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6화 (6/221)

006화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2)

소녀가 14살이 되었다.

백작 부인은 자주 감기에 걸렸고 두통에 시달렸다.

결국 간단한 내정 업무를 의붓딸에게 넘겼다.

오늘도 백작 부인은 두통 때문에 침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페루제는 시간을 내어 그런 그녀의 말 상대가 되어 주었다.

“페루제, 네가 저번에 걱정된다며 줬던 차를 다시 줄 수 있겠니?”

“저번의 그 꽃차를요?”

“그래. 그 차를 먹고는 한동안 두통이 나아졌단다. 고맙다.”

페루제가 준 꽃차의 꽃은 동쪽의 대국에서만 들이는 차였다.

그것을 구하려면 몇 달이나 걸렸으며 구해도 소량이었다.

운이 좋게도 그녀의 취미가 구하기 힘든 식물을 기르는 것이었기에 그 꽃차를 마실 수 있는 것이다.

“아니에요. 그런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자식의 도리를 하는 건데요.”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녀가 말했다.

진심이 담겨 있었다.

“제가 기르고 있던 꽃으로 만든 차가 효과가 있어서 하늘에 감사할 따름이에요.”

“고맙구나.”

그들의 사이는 돈독해졌다.

* * *

그녀는 밖으로 나와서 방앗간에 갔다.

가문에서 직접 관리하는 방앗간이었다.

그곳의 주인이 허리를 굽신대며 페루제에게 다가갔다.

“아이고, 아가씨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왔네.”

그녀는 방앗간 주인에 우아하면서 예의 있는 말투로 말했다.

그를 존중해 주고 있음이 느껴졌다.

“물론 은밀히 해야 할 일이네.”

그 말에 그가 침을 삼켰다.

귀족이 은밀하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중에 목숨이 위험하지 않은 일은 없다.

이는 경험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었다.

귀족들은 자기가 위험해지면 꼬리 자르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족속들이었으니까.

“그 일이 무엇입니까?”

“내가 주는 돈으로 빵을 만들어 주게.”

페루제가 돈주머니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간단한 내정 업무를 맡으면서 빼돌린 자금 중 일부였다.

그녀는 이 자금을 더 큰 자금으로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그것은 아버지도, 새어머니도, 형제들도 몰라야 할 비자금이다.

“빵을요?”

“그래. 그리고 상인 하나를 포섭해서 그 빵들을 팔아 주게.”

“영지 내에요?”

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영지 내의 빵들은 수급이 잘 되고 있었다.

이미 그 빵을 파는 상인들도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 굳이 상인 하나를 포섭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주변에 가뭄이든 영주의 수탈이든 먹을 것이 부족한 곳에 말이야. 최대한 비싸게.”

비자금을 만들려고 하는데 준 돈이다.

당연히 만든 빵을 비싸게 팔 수 있는 곳에 팔아야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지 않겠는가.

당연한 상식인데 왜 생각을 못하는지 모를 일이다.

“영주님의 방앗간은 오직 영지민들을 위한 빵을 만드는 곳입니다. 만약 걸리기라도 하면 저는 죽은 목숨입니다.”

영주의 방앗간은 영지 내의 하층민들을 위해 운영된다.

제대로 된 빵을 구할 수 없는 하층민들에게 비록 품질은 떨어지더라도 싼 가격에 제공하는 것이다.

돈이 된다면 절대로 선택하지 않을 빵이지만 아주 싼 가격에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비밀리에 해야지. 그 일이 잘되면 자네도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야.”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결정이 빨라서 좋군.”

그녀는 방앗간 주인과 결탁하여 거금을 손에 쥐었다.

그 자금은 영지 업무 및 내정 업무와 관련된 인물들의 포섭에 유용하게 쓰인다.

* * *

소녀가 15살이 되었다.

“콜록, 콜록, 페루제… 콜록, 그 꽃차를 다오.”

“어머니, 다른 차도 드셔 보세요. 너무 한 가지만 마시지 마시고요.”

“나는 콜록, 그… 꽃차가 콜록, 가장 좋단다. 가져와 주렴. 콜록.”

“알겠어요. 지금 당장 가져올게요.”

매일 기침과 두통에 시달렸고 심지어 불면증이 생겼다.

일하는 데 실수가 늘어났다.

백작 부인이 처리한 업무를 의붓딸이 검수했다.

“네 덕분에, 뒤에서, 콜록, 안주인 역할을 못한다는, 콜록, 뒷말을 면하게 되었구나. 콜록, 고맙다. 콜록…….”

“아니에요. 딸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걸요.”

* * *

백작 부인이 자신에게 업무 검수를 맡기자 그녀는 신이 났다.

“이제 한결 편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겠어.”

그녀는 자신에게 필요한 비자금을 더 편히 챙길 수 있었다.

자신이 검수하고 난 뒤에 백작 부인이 따로 확인하지 않았으니까.

“투자할 만한 상단들을 찾아서 투자하고 키워야지. 그들이 얻는 이득이 나의 이득이 될 것이야.”

고용인들을 통해서 밖의 일을 들었다.

“요즘 영지민들의 관심사가 무엇이니?”

”어떤 것의 가격이 올랐고 어떤 것의 가격이 내렸니?”

“영지민들에게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이니?”

“영지민들이 불편해하는 것은 무엇이야?”

어떤 것들을 필요로 하는지는 철저하게 확인했다.

한 사람에게만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보내어 답을 듣고 그 대답들을 기반으로 분석했다.

그리고 그 분석에 최대한 가까이 맞추려는 상단들에 투자했다.

고객의 니즈를 파악할 수 있는 상단이 투자할 가치가 있었다고 믿었다.

수익은 결국 고객에게서 나왔으니까.

“역시 나의 생각이 맞았어.”

그 결과는 대박을 쳤다.

몰래 빼돌린 자금을 다시 채웠음에도 많은 자금이 그녀의 수중에 떨어졌다.

* * *

소녀가 16살이 되었다.

결혼한 지 3년이 지났으나 백작 부인은 자식을 가지지 못했다.

임신을 위해 온갖 노력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기침은 사라졌지만 두통, 불면증은 그대로였고 입맛이 없어졌다.

페루제가 직접 새어머니가 드실 식사를 챙겨서 왔다.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어머니가 좋아하는 꽃차도 가져왔어요.”

“매번 이렇게 직접 식사를 챙겨 줄 필요 없단다.”

“제가 원해서 하는 거예요. 저는 어머니와 있는 시간이 좋아요.”

열이 나서 앓아눕는 횟수가 늘어났다.

백작이 그녀를 찾는 횟수가 줄었다.

일하지 못할 때는 그녀가 대신 내정 업무를 봤다.

* * *

백작 부인이 가장 믿고 신뢰하는 사람은 페루제였다.

그녀보다 백작 부인에게 헌신적이었던 사람은 없었다.

그 어떤 친구도 심지어 남편조차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모든 것이 거짓임에도 전혀 알지 못했다.

백작 부인은 자신이 무엇을 해도 자신의 편이 될 것이다.

그동안 하고 싶었으나 참았던 일을 할 때가 되었다.

“당장 고용인들을 불러 모아.”

아무리 그녀가 백작 부인을 위해 내정 업무를 대신할 때가 있다고 해도 완전히 장악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아직 자신에게 완전히 고개를 숙이지 않는 고용인들이 있었다.

“아가씨는 가끔 보면 소름이 끼치지 않아?”

“맞아. 이유는 모르겠는데 가끔 무서울 때가 있어. 아름다우신데 왜 그럴까?”

고용인 중에는 의문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누구보다 전 백작부인과 사이가 좋던 아가씨였다.

세상에서 가장 사이가 좋은 모녀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 아가씨가 백작의 재혼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소식을 듣고 가장 분노할 사람은 아가씨가 아닐까 했던 고용인들은 당혹스러워 했었다.

“당시에 아가씨가 백작님의 재혼을 아주 평온하게 받아들이셨다고 해서 놀랐어.”

“그치. 돌아가신 백작 부인께서 아프시던 중에 아가씨가 얼마나 곁을 지키며 간호를 하셨어. 모두가 그분이 돌아가신 백작 부인께 한 헌신을 알잖아.”

“솔직히 나는 아가씨가 가장 분노하며 반대를 할 줄 알았거든.”

“나도.”

적극적으로 아버지의 재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어머니의 자리를 낯선 여인이 차지하는 것에 찬성했다.

“곁에 두고 어머니의 복수를 하려고 찬성한 것일 수 있어.”

찬성한 것도 놀라운데 진짜 친어머니를 대하듯이 자신의 계모를 위한다는 것은 일반인의 상식에 맞지 않았다.

“혹시 아가씨가 백작 부인께 독이라도 타서 아프게 만든 거 아냐? 그 살기가 몸 밖으로 나온 거지.”

“그런가?”

“건강했던 백작 부인께서 여기 와서 시름시름 앓고 계시잖아.”

그들은 눈치도 빨라서 자신이 새어머니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른다는 의혹을 말하고 다녔다.

이해가 될 만한 이유는 아니었으나 그 의혹은 사실이었다.

그 의혹이 점점 퍼지기 전에 처리해야 했다.

“내가 그대들을 모이라고 한 것은 가문에 큰일이 있어서야. 가문 내에 불손하고 사특한 무리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어.”

자신이 귀족이고 모시는 사람이니까 겉으로 따르기는 해도 속으로는 불만을 가진 불손한 작자들 말이다.

“그래서 그대들의 숙소에 기사들을 보냈어.”

고용인들의 눈이 흔들리며 불안에 떨었다.

괜한 일에 엮여서 험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죄가 없는 사람은 걱정할 것이 없어. 오직 죄진 자만이 불안해야 마땅하니까.”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기사들이 돌아왔다.

“아가씨, 명령을 따르고 돌아왔습니다.”

“번거롭게 만들었네요.”

“아닙니다. 가문의 아가씨를 따르는 일은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기사들은 각자가 가지고 온 것들을 그녀에게 보여 줬다.

“여기 루비로즈 가문을 비방하는 글이 적힌 여러 장의 종이들과 저주 물품을 찾아냈습니다.”

모든 고용인이 숨죽였다.

그들은 루비로즈 가문을 저주하고 비방했기 때문이다.

비방 글은 귀족 모욕죄에 해당되었고 저주 물품은 귀족 살인 미수 죄였다.

어떤 방법으로든 벌을 피할 수 없는 죄인 것이다.

그녀가 그것들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설마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우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마치 연기인 것처럼 말이다.

“믿었기에 더 상처고 충격이네요. 그러나 저는 그들을 용서해 주고 싶어요. 그러니까 그들을 가문에서 쫓아내기만 해줘요.”

귀족 가문에서 일하던 자가 추천장도 없이 쫓겨난다는 것은 이후에 그 어떤 귀족 가문에서도 일을 할 수 없음을 뜻했다.

누가 문제를 일으켜서 그만두게 된 사람을 고용하겠는가.

귀족 가문에서 다른 평민들보다 높은 급여를 받던 그들의 인생이 떨어지는 것이다.

“아가씨! 이것은 죽어도 할 말이 없는 대죄입니다!”

“그래도요.”

그녀는 자비를 베푸는 척하며 그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아가씨…….”

“제발 부탁이에요. 제 마음을 더는 아프게 하지 말아 주세요.”

페루제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자리를 피했다.

기사들은 그녀의 선량한 마음에 감동하며 불순한 무리를 험하게 끌고 나가서는 쫓아냈다.

그들이 보였던 의혹은 가문을 저주하고 비방한 무리의 흉계였음이 밝혀지자 모두가 그런 그 의혹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자칫 같은 무리로 낙인찍힐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가문 내부는 조용해졌다.

* * *

소녀가 17살이 되었다.

계모는 도저히 내정 업무를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내정 업무 자체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렇게 허약할 줄 알았으면 집안에 들이지 않았을 것을…….”

백작은 혀를 차며 아픈 여인을 뒤로하고 방을 나가 버렸다.

다른 여인에게 가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아픈 것을 보고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았다.

백작의 총애를 잃었다.

백작 부인은 인정했다.

이 여인, 저 여인에게 손을 뻗는 백작이었다.

총애를 잃은 부인이 무시당하지 않기 위한 방법은 하나였다.

내정 업무를 꽉 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녀의 건강 상태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의붓딸밖에 없었다.

딸아이는 자신을 위해 음식을 떠다 먹이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나인 척하고 대신 내정 업무를 봐다오.”

“어머니, 어찌 제가 어머니의 업무를 맡을 수 있겠어요. 제발 말씀을 거둬 주세요.”

“부탁이다.”

애절한 계모의 애원에 페루제는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어머니가 나으실 때까지만 맡고 있을게요. 이 꽃차 마시면서 마음 편히 가지세요.”

소녀가 성인이 된 18살.

그녀는 백작 가문의 내정을 완전히 장악했다.

* * *

19살의 겨울, 백작 부인은 눈을 감게 되었다.

“어머니, 어찌 이렇게 가시나요? 저는 어찌하라고요?”

장례식장에서 페루제는 울음을 참는 눈으로 관 안에 잠든 계모를 보고 있었다.

모두가 애달프게 그녀를 바라봤다.

“계모라도 어머니라고 슬퍼하네요.”

“유언으로 자기가 죽어도 울지 말라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울고 싶은 것을 겨우 참고 있는 것이 보이네요.”

“정말 마음씨가 고운 영애예요.”

“그러게요.”

자기 생각에 빠져서 페루제가 잠시 지은 미소를 아무도 보지 못했다.

여러 사건들에도 그녀는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두 번째 사별로 주변 시선이 부담되었는지 1년이 넘게 지나서야 백작은 재혼에 대해 언급했다.

여인을 좋아하는 백작답게 첫 번째 재혼을 했을 때와 같은 이유로 밀어붙였다.

그녀는 가문을 위해서라며 또 백작을 위했다.

당시에 페루제는 아픈 계모를 헌신적으로 보살폈기에 많은 영애의 본보기가 되고 있었다.

의붓어머니에 대한 진심이 느껴졌으니까.

사교계에서는 그녀의 선함을 칭송했다.

새로운 백작 부인은 21세였던 페루제보다 2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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