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화 사람은 환경에 좌우된다
어린 페루제 루비로즈는 가문 내에 있는 정원을 뛰어다녔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누군가에게 손짓했다.
“빅토르! 얼른 와!”
“아가씨! 그리 뛰시면 다치세요!”
그녀의 바로 뒤에는 한 소년이 뛰고 있었다.
붉은 눈을 가진 소년은 걱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뭐, 어때? 우리만 있잖아.”
빅토르에게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근처에 있는 나무에 앉았다.
서늘한 바람이 그들을 시원하게 해줬다.
기분이 좋은 미소가 절로 나왔다.
“아가씨.”
“우리 둘만 있을 때는 ‘로제’라고 부르라니까. 아니면 ‘로즈’도 좋고 말이야.”
“제가 말했잖아요. 아무리 아가씨께서 그리 하라고 하셔도 그리 할 수 없어요.”
빅토르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들 간의 결코 ‘메울 수 없는 차이’ 때문이다.
“그래. 알아. 네가 노예고 나는 백작 영애니까.”
페루제 루비로즈는 백작 가문의 영애, 빅토르는 노예였다.
절대로 친구가 될 수 없는 관계다.
그런 현실을 뒤집고 귀족 영애와 노예는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그 대화를 끝으로 푸른 하늘을 바라봤다.
서로 어떤 놀이도 대화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두 사람은 서로 곁에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평온하고 행복했으니까.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 정도로 그들의 우정은 깊었다.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아. 노예는 재능이 있어도 그 일을 할 수 없다니 말이야.”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빅토르는 정말 뛰어났다.
아버지가 붙여 준 검술 스승들 밑에서 배우는 오라버니들보다 기초만 할 줄 아는 빅토르가 더 검술에 조예가 깊었다.
겉핥기로 좀 본 것을 따라서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열정이 있었다.
그렇지만 주인에게 허락을 받지 못했다.
재능 있고 의욕이 있음에도 노예라는 이유로 할 수 없다.
“저 때문에 몰래 용병을 고용하셨잖아요. 혹시라도 백작님께서 아시는 날에는 아가씨께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라요.”
그것이 화가 났다.
자신 안에 잠든 날개를 펼칠 기회만 있다면 누구보다 높이 날아갈 수 있었다.
노예라는 것이 문제라면 능력을 키울 기회를 주고, 공적을 세울 기회를 주고, 나중에 자유를 주면 될 일이었다.
“뭐, 너만 해 주는 것이 아니니까.”
어른들은 매일 인재가 없다고 한탄만 한다.
왜 그들이 직접 적합한 인재를 만들 생각을 하지 못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른들은 매일 자격이 되는 자가 없다고 푸념했다.
왜 그 자격의 기준을 낮춰서 많은 사람을 만나 볼 생각을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알아요. 가문 내의 다른 노예들에게도 가르침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시고 계시잖아요.”
“뭐, 그냥. 용돈 쓸 일이 없으니까. 능력이 입증되면 완전한 자유는 못 줘도 내 권한 안에서는 최대한 자유를 줄게.”
“그것만으로 충분해요. 아이들이 모두 의욕이 넘쳐요.”
빅토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곳의 노예 아이들은 다른 곳의 노예들보다 생기가 넘쳤다.
페루제 루비로즈 영애 때문이었다.
“얼른 능력을 키워서 영애에게 도움이 될 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노예를 벗어나게 해 주지는 못해도 능력을 증명한다면 나중에 출퇴근할 집도 주고 월급도 준다고 했으니까.
아이들에게 희망을 준 것이다.
처음에는 어린 영애의 헛된 말로 여겼다.
“내가 모은 용돈을 탈탈 털었어. 그 정도의 의욕은 보여 줘야지.”
집안에 그 어떤 권한도 없는 영애가 그런 것을 해 줄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런데 백작 부인이 그것을 보증하면서 그들은 그것이 진실임을 믿게 되었다.
“백작 부인께서 뒤에서 지원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당시에 페루제의 어머니는 그녀처럼 뜻이 있어서 지원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가 드디어 자비를 베풀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허락한 것이었다.
아이가 처음으로 요구한 자비를 베풀 기회를 허락해 주지 않는다면 더는 자비를 베풀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아버지지. 언제나 그 인간이 문제야.”
물론 백작에게는 비밀이었다.
노예는 노예, 시키는 것만 하면 되며 괜한 것이 머리에 들어가면 허튼 생각을 품게 된다.
그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주인의 말에 무조건 따르는 노예를 원했다.
“그런 허술한 생각을 품고 있으니까. 루비로즈 가문이 더 크지 못하지.”
그녀가 혀를 찼다.
노예가 주인 말에 복종하는 것은 당연했다.
불만을 품고 칼을 든다고 해도 신전에서 새긴 문양이 공격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주인을 배신할 리가 없는 노예잖아. 그러면 능력도 키워서 제대로 쓰면 좀 좋아? 아버지는 정말 아둔해. 그런 아둔함을 가졌음에도 백작이라니 비합리적이야.’
“아줌마는 어떠셔?”
“아가씨께서 보내 주신 약 덕분에 괜찮아지셨어요.”
“그래. 다행이네.”
그녀는 빅토르를 아꼈다.
빅토르의 어머니라는 이유만으로 노예에게 의사를 보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엄청 파격적인 대우였다.
노예는 그냥 쓰고 아프면 버리는 존재였으니까.
빅토르는 자신의 아가씨에게 말하지 않았다.
의사가 어머니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고 말이다.
대신에 어머니를 몸부림치게 만든 고통을 완화하는 약을 받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웃으며 지내실 것이다.
그녀 덕분에 그는 어머니와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또 편찮으시면 말해. 저번처럼 참지 말고.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이미 받은 것이 많았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받았고 능력을 얻을 기회를 받았다.
더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이제는 페루제 아가씨에게 무언가를 드릴 생각을 하며 평생의 은인으로 모시고 받들면서 살라고 말이다.
“너는 내 친구이며 내 사람이니까 요구해도 괜찮아.”
내 친구가 다른 하찮은 것들과 같은 대우를 받아서는 아니 될 일이지.
자신의 친구였다.
자신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다른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자신의 격이 떨어지는 짓이었다.
그가 다른 이들보다 격이 높은 사람임을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의사를 보낸 것도 그런 의도였다.
이 아이는 너희와 다른 존재임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의사를 보낸 이유에는 친구의 어머니를 걱정한다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
친구의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였을 뿐이고 그녀에게는 페루제를 만족하게 할 재능이나 능력이 전무했으니까.
즐거운 시간은 언제나 빨리 흐른다.
어느새 해가 저물려고 하고 있었다.
“이제 돌아갈까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어서 가자. 어머니가 기다리시겠어.”
그녀가 아까와 다르게 나름 우아하게 걸으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니가 웃으면서 자신을 맞이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왔는데 현실은 달랐다.
“지금 그 여자를 끼고 나간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그녀 앞에는 가슴이 큰 여인의 허리를 손으로 감싸며 나가려는 아버지와 이를 막아서는 어머니가 있었다.
“업무 다 끝냈는데 왜 여기에 있어야 한다는 거야! 나는 나갈 거니까 막지 마!”
남편의 뻔뻔한 작태에 백작 부인은 순간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곧 머리에 두통이 나는지 손으로 머리를 눌렀다.
아버지가 또 사고를 쳤구나.
딱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병사들의 갑옷이 200개가 새로 필요한데 20개로 잘못 써진 내용을 그대로 진행할 뻔했어요! 다른 서류들도 그런 오류가 있을지 모르는데 그냥 이대로 나가시다니요!”
“어허! 그건 실수였다니까! 다른 것은 완벽하게 확인했다고! 괜한 신경은 쓰지 말고 귀찮게 굴지도 마!”
아버지의 말에 그녀는 ‘진짜 미쳤구나’ 싶었다.
실수가 하나 발견된 상황부터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뭔 자신감으로 자신이 한 나머지 서류들은 완벽하다고 확신하는지 모를 일이다.
“제가 이번만 그랬으면 말을 하지도 않아요!”
백작 부인이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보통 부모가 싸우면 얼른 도망을 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녀는 하나하나 경청했다.
그녀가 일반인과 다름을 알게 해 주는 모습이다.
백작은 정말 한결같은 분이다.
“작년에는 가뭄 때문에 피해를 본 영지민들을 지원한다는 서류를 누락하고는 넘어갔잖아요! 그때 빨리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영지민들이 봉기를 했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요!”
한결같이 무능했다.
가뭄에 영지민들이 피해를 본다는 것은 누구나 알 만한 상황이었다.
그에 관련된 서류가 없으면 직접 명령을 내려서 작성하게 했어야지… 없다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 말이 되는가.
뭐, 아버지라면 서류를 자기가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확인도 하지 않고 버렸을 사람이기는 하다.
“왜 작년 일을 들먹여! 다 잘 처리되었으면 되었지 말이야!”
한결같이 개념이 없었다.
설마 자기가 잘 처리했다고 믿는 것인가?!
그때 당시 어머니가 걱정되어서 확인하지 않았다면 그냥 넘어갔을 일이다.
그러면 일이 더 커졌겠지.
그녀가 아버지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다.
“나를 그리 못 믿겠으면 그대가 확인하면 되겠군.”
“그게 지금 가문의 주인이라는 사람이 할 소리인가요!”
백작의 무책임한 말에 백작 부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도무지 한 가문을 이끄는 자가 할 말로 들리지 않았다.
“더는 이런 일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그리니까 비켜.”
영지 운영과 관련하여 서류를 재확인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것을 시간 낭비라고 표현했다.
전쟁이라도 나지 않는 이상에 영지 운영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안 된다고요. 악!”
백작 부인을 밀치는 바람에 그녀가 넘어지고 말았다.
아내의 모습에 사과할 것도 같으나 그것은 백작을 과대평가하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내가 비키라고 했을 때 비키면 좀 좋아. 에잇!”
그는 자기 갈 길을 가려고 했다.
“아잉, 날을 잘못 잡았나 봐요. 저 그냥 갈까요?”
고급 창부로 추측되는 여인이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백작에게 달라붙었다.
날을 잘못 잡은 줄 알았으면 알아서 사라질 것이지 꾸역꾸역 여기서 싸움을 다 지켜보며 있었다.
정말 힘이 있었다면 뺨이라도 후려갈겼을 것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내가 너랑 만나려고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고 그러는 것이야.”
아버지를 말이다.
창부야 직업이니까, 돈을 받은 값을 해야 하니까 기다리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영지를 위해서, 아내의 조언을 존중하기 위해서라도 창부와의 나들이를 취소해야 마땅했다.
“너와 만날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음이 바뀌었다.
힘이 있었다면 최대한 고통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창부 앞에서 어머니의 권위를 바닥으로 떨어지게 했다.
자신의 자랑스러운 어머니에게 수치심을 줬다.
자신이 사랑하는 어머니를 창부보다 아래에 뒀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고는 얼른 다시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자신이 그 쓰레기 같은 아버지의 짓거리를 다 봤다는 것을 어머니가 알면 슬퍼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좀 이따가 다시 들어가자.”
“저는 괜찮습니다.”
저런 개념이 없는 인간이 계속 가문의 가주 자리를 지켰다가는 집안이 망할 것이 자명했다.
그녀가 밖에 앉아서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가 저런 개념도, 능력도 없는 작자가 가주가 되고 어머니의 남편이 되었을까?”
신께서 깊은 생각이 있어서 저런 작자를 만드신 것이겠지만 아직은 그 뜻을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