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화 어머니의 노력은 헛수고였다
루비로즈 가문으로 돌아온 백작 부인은 이 일의 충격으로 한동안 누워 있어야 했다.
귀한 것만 보고 귀한 것만 듣고 자란 그녀에게는 너무 험한 모습이었다.
그녀보다 어린 딸은 평소와 같았는데 말이다.
“왜 당신은 여기에 박혀 있지 않고 나가서 이러는 것이요.”
백작은 혀를 차며 한번 찾아오고 끝이었다.
“쯧. 꾀병도 그만하고 얼른 일어나시오.”
그것도 짜증이 한껏 담긴 표정이었다.
아내가 자기 일을 도와야 최대한 빨리, 최대한 많이 여자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무표정으로 보며 페루제는 주먹을 쥐었다.
아버지를 살기가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반드시 기회가 오면 평생을 후회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래야 어머니도 속이 시원해지실 것이니까.
“어머니, 언젠가 아버지가 후회하도록 만들어 드릴게요.”
그녀가 아주 작게 홀로 속삭였다.
“어머니, 이제 괜찮으신 것이지요?”
“그럼. 이제는 생생하단다. 보렴.”
백작의 바람처럼 다행히 백작 부인은 금방 일어났다.
자신의 어머니가 기분 전환을 할 필요가 있음을 알았다.
티를 내지 않아도 어머니를 언제나 보는 딸은 그 미묘함을 알아챘다.
“저희 밖으로 나가요?”
“밖에?”
“네, 연극을 본 지 오래되었잖아요.”
딸의 말에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백작 부인이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그렇구나. 내가 바빠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신경을 써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그런 말씀을 듣고 싶어서 말을 꺼낸 말이 아니니까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고맙구나.”
어미를 생각하는 말이 대견했다.
그녀가 페루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머니의 손길이 좋았다.
따뜻한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지는 듯했다.
매일매일 어머니와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정 업무나 아버지가 대충 처리하는 업무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 바쁘셨으니까.
“그러면 준비하고 어서 나가자.”
“네!”
그들은 외출용 드레스로 갈아입고 연극을 봤다.
역시 즐거운 시간이었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였다.
“너무 연극이 좋았어요!”
“그러게. 너무 웃겨서 계속 웃음이 터지더구나.”
모녀가 대화를 나누는데 갑자기 마차가 흔들리며 멈췄다.
“갑자기 이렇게 달려오면 어쩌자는 거야!”
마부가 화를 내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백작 부인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를 따라 페루제가 슬쩍 마차에서 나왔다.
귀족이 마차에서 내리자 몇 명의 사내가 서 있고 어떤 남자가 한 사내를 누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인데 이리 소란이지?”
근엄한 말투로 사내들에게 물었다.
눌림을 당하는 사내와 그 사내를 누르는 남자를 제외한 나머지가 귀부인에게 예의를 차리며 인사했다.
“부인의 길을 막게 되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부인.”
“무슨 일이냐고 물었네.”
그녀는 사과보다는 어쩌다가 마차 앞으로 뛰어들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마부가 얼른 말을 멈추지 않았다면 그들은 죽었을 것이다.
“이놈이 물건을 빼앗고 달아났습니다.”
“겨우 그것 때문인가?”
“겨우라니요!”
“게다가 이놈은!”
백작 부인은 그들의 말을 끝까지 들었어야 했다.
페루제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궁금했지만 말이다.
“물건은 다시 사면 그뿐이지만 목숨은 한 번 잃으면 끝이네.”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그들에게 훈계하듯이 말했다.
그 위엄이 서린 목소리에 그들이 고개를 숙였다.
백작 부인이 금화 몇 개를 꺼내서 한 사내에게 던졌다.
“이것을 받고 저자는 풀어 주게나.”
“하지만!”
금화를 받은 사내가 뭐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어허!”
백작 부인이 막았다.
그녀의 말에 사내와 그 사내와 함께 있던 다른 이들은 고개를 숙여야 했다.
“알겠습니다.”
이를 갈면서 눌림을 당하던 사내를 풀어 줬다.
딱 봐도 상대는 귀족이다.
그녀는 귀족, 자신들은 평민.
귀족의 말에 감히 반대하는 짓은 귀족 권위를 훼손한 죄로 죽을 수도 있었다.
“페루제, 얼른 마차에 타려무나.”
“네.”
백작 부인은 뿌듯해하는 얼굴로 마차에 탔다.
그녀는 앉아서는 페루제에게 말했다.
“이런 것이 자비란다.”
“이것이요?”
“그래.”
“가난한 자의 죄를 용서할 줄 알고 회개할 기회를 주는 것이지.”
신전에서 배운 것과 달랐다.
그곳에서는 죄에 맞는 벌을 내려야 한다고 가르쳤으니까.
의문이 들었지만 물어보지는 못했다.
어머니가 너무 자신의 행동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런 어머니의 기분을 나쁘게 만들기 싫었다.
* * *
얼마 뒤, 그녀가 어머니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외출했다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평소보다 길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자신을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왜 사람들이 저기에 몰려 있어?”
“저기에 죄인의 사형이 거행될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
기사의 말에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귀족 영애로 곱게 자란 그녀가 그런 일을 볼 일이 있겠는가?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어떤 죄를 지었길래 죽어야 하는지 궁금해졌다.
“나도 저기 가 볼래.”
기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린 영애가 보기에는 좋지 않았다.
“아가씨께서 보실 만한 것이 아닙니다.”
“왜 그것을 네가 정해? 그것은 내가 정하는 것이야. 그러니까 어서 가.”
기사의 말에 기분이 나빠졌다.
자신이 나이가 적든 많든 간에 루비로즈 가문의 영애였다.
루비로즈 가문을 모시는 기사가 명령을 불복한다는 것은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아니면 루비로즈 가문을 무시하는 것이거나.
“알겠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느껴지는 서늘한 눈빛에 기사가 움찔했다.
사람들로 막힌 광장에서 대화 소리가 들렸다.
“저 쓰레기가 유명하다며?”
“그래. 여인들만 노려서 물건을 빼앗던 망나니라더군.”
“내가 저놈이 일을 칠 줄 알았다니까.”
“결국에는 여인을 겁탈하고 죽였네.”
“몇 명이라고 했지?”
“4명이라더군. 불쌍한 4명의 여인이 신의 품으로 갔어.”
죽어야 마땅한 놈이 사형을 당하는 것이다.
그런 쓰레기는 진작 죽였어야 했는데 이제야 죽이는 것이다.
정말 이 영지의 치안이 좋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이 일에 대해서 말하고 치안에 더 신경을 쓰도록 해야 할 것 같았다.
“얼굴이 궁금하네. 어떤 놈인지 그 면상을 한번 봐야겠어.”
그녀가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길을 터줬다.
귀한 옷차림과 기사들.
상대가 어려도 귀족임을 알 수 있다.
그녀는 편하게 사형대 앞까지 왔다.
그리고 드디어 죄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 저자는?”
그 얼굴은 낯이 익었다.
얼마 전에 어머니가 금화를 주고 구해 준 사내였다.
어머니의 구함을 받은 사내는 죄가 없는 여인들을 4명이나 겁탈하고 죽인 살인마가 되었다.
자신의 어머니는 살인마를 구해서 4명의 여인이 죽게 만든 것이다.
그것을 보고 그녀가 한 말은 이것이었다.
“어머니에게 말하지 못하겠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머니는 분명히 죄책감과 슬픔을 느끼게 될 것이다.
겨우 어머니의 기운을 차리게 해 드렸는데 다시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없었다.
사형 거행을 진행하는 가신이 페루제를 보고 다가왔다.
“아가씨,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죄인의 얼굴이 궁금해서 보려고 왔어.”
“아가씨께서 보실 만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 모가지가 잘리는 일이다.
괜히 모시는 분의 딸이 보고 기절이라도 했다가는 곤혹스러운 일이 발생할 것이다.
가신은 영애가 얼른 돌아갔으면 했다.
가신의 입장이 이해되었다.
“알았어. 돌아갈게.”
기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그녀는 마차에 탔다.
자리에 우아하게 앉으며 말했다.
“어머니도 틀리시는 것이 있구나. 나는 괜한 자비로 헛된 희생을 만들지 말아야지.”
그녀가 누군가의 죽음을 쉽게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
* * *
루비로즈 백작 부인은 정원 가꾸는 일을 좋아했다.
“페루제, 정원을 가꾸는 일은 나의 오래전부터 이어진 일이란다. 자국의 식물뿐 아니라 타국의 식물에도 관심이 많아서 우리의 조상님들은 언제나 곁에 두고 길렀지.”
그녀가 딸을 옆에 두고 꽃과 나무에 직접 물을 줬다.
자신의 아이가 남들과 다름을 인정한 이후에 그녀는 최대한 ‘사람 간의 애정’에 대해 가르치려고 했다.
필요성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도록 말이다.
그녀 근처에는 식물도감이 있었고 그 옆에는 어떤 노트들이 있었다.
그것은 모계쪽 조상들로부터 계속 이어 온 식물에 대한 기록물이었다.
“이제 너도 그분들과 나를 이어서 이것을 이어 가겠지.”
“열심히 읽고 새로운 것으로 채울게요.”
기록물들을 주며 웃는 어머니를 따라 페루제가 웃었다.
그 기록물들이 훗날 자신의 딸이 가문의 권력을 쥐는 데 엄청난 공헌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백작 부인이 노트들을 주고는 한 나무를 사랑스럽게 만졌다.
“가문은 한 그루의 나무와 같아서 하나하나 소중히 여기고 지켜 줘야 해. 물론 방계들도 포함이란다. 알았지?”
“알겠어요.”
“그래. 그렇게 해야 영지 전체가 풍족해지고 다시 가문의 힘이 커지는 거란다.”
그렇게 딸에게 큰 가르침을 줬다.
그날 이후 페루제는 매일 매일 정원에 갔다.
그곳에 앉아 공부했다.
“이 배합은 환각 증상을 나타나게 한다.”
그런데 공부하는 내용이 조금 이상했다.
식물이나 약초 배합법에 대한 것은 괜찮았지만, 독에 관한 것까지 그녀는 공부하고 있었다.
[중독 증세를 만드는 156가지 방법.]
어떤 것은 직접 나름대로 연구해 보기도 했다.
[이 꽃은 어떤 성질의 꽃과 같이 두면 독이 있는 향을 뿜어내게 된다.]
정원에 있는데 한 정원사가 나뭇가지를 자르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백작 부인이 예상하지 못한 일이 다시 벌어졌다.
그녀는 정원사에게 다가갔다.
“왜 나뭇가지를 자르고 있어?”
“아가씨, 안녕하십니까?”
“응. 안녕하니까 물어본 말에 대답해 줘.”
이론 공부만 하고 있던 터였다.
게다가 어머니는 식물에 물만 주고 나머지는 정원사가 다 했기에 그녀는 나뭇가지를 왜 자르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그것이 말입니다. 썩은 나뭇가지를 그대로 두면 그것이 나무의 다른 부분에도 퍼지거든요. 그래서 자르는 것입니다.”
“썩은 부분은 잘라야 사는 거야?”
“네. 그렇습니다.”
그녀가 잠시 고민을 하듯이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눈을 뜨더니 활짝 웃었다.
손을 흔들며 어딘가로 가면서 말했다.
“고마워! 덕분에 고민하던 것이 싹 사라졌어요.”
“도움이 되었다니 영광입니다.”
정원사가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하며 대화는 끝났다.
* * *
행복했던 모녀의 삶에 비극이 찾아왔다.
백작 부인의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페루제는 침대에 누워 있는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를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질 정도였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랑 오라버니들이 백방으로 어머니를 낫게 할 의사를 찾고 있어요. 곧 나으실 거예요.”
“그럼. 이 어미도 그리 믿는단다.”
딸의 불안함을 없애 주려는 듯이, 살고 싶다는 희망의 끈을 부여잡듯이 백작 부인은 웃었다.
모녀의 믿음은 이뤄지지 않았다.
점점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지더니 세상을 뜨려고 하기 직전까지 와 버렸다.
그녀는 가족들 개개인과 마지막 만남을 갖고 마지막으로 방에 들어온 소녀를 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