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복하거나, 죽거나-1화 (1/221)

001화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는 법이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는 법이다.

이 이야기는 라스타 왕국의 한 영애로부터 시작된다.

이 이야기는 라스타 왕국의 한 영애가 주인공인 피폐 판타지 소설 속 이야기다.

루비로즈 백작 가문인 그녀는 흰 눈을 연상케 하는 하얀 피부를 가졌고 입술은 사과보다도 더 붉었다.

눈은 작은 아기사슴처럼 초롱초롱 빛났다.

그런 그녀가 웃는 얼굴로 고용인들과 인사를 하며 지나가면 사람들은 말했다.

“어쩜 저리도 사랑스러우실까?”

“그러게… 정말 이야기 속에 나오는 요정이 저렇게 생겼을까?”

“어린 나이에도 정말 순하시고 다정하시다니까.”

영애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보였다.

* * *

아쉽게도 사람은 누구에게나 단점이 있다.

페루제 루비로즈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루비로즈 백작 부인은 자신이 남들과 조금 다르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딸이 아주 많이 다름을 인정해야 했다.

그것은 비가 내리는 어느 날이었다.

그녀는 페루제 루비로즈와 연극을 보러 갔다.

연극은 원수 가문의 아들과 딸이 서로 사랑을 하면서 생기는 비극을 다루었다.

두 남녀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슬퍼하면서 자살하는 것이 결말이다.

슬프고, 애절했으며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백작 부인은 손수건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았다.

그러면서 딸의 눈물도 틈틈이 닦았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보니 어느새 연극이 끝났다.

짝! 짝! 짝!

객석에서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서 손뼉을 쳤다.

배우들이 그 호응에 화답하듯이 화려한 포즈로 인사를 했다.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더 좋은 연극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배우들의 인사를 보다가 백작 부인은 딸에게, 딸은 백작 부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모녀의 눈은 토끼처럼 붉어져 있었다.

“페루제, 토끼처럼 눈이 빨개졌구나.”

“어머니도 그러신 걸요.”

그녀들은 서로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페루제 루비로즈는 붉은 얼굴로 마차에 탔다.

연극을 보면서 느꼈던 흥분이 아직 진정되지 않은 모양새였다.

백작 부인이 딸의 얼굴을 부채질하면서 입을 열었다.

“얼마나 열중을 했으면 이렇게 얼굴이 붉어졌을까? 즐거웠니?”

“네, 정말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만큼 좋았어요. 어머니는요?”

다리를 흔들면서 즐거워하며 작은 새처럼 조잘거렸다.

“그래. 나도 좋았어. 죽어서라도 따라가고 싶은 사랑이라니 말이야. 슬펐단다. 그래서 더 아름다운 거겠지. 물론 우리 딸은 그런 사랑은 하지 말고 행복한 사랑을 해야지.”

그 말을 하며 백작 부인이 페루제의 코를 작게 만졌다.

그녀는 잠시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저도 슬펐어요. 안타까워서요.”

백작 부인은 ‘그래. 이룰 수 없는 사랑이 안타깝지.’ 라고 말하려고 했다.

먼저 딸이 입을 열지 않았다면 말이다.

“저런 민폐들은 자살이 아니라 죽임을 당했어야 했는데 말이에요.”

“뭐?”

어머니의 멍한 얼굴은 보지 못하고 그녀는 자기 할 말을 했다.

“자기들의 사랑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것들은 싹 다 잡아다가 땅에 파묻어 버려야 하는데 아쉬워요.”

“아까 너도 울었잖니?”

“주변 사람들 말은 듣지도 않고 사랑을 핑계로 일을 만들잖아요. 그런 것들에게 그동안 먹인 음식 값이 아까웠다니까요. 제가 그들을 키운 것도 아닌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너무 몰입했나 봐요.”

그 이후 백작 부인은 딸에게 신경을 쏟았다.

페루제 루비로즈가 감정을 못 느끼는 것은 아니다.

다행히도 그녀는 슬픔, 기쁨, 분노 등을 골고루 느낄 줄 알았다.

그리고 곧 자신의 딸이 남들과 어떤 부분이 다른지 알게 되었다.

“어머니, 더프가 죽었어요. 너무 슬퍼요.”

더프는 루비로즈 백작 가문의 사냥개 중 한 마리였다.

유독 페루제가 아끼는 개였다.

그녀가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을 닦아 주면서 위로를 해 줘야 할 정도로 슬퍼했다.

모두가 아끼던 개가 떠나서 슬퍼한다고 생각했다.

백작 부인도 연극을 보고 나눈 대화가 없었다면 그리 넘어갔을 것이다.

그녀는 방에 딸만 두고 모두 나가게 했다.

“아까 왜 그리도 슬펐니?”

“더프요?”

“그래. 더프가 죽었는데 왜 슬프니?”

“쓸모가 있었는데 죽었잖아요. 그 아이도 자신이 쓸모를 다하지 못해서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페루제 루비로즈는 감정을 느끼는 포인트가 남들과 달랐다.

그녀는 더프를 다시는 만날 수 없어서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었다.

더프가 자신의 쓰임을 다하지 못해서 슬퍼했다.

그동안 무심코 넘겨 왔던 일들을 후회해 봤자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왜 이런지, 그 계기가 있는지 물어본다면 설명할 길이 없다.

그것은 타고난 성향이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생기는 성향이다.

가령 새로운 것을 보면 낯설어하며 거부하는지,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가는지, 변한 환경에 적응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등이 그 성향과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서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는 것도 상대를 수단으로 보고 그것이 잘 되는지에 따라 가치를 평가하는 것도 선천적인 것이다.

신께서 이유가 있어서 페루제를 이렇게 탄생을 시켰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마음 편했다.

백작 부인은 딸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방도를 찾아야 했다.

그 방법으로 백작 부인은 종교를 택했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자애와 자비를 원칙으로 하니까, 그들과 소통하다 보면 아이도 변할 것이라 믿었다.

여기서 백작 부인의 실책이 있었다.

대신관과의 면담에서부터 일이 꼬여 버렸다.

단아하며 깨끗한 흰색의 벽과 오랜 역사가 깃든 듯한 가구들은 그의 연륜을 나타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애가 어린 나이부터 신관에게 직접 성서를 배우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혹시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제가 세상을 살아 보니 신의 말씀이 마음에 위안이 되는 때가 많더군요. 페루제도 힘이 들면 위안이 될 무언가를 남겨 주고 싶습니다.”

“신의 말씀이 마음을 든든하게 하고 힘을 주지요.”

그녀는 딸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치부로 여겼다.

귀족들이 원하는 신붓감과 다른 아이였으니까.

아이의 미래를 위해 감추기를 선택했다.

당연히 신관들은 그녀가 남들과 같다고 여겼을 것이다.

모녀는 에클레시아 교단의 신전에 자주 출입했으며 그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루비로즈 가문의 문양이 있는 마차가 오면 신관들이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나왔다.

“또 이렇게 거금을 매번 기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저희 딸에게 성서를 가르쳐 주시는데 이 정도는 해야죠.”

“이렇게 신실한 분을 만나게 되다니 신께서 뜻이 있으시겠지요.”

거금을 바치는 신자를 마다할 신관은 없었다.

그들은 백작 부인에 이어서 페루제 루비로즈도 신실한 신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녀를 가르치는 데 열과 성을 다했다.

백작 부인이 예상하지 못한 패착이다.

백작 부인은 신전 밖의 정원을 산책하는 동안에 그녀는 어떤 교실에 있었다.

예비 신관들을 위한 교실이었다.

그곳에는 노회한 신관 하나와 영애 둘만 있었다.

신관의 말을 경청하던 페루제 루비로즈가 손을 들었다.

“에클레시아는 자비와 자애가 함께하는 종교가 아닙니까? 살아생전에는 자비와 자애를, 벌은 죽어서 지옥에서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벌을 내리는 것은 신관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언제나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답을 듣는 것을 귀찮아하지 않았다.

“영애, 내가 물어보지요. 한 도적이 있습니다.”

그가 칠판에 사람들을 그렸다.

칼을 든 사내가 한 가족을 위협하고 있는 그림이다.

“그 도적은 나쁜 사람일까요?”

신관이 물음표를 그렸다.

“네, 나쁜 사람이에요.”

영애는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왜요?”

“남의 것을 허락도 없이 빼앗았으니까요.”

말에는 거침이 없었고 신관은 만족하며 웃었다.

자신의 말에 집중하며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으니까.

그가 칠판에 그림을 더 그렸다.

고통 받는 가족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맞습니다. 그러면 억울하게 빼앗긴 사람의 고통을 외면해야 할까요? 그 도적으로 인해 앞으로 생길지 모를 고통을 외면해야 할까요?”

“아니요.”

그가 그림들을 지우고 다시 새로운 것을 그렸다.

구름 위에 있는 신과 칼을 든 죄인이었다.

“신께서는 살아 있는 동안에 여러 사람을 구원하고 죄진 자를 회개시키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죄진 자를 방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가 신과 죄인 사이에 무언가를 그렸다.

그것은 번개였다.

신이 번개로 죄인을 혼내 주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고 그가 그녀를 바라봤다.

“무지한 이들은 올바른 길을 알려 줘도 무서워하며 거부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외면합니까?”

“아니요.”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는 학생을 보며 그가 말을 계속했다.

“벌이라는 강요된 방법을 써서라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벌’을 가장 잘 적용하는 분야가 있었다.

“그러면 법도 그 말씀에 따라 생긴 것이겠네요.”

“맞습니다.”

그녀가 이해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법이 신의 말씀에 따른 것이라면 왜 부당하다고 욕을 먹는 것인가요?”

법이 신의 말씀에 따른 것이라면 완벽해야 했다.

누구도 그에 대해 불만을 품어서는 아니 될 일이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이유도 성서에 있습니다. 죄에 합당한 벌을 내리면 죄인은 그 죄를 뉘우칠 것이며 죄 이상의 벌을 내린다면 엇나가게 될 것이라고 하셨죠.”

“죄에 맞는 벌을 내려야 되는군요.”

그녀가 노트에 꼼꼼하게 신관의 말을 적었다.

신전에서의 수업은 중요한 가치관을 심어 주고 있었다.

백작 부인이 알면 기겁할 수업이다.

“죄인 중 대부분이 말로는 깨닫지 못하니 그에 맞는 벌이 필요하다는 것이 신의 말씀이죠.”

신관이 뿌듯해하며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라면 독실한 신자가 되는 것은 확정이리라.

“신께서는 자신을 믿는 자는 천국에 간다고 하셨습니다. 죄인들도 신을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가는 것인가요?”

“많은 사람이 하는 오해지요. 무엇이든 진실이 중요합니다. ‘진실로’ 신을 믿고 ‘진실로’ 죄를 뉘우치는 자들이 천국에 가는 것이지요.”

“그것을 어떻게 아나요?”

“그들의 행동이 근거가 되고 진실이 될 것입니다.”

백작 부인은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의 딸이 자애와 자비 말고 다른 것들을 배운다는 사실이다.

예배만 참여하고 깊게 성서를 공부하지 않은 탓이었다.

같은 종교라도 그 안의 파벌이 있다.

성서의 해석에 따라 각자가 중요시하는 것이 달랐기 때문이다.

하필 그녀를 가르친 신관은 성서의 벌에 대해 중요시하는 종파에 속해 있었다.

딸이 배우길 원했던 것과 상반되는 것들을 배우도록 한 것이다.

페루제 루비로즈에게 벌이란 죄 없는 자들을 지키고 죄 있는 자들을 회개시키는 수단이 되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가르침은 그뿐만이 아니다.

“죄 없는 자들이 엇나가지 않도록, 죄 없는 자들이 현재에 만족하도록 보상을 내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신전에서 상에 대한 것도 배웠다.

페루제 루비로즈는 신전을 제집처럼 느낄 정도로 자주 방문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마지막 수업까지 하게 되었다.

“에클레시아가 널리 널리 퍼지면 세상이 좋아지겠지요. 저도 신관님들처럼 전도하고 교단을 지키도록 노력할게요. 그러면 세상이 아름다워질 것이니까요.”

“좋은 마음가짐이십니다. 가르친 보람이 있는 학생이었어요.”

그녀는 어머니의 바람처럼 신실한 신자가 되었다.

백작 부인이 원한 것 중에 그것 하나만이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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