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3화 (3/221)

003화 강자는 언제나 약자를 무서워해야 한다

루비로즈 백작 부인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서 책상을 두들겼다.

“어떻게 창부 앞에서 나를 그리 대할 수 있어!”

남편의 몰상식한 행태는 그녀가 더는 이곳에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여기에 있다가는 병이 생길 듯싶었다.

“어떻게 가문의 안주인을 고용인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줄 수 있느냐고!”

그녀는 딸을 데리고 지인의 영지로 갔다.

남편이 대충하고 남겨 둔 업무들을 놔두고 갔느냐?

아니다.

다 처리한 뒤에 짐을 싸고 나갔다.

장남과 차남은 아카데미에 있었고 막내는 아직 어디 멀리 가기에는 어렸다.

페루제는 마차 안에서 밖을 내다봤다.

농지를 지나서 들판이 보이고 숲이 보였다.

밖을 향하던 시선을 어머니에게 옮겼다.

“어머니, 궁금한 것이 있는데 여쭤 봐도 괜찮아요?”

그냥 둬도 괜찮았다.

아버지가 수습하도록 놔두는 것이 나았다.

일이 터져 봐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그리하지 않았다.

“그냥 두고 나오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요? 아버지가 정신을 차리게요.”

어머니가 영지에 없을 때, 일이 드러날 터였다.

그러면 아버지만 고생하게 된다.

어머니를 부른다고 해도 돌아가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니까.

그동안에 아버지는 자신의 무능함을 곱씹으며 다음에는 더 일을 꼼꼼하게 하겠지.

딸의 물음에 루비로즈 백작 부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아이가 품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렇게 되면 영지 운영에 차질이 생기지. 어쩌면 영지민들에게도 그 여파가 미칠 수 있음이야.”

페루제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영지민이 느낄 약간의 불편을 왜 신경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여 영주가 정신을 차린다면 그것이 더 이득이 아닌가요?”

어차피 영지민들은 영주에게 허락을 받고 그곳에서 살아간다.

영주가 아니었다면 그곳에 발을 붙일 수 없었다.

그것을 감사히 여기며 살아야 한다.

지배자는 피지배자들 위에서 군림한다.

그들의 의중보다, 그들의 안위보다 소수인 지배자가 더 중함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들은 널리고 널렸다.

그들은 무지하고 어리석었다.

자신이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작자들이다.

반면에 지배자는 소수였다.

지배자는 지식을 습득하며 지혜를 쌓는다.

피지배자들이 우왕좌왕할 때 길잡이의 역할을 한다.

지배자는 꼭 필요한 존재였다.

지배자가 없다면 어찌 사람들을 이끌며 사회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영주가 자기 업무에 신경을 쓸 계기를 주는 것이니까요.”

모든 지배자가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님을 알았다.

루비로즈 백작을 보면 모를 수가 없다.

정말 지배자가 어울리지 않는 작자니까.

그런 작자가 아버지인 것이 수치스러울 따름이다.

“무능하지만 아버지가 백작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런 인간은 빨리 백작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심신에 안정을 줄 것이다.

영지민에게도 어머니와 자신에게도 말이다.

아버지의 무능을 무슨 자연재해처럼 언급했다.

백작 부인이 마주하고 있던 딸을 자신의 옆에 앉게 하고는 다정하게 뺨을 쓰다듬었다.

“분명히 네 아버지가 정신을 차리면 집안과 영지에 좋지. 그렇지만 그 방법에 영지민의 희생이 있다면 올바른 방법이 아니란다.”

쉬운 길을 두고 왜 어려운 길을 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그것이 올바른 길이 아닌지도 몰랐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 의의를 부정하는 것이거든.”

“귀족의 존재 의의요?”

그동안 살아오면서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였다.

페루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딸아, 백성이 없는 왕국은 없단다. 왕국은 백성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지.”

백작 부인은 딸이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아직은 부족함을 알았다.

사실, 나아진 것은 없었다.

노예들에게 교육을 받도록 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준 일을 보고 오해한 것이다.

“백성이 없는 왕국이 과연 왕국일까?”

“아니요.”

“그렇지.”

백성 위에 군림하는 귀족.

따르는 백성이 없는데 어떻게 군림을 할 수 있을까?

어머니의 말씀은 정말 맞았다.

귀족의 여부는 ‘복종하는 백성’이 있느냐와 없느냐의 차이였다.

귀족이라고 이름만 있고 따르는 영지민이 없다면, 따르는 기사와 병사가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귀족이 아니었다.

“우리는 귀족의 존재 이유를 잊어서는 아니 된다. 백성을 잘 다스리기 위해 귀족이 있는 것이야. 그 책무를 외면해서는 아니 될 일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귀족의 존재 명분이 백성을 잘 다스린다는 것이기에 지켜야 하는구나.

그 명분을 잃는다는 것은 귀족의 자리를 잃는다는 것과 같았다.

복종을 시키기 위해서는 잘 다스리는 모습을 보여 줘야 했다.

어머니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고위층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의 정신을 말한 것인데 정작 페루제은 다르게 생각했다.

영지민을 귀족의 자리를 누리기 위한 수단으로 봤다.

“어머니가 알려 주시는 말들은 정말 뼈가 되고 살이 되어요.”

페루제가 어머니를 안으며 발랄하게 웃었다.

“뭐? 어디서 뼈가 되고 살이 된다는 말을 배웠니?”

백작 부인이 그녀를 안으면서 웃었다.

서로를 너무 사랑하는 모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아버지가 정신을 차릴까요?”

페루제고 고개를 들며 어머니에게 물었다.

올바른 방법으로 아버지를 깨우쳐야 한다고 하셨는데, 도대체 그 방법이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했다.

“나도 정말 그 방법이 궁금하구나.”

백작 부인은 정말 슬픈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페루제는 차마 더는 물어보지 못했다.

어머니의 슬픈 얼굴은 자신도 슬프게 했다.

“어머니! 저기 영지가 보여요!”

어머니의 지인이 계신 영지에 거의 도착했다.

그녀가 마차의 창밖에 몸을 내밀었다.

“어? 저기 연기가 떠오르고 있어요.”

“뭐?”

딸의 말에 놀란 백작 부인이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기사 하나가 마침 그녀에게 다가왔다.

“부인, 무언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때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먼저 보냈던 기사와 병사들이 사색이 되어서 돌아왔다.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어서 돌아가야 합니다! 게다가 그들이 이곳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백작 부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필 자신들이 당도한 날에 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어서 돌아가지 않으면 봉기를 일으킨 백성들과 맞닿을 수 있었다.

“어서 돌아가요! 얼른!”

기사들만 있었다면 얼른 말을 타고 빠져나가겠지만 지금은 지켜야 할 백작 부인과 영애가 있다.

영지민들에게 둘러싸이면 그들까지 지키면서 가기에는 벅찼다.

기사가 아무리 강해도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다수의 힘 앞에서는 무릎을 꿇는 법이다.

“부인, 불편하시더라도 마차에서 내리셔서 저희와 말을 타셔야 할 듯합니다.”

“알겠어요. 페루제 얼른 마차에서 내리렴!”

이러는 사이에도 봉기한 백성들은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이곳으로 향한다는 것은 영주와 그 일가가 그들 속에 죽임을 당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백작 부인이 말을 타고 기사들의 허리를 감쌌다.

페루제가 말에 올라타려는 그때였다.

“저기! 귀족들과 병사들이 있소! 본때를 보여 줍시다.”

“암요! 저것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빼앗아 갔는지 생각하면 치가 떨립니다!”

봉기를 일으킨 자들이 농기구를 들며 소리쳤다.

그리고는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페루제는 몸이 굳었다.

그들의 눈에는 자신이 살면서 본 적이 없는 광기와 증오가 담겨 있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열망이며 삶에 대한 절실함이었다.

살고 싶다는!

이대로 있다가는 죽는다는!

이렇게 살 바에는 죽겠다는!

수많은 절규가 만들어 낸 일이었다.

페루제는 몸이 굳은 사람처럼 멈춰서 그들을 바라봤다.

그 안에 담긴 욕망이 너무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런 것을 감상할 때가 아니다.

“아가씨! 얼른 손을 잡으시지요!”

기사의 다급한 외침에 정신을 차린 그녀가 기사의 손을 잡고 말에 올라탔다.

“어서 가자!”

“네!”

다행히도 병사들과 기사들은 무사히 그곳을 탈출할 수 있었다.

기사들은 말을 탔으며 병사들은 일반 영지민보다 체력이 좋았으니까.

“여기까지는 차마 오지 못할 것입니다.”

안전지대까지 도착하고 나서야 그들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백작 부인은 평생 보지 못했던 광경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숨을 바쁘게 들이쉬었다.

“정말 생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네요.”

기사가 도망쳐 온 길을 바라보다가 백작 부인에게 말했다.

“그 영주가 영지민들을 못살게 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거둬들이는 세금도 엄청나고 자주 이상한 명분을 만들어서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았다고요.”

“봉기를 일으킬 정도로요?”

“과장된 이야기려니 했는데 사실이었나 봅니다.”

근처 바위에 앉아 있던 페루제는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었다.

귀를 쫑긋거리며 말을 하나라도 놓칠까 집중했다.

백성을 약자라고 판단했다.

지배당하는 것이 당연한 존재라 생각했다.

자신들은 지배자니까 감히 거역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동안 자신이 가진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물론 역사책에는 백성들이 봉기한 내용이 있다.

자신도 배웠다.

백성들이 언제든 귀족을 향해 으르렁 짖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백성의 저항은 대부분 실패했다.

오직 일부만 성공했으며 보통 그런 경우에는 새로운 왕국과 새로운 왕이 탄생했다.

역사의 분기점에서나 성공되는 일이었다.

그랬다.

사람만 달라질 뿐 귀족과 왕은 지배자였다.

“백성들은 언제든 칼을 들이밀 수 있어.”

역사의 분기점이 아니더라도 귀족들은 백성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수 있다.

그들 한 명은 약자일지라도 모이면 그들은 강했다.

“그들은 언제든 강해질 수 있어.”

다수 앞에 소수는 미약했다.

그렇기에 루비로즈 가문의 기사들도 도망을 친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그들이 모일 명분을 주지 않으면 되는 거야.”

그들에게 적당한 삶을 내리지 않는다면 그들은 지배자에게 언제 어디서라도 망설이지 않고 농기구를 들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잘 다스려야 한다고 한 것이야. 귀족의 존재 의의를 지키지 않는 순간에 그들은 무서워지니까.”

역사에 가정은 필요가 없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가정을 해 봤자 역사는 바뀌지 않으니까.

“만약 영지민의 봉기가 실패로 돌아갔다면?”

그렇지만 페루제는 가정을 해 봤다.

봉기 세력의 토벌에 성공했다고 해도 가문에 큰 손실을 초래할 것이다.

영지민이 줄어드니 자연스럽게 영지를 운영할 세금이 줄어들 것이다.

그러면 영지 운영에 있어서 많은 부분에 지장이 갈 것이다.

병사는 영지의 안전과 귀결되어 있다.

일정 이상의 병사는 꼭 필요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병사를 다시 양성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많은 돈이 들 것이다.

“가문의 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백성에게 ‘삶의 안정’을 줄 필요가 있어.”

가문의 안위와 영지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백성들의 불만을 최소화시키고 현실에 안주하도록 만들어야겠지.

역시나 어머니가 원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하나도 생기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