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화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1)
“가, 가문과 명예를 지키거라.”
가쁜 숨을 내쉬며 겨우 딸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백작 부인은 언제나 딸에게 말했다.
가문은 나무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가문을 지키라는 것은 가족과 나아가서는 그 아래에 있는 방계까지 지키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무가 자라고 있는 토양 전체, 영지를 튼튼하게 만들어 나무가 쓰러지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명예는 사회적인 인정을 받아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공적이다.
백작 부인은 사회적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올바른 태도와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딸이 명예를 지키기 위해 사람을 수단으로 보는 행동을 자제할 것이리라.
그녀는 자신의 아이가 그 말의 의미를 잘 알아들었을 것이라 믿었다.
여한이 없다는 듯이 눈을 감으려는 순간이었다.
소녀가 그녀의 손을 힘껏 잡으며 말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무의 썩은 가지를 잘라 내듯이 가문을 위협하는 자들은 설령 핏줄이라도 가만두지 않을게요.”
소녀는 어머니의 유언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해충이 있다면 그 또한 없앨게요. 완전무결한 토양과 나무.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것을 넘어서 드높일게요.”
“페, 페루제.”
그녀는 소녀의 이름을 부르고는 눈을 감았다.
죽기 직전에 그녀에게 보인 눈빛은 소녀를 막지 못했다는 절망감이었다.
동시에 살아 있는 다른 자식들의 안위를 걱정이 담겨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소녀가 그 의미를 알기에는 아직 어렸다.
* * *
12살 겨울은 페루제에게 있어 불행이자 시작이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나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백작은 말했다.
옆에는 페루제의 두 오라버니와 남동생이 앉아 있었다.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비워 놓을 수는 없지. 몇 주 후에 재혼할 예정이니 그리 알아라.”
여색을 밝히며 부인을 홀대했던 백작이 그녀가 죽어서야 관심을 가질 리가 없었다.
그래도 간만에 가족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장남과 차남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무슨 소리세요! 장례 끝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어요!”
“맞아요. 저희에게 부끄럽지 않으세요!”
장남과 차남이 항의했으나 백작은 오히려 소리를 쳤다.
“마음이 외로운 아비를 위해 재가를 하라고 권유하지는 못할 망정 뭐 하는 짓이냐! 고얀 것들!”
“무슨 헛소리세요!”
분노하는 형들과 아버지의 싸움에 막내는 울기 직전이었고 페루제는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봤다.
그리고는 뭔가 생각을 하더니 표정이 바뀌었다.
아버지를 정말 걱정하면서 좋아하는 마음으로 보는 눈빛이었다.
“오라버니들 그만하세요. 아버지의 말씀처럼 가문을 위해서 안주인은 필요해요. 무엇보다 아버지가 원하시잖아요.”
백작은 유일한 자기편인 딸에게 감동했다.
역시 아비를 생각해 주는 것은 딸밖에 없다면서 말이다.
“이것이 자식이 해야 할 모습이다! 페루제 역시 내 딸이구나. 이리 생각이 깊다니 이 아비는 뿌듯하구나.”
아무리 자식들이 반대한다고 해도 물러날 백작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쉽게 찬성할 일도 아니었다.
어머니를 무시하는 처사를 허락할 줄 몰랐던 형제는 치를 떨었다.
그들은 날카롭게 페루제를 쳐다봤다.
“어머니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정말 실망이구나.”
“어머니께서 하늘에서 통곡하실 거야!”
만약 백작 부인이 하늘에서 울고 있다면 적어도 형제가 생각하는 이유는 아닐 것이다.
오라버니들의 분노를 받아 낸 소녀는 단 하나의 문장만 뱉어냈다.
“가문을 위해서.”
그 말을 하면서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치를 떨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이 대화를 계기로 형제들은 그녀를 더러운 오물을 보듯 했다.
그녀가 아버지가 드실 차를 가지고 집무실로 들어왔다.
같이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어머니에 대해 말을 꺼냈다.
“아버지, 재혼하시게 되시면 어찌 되었던 어머니가 아닌가요?”
“그렇지. 네가 옳은 말만 하니까 기분이 좋구나.”
백작은 정말 기분이 좋았는지 호탕하게 웃었다.
어머니의 자리를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차지하는 상황이다.
그 자식에게 마음의 상처가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일반적인 자식이었다면 말이다.
“어머니이신데 자식과 사이가 나쁘면 되겠어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말해서 매일 티타임을 가지도록 해주세요.”
겉으로 보기에 페루제는 마음의 상처를 받은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실제로도 그녀는 상처받지 않았다.
설령 마음의 상처가 생겼다고 해도 신경을 쓸 백작이 아니었다.
“티와 쿠키는 자식인 제가 챙길게요.”
“어린 나이에도 생각이 깊구나. 그 녀석들도 너를 본받아야 할 텐데”
본인의 무개념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할 행동만 하는 페루제가 예쁘게만 보였다.
그녀가 아버지에게 안겼다.
“저도 언젠가는 혼인해서 내정을 봐야 하니 어머니 곁에서 실무를 배울 수 있도록 해주세요.”
웃기는 소리였다.
그녀는 어린 나이였지만 이미 내정 업무를 실질적으로 해냈다.
백작 부인의 사후에도 돌아가는 집안이 그 증거였다.
* * *
일반적인 경우라면 방계들이 루비로즈 가문의 내정을 대신 관리해 준다는 명목으로 가문에 들어와서 한몫 잡으려고 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재혼하기 전까지 알차게 가문의 재산을 축내려고 했을 것이 뻔했다.
그러면 페루제는 명분에 밀려서 속수무책으로 내정이 그들 손에 들어가는 것을 바라봐야 했을 것이다.
설령 그녀가 내정 업무를 할 줄 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녀가 어렸기 때문이다.
그러면 결국 해박한 식물 지식으로 손을 써야 하는 일이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백작부인이 돌아가신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재혼을 이야기한대요.”
“백작 부인 생전에 그리 마음고생을 하셨는데 양심도 없죠.”
“말도 그리 빨리 움직이는 못할 것이에요. 달리는 말보다 빠른 재혼 선언이죠.”
여자를 밝히는 아버지가 너무 일찍 재혼을 선언한 덕분에 그런 노고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새어머니에게 감사해야겠다. 방계 부인들의 죽음을 어머니의 저주로 죽은 것처럼 꾸미는 귀찮은 일은 없으니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방계들은 곧 새로운 백작 부인이 온다는 사실에 내정 업무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녀에게 행운이었다.
“응당 그래야지. 내정 업무를 가르치는 것은 어머니의 역할이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소리만 하는 딸이었다.
없던 애정이 샘솟는 기분이 들었다.
* * *
지금부터 새어머니가 오기 전까지의 기간에 페루제는 가문 내에 영향력을 넓혀야 했다.
사랑스러운 루비로즈 가문의 영애로는 부족했다.
“저희가 이런 것들을 받아도 되나요?”
“그럼. 너희가 여기서 일한 시간과 고생을 다 아는걸. 그 노고라고 생각해.”
시녀들은 자신들 앞에 놓은 귀한 장신구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기대조차 해 본 적이 없는 것이 자신들의 손에 쥐어지게 되었으니까.
“저희는 저희 일을 했을 따름인데 이렇게 잘해 주시니까… 너무 감사해요.”
“저희를 이렇게 생각을 해 주실 줄 몰랐어요.”
시녀들은 모시는 분이 자신들에게 ‘좋은 관심’을 가져줄지는 몰랐다.
자신들의 노고를 알고 인정해 준다는 것은 기분은 일이었다.
그런 좋은 분위기 속에서 페루제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아, 아가씨!”
“어찌 우시나요?”
훈훈했던 분위기에 갑자기 아련한 눈물을 흘리는 아가씨에게 시녀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새어머니가 오시면 나는 어떻게 될지 앞날을 알 수가 없구나. 어머니와 친해져야 너희도 챙겨줄 수 있는데 말이야. 어머니와 친해질 수 있게 그분에 대해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말에 시녀들이 손까지 들며 소리쳤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새로운 백작 부인께서 오시면 그분에 대해 알려드릴게요.”
“그럼요! 아가씨가 가문에서 안심하고 지낼 수 있도록! 새로운 백작 부인과 친해질 수 있도록 도와드릴게요!”
시녀들이 적극적인 것은 아가씨가 가문에서 앞으로도 잘 지낼 수 있도록 돕는다는 이유도 있었으나 그녀가 잘 지내야 지금처럼 좋은 선물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은 이 선물들을 더 가지고 싶었다.
“정말 고마워. 역시 너희밖에 없구나. 이 은혜 잊지 않을게.”
그녀는 그런 그들의 욕망을 알았다.
* * *
소녀가 13살이 되었을 때 드디어 새어머니와 만나게 되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부족하지만 좋은 어머니가 되도록 노력할게요.”
“아닙니다. 이렇게 와 주신 것만으로 감사한 것을요.”
귀족들 사이에서 그녀에 대한 긍정적인 말들이 퍼졌다.
정확히는 아들을 둔, 그러면서 재혼의 기회를 노리는 노분인들 사이에서였다.
그들은 그녀처럼 진정으로 부모를 위하는 자식이 되도록 노력하고 본받으라고 소리쳤다.
“어머니와 이렇게 차를 마시고 쿠키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니 행복하네요.”
그녀는 계모와 매일 차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영애의 얼굴을 한결같이 보여 줬다.
‘새로운 백작 부인을 위하는 페루제’에 대해 사람들은 대체로 2가지 중 하나를 말했다.
아버지를 위할 줄 아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페루제 영애 또는 계모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불쌍한 페루제 영애였다.
* * *
그녀는 기사들에게 다가갔다.
그녀 곁에는 시녀들과 맛있는 간식들이 있었다.
기사들이 기대감에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며 그들을 바라봤다.
기사단 단장이 페루제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이렇게 저희를 위해 친히 가져오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문을 위해 노력하시는 것에 비하면 작은 성의니까 받아주세요.”
“기사가 가문을 위해서 힘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당연함이 감사한 것이에요.”
훗날 그녀가 그를 죽인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모습이다.
그녀는 간식 하나하나를 직접 기사들에게 나눠줬다.
“제가 받는 용돈으로 구하는 것인지라 부족해도 이해를 해주세요.”
“아닙니다! 이렇게 주시는 것만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자신의 사비를 그들을 위해 썼음을 드러냈다.
가문의 돈이 아니다.
오로지 자신이 그들을 생각해서 한 행동임을 보여 준 것이다.
“그리고 오라버니들로 인해서 고생하셔서 죄송하고요”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찌 영애의 탓입니다. 그런 마음은 얼른 지워주십시오.”
기사는 그녀의 말에 당혹해하며 손을 저었다.
그녀가 사과할 일이 아니었으니까.
여색을 밝히는 장남과 도박과 같은 놀이에 빠진 차남은 기사들에게 골칫거리였다.
쓰레기인 성향은 감추려고 해야 감추기 어려웠다.
특히 그들이 외출하면 호위를 나가야 하는 기사들에게는 말이다.
성년이 되기도 전부터 장남은 문란했다.
“야, 오늘 하루는 저기 놀다가 내일 들어갈 거니까. 알아서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어.”
“영식,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지요. 이런 늦은 시간까지 밖에 있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어두운 시간에 일이 터지기 쉬우니까요.”
“윽!”
기사들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하면 그들의 다리를 발로 찼다.
“나는 루비로즈 가문의 후계자야. 너희는 내 말에 따르기만 해!”
그들을 존중하는 태도는 전혀 없었다.
놀기 좋아하는 차남도 장남과 자웅을 겨룰 만했다.
“영식, 또 수업을 빼먹고 몰래 나갔다가 오신 것입니까?”
“도저히 지루해서 있을 수 없는걸.”
“그러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시려고요.”
“내 부모도 아니면서 왜 그리 잔소리야. 사지육신 멀쩡하게 돌아왔잖아. 그만 좀 해.”
제멋대로 외출을 한 바람에 기사들은 그를 찾아다녀야 했다.
혹시라도 안전에 문제가 생기면 큰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사고를 쳐놓고는 사과도 없이 그는 저택으로 들어갔다.
장남과 차남과 비교하면 페루제는 인격자이며 천사였다.
“아가씨처럼 우리를 배려해 주고 신경을 써주시는 분은 없어.”
“아가씨가 없으셨다면 나는 기사의 도리는 집어치우고 루비로즈 가문을 떠났을 거야.”
“그만큼 백작님이나 두 영식이나 진상이기는 하지.”
그녀는 천천히 기사들의 신망을 얻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