨께서 직접 기르신 나뭇잎으로 만든 차인데 아쉽습니다. 조금만 더 마셔 줬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이제 와 정신을 차려도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냐? 세상 사람들은 이미 아버지를 미친 백작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야.”

“그건 그렇습니다.”

그들은 기척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조용하게 걸었다.

정신을 차린 그 날부터 백작은 차를 몰래 화분에 쏟아 부었다.

그런 아버지의 행동을 알았지만, 그녀는 묵인했다.

“역시 페루제가 준 차가 원인이었어. 고얀 것! 이런 패륜을 저지르다니!”

차를 마시지 않는 날이 늘어날수록 정신이 또렷해졌다.

페루제는 자식 중에서 가장 총애했던 아이였기에 그 분노는 컸다.

마시는 것을 중단하면 자연스럽게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할 수 있는 위안거리였다.

만약 해독제가 필요한 것이었다면 그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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