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235화 (235/236)

# 235

72 - 2

3월 2일 토요일

아카데미 시상식이 있기 전날 밤.

수빈 일행은 저녁 식사 이후로 각자의 방에서 휴식을 취하며 조용하게 보내고 있었다.

수빈 일행이 LA에 도착한 금요일 저녁부터 다음날 저녁까지, 아카데미 여러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동양인 일색의 그들에게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덕분에 이틀 동안 각종 매체와 인터뷰를 하고 유명인사들과 만남을 가지느라 파김치가 된 일행들은, 각자의 방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체력을 회복하며 내일의 시상식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화려한 수빈의 방에서는 거하게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봐. 나에게는 말해줄 수 있지 않은가."

집요하게 파고드는 박사장에게 수빈이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대꾸했다.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샛별이와 전 친한 오빠 동생 사이일 뿐입니다."

"수상해. 아카데미 후보작 인사 만찬회에 다녀온다며 둘이서 손잡고 미국을 다녀온 이후로 말이야. 둘 사이에 뭔가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단 말이지. 썸이라도 타고 있는 겐가?"

"누가 누구의 손을 잡았다는 말입니까? 그런 적 없습니다. 그리고 저 몇 개월 후면 군에 입대할 놈입니다. 잘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그래? 하지만 나의 날카로운 눈은 못 속여. 젊은 청춘 남녀가 단둘이 여행을 다녀왔는데 아무 일도 없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암. 그렇고말고."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시고.. 하던 사업 이야기부터 마저 끝내죠. 뱅상 회장이 지루해 하잖아요."

느긋하게 술잔을 들며 구경하고 있던 뱅상 회장이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전혀 안 지루해. 강감독이 그녀랑 사귀고 있는 건가? 이번 아카데미에 참석한 아시아의 여신이라는 그녀 말이야."

수빈이 참다 참다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노친네들이 젊은 애들 연애사에 무슨 관심이 그리 많습니까? 그리고 저와 샛별이는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그만 좀 하세요. 자꾸 그러면 방에서 다 내쫓아버릴 겁니다."

박사장이 입맛을 다셨다.

"알았어. 어차피 감기와 연애는 숨길 수 없는 법.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알게 되겠지. 근데 뭐 하나 물어보자고. 저번 MOU 건도 그렇고 왜 이렇게 컨소시엄에 열을 올리는 건가? 물론 컨소시엄을 하면 당연히 좋은 점이 많이 있겠지. 그걸 몰라서 그러는 게 아냐. 강감독 혼자서도 충분히 잘 해나갈 수 있을 거 같은데, 굳이 다른 업체들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수빈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 한 번씩 예전 세상과 현세를 비교하는 걸 좋아합니다. 그러면 앞으로 제가 나아갈 길을 모색하기가 쉬워지니까요. 재밌는 게 말입니다. 세월이 그렇게 흐르고 과학이 발전해서 인간이 달에 가는 지금 이 세상에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게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먹고사는 게 여전히 힘들다는 거죠."

박사장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소리지. 과학이 급격히 발전한 만큼 인간의 숫자도 급격히 늘어났네. 그러니 여전히 힘들 수밖에.."

"맞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문제죠. 사람들은 흔히 이상향(理想鄕)을 말합니다. 무릉도원, 가나안 심지어 에덴동산까지.. 하지만 그 모든 곳의 공통점이 뭔지 아십니까? 먹을 걸 손쉽게 구할 수 있다는 겁니다. 가나안 땅에는 젖과 꿀이 흐르고, 무릉도원에는 복숭아가 지천에 피어 있으며, 에덴동산에는 과실수가 풍부하다고 설명하고 있죠. 즉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우선이라는 겁니다. 행복은 그다음 문제죠."

수빈의 말에 뱅상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서양 옛말에 친한 친구를 노예로 부려먹어도, 잘 먹이고 잘 입히면 반역을 꿈꾸지 않는다고 했었네. 그만큼 먹고사는 게 중요하다는 소리겠지."

"그래서 전 제가 거느리는 직원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자신이 맡은 일에 열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기 때문이죠. 근데 말입니다. 과거와 현세가 완전히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가?"

"예전에 한번 말씀드렸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 독불장군은 성공할 수 없다고요. 플라톤이라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하죠? 완벽한 정치란 뛰어난 철인(哲人)이 통치하는 전제정치라고요. 물론 깊이 파고들면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조금 다르기는 합니다만, 그런 비슷한 뜻의 말이 한국에도 있습니다. 성군(聖君)이 탄생하면 나라가 태평성대를 이룬다고 말이죠. 전 그러한 말들의 뜻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한 명의 뛰어난 인재가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고 말이죠. 이걸 역으로 해석하면.."

수빈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그만큼 그 시대의 일반 대중들이 못 배우고 미개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완전히 다르죠. 흔히들 요즘 세상을 집단지성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일반 대중들 한 명 한 명이 예전 세상의 뛰어난 학자에 버금 될 만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세상이 돼버렸습니다. 이제는 철인이나 성군 따위가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어 버린 거죠. 그래서 저도 집단지성의 힘을 원하는 겁니다. 저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중국의 청톈, 미국의 UMG, 프랑스의 LVMH 등 저와 인연이 닿은 업체들의 힘을 모아, 세계 엔터테인먼트 시장을 우리들의 손아귀에 넣고자 하는 겁니다. 제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은 모든 걸 저 혼자서 다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이 절대 아닙니다."

박사장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무슨 말인 줄은 알겠는데.. 자네는 언제쯤 그 버릇을 고칠 건가? 제 버릇 뭐 못 준다더니.. 예나 지금이나 말을 장황하게 하는 나쁜 버릇이 있어. 샛별이랑 결혼을 해야 고쳐지려나.."

수빈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와락 소리쳤다.

"아! 좀!"

수빈이 화를 내자 박사장이 손을 흔들었다.

"알았어. 내가 그만하지. 근데.. 뱅상 회장님?"

"네. 말씀하시죠."

"LVMH는 우리와 무조건 함께 하겠다는 뜻을 내보였다고요?"

"네. 맞습니다. 비록 델핀이 바빠서 오늘 부득이하게 참석을 못 했지만, 저에게 자신의 뜻을 전해달라고 말을 전해왔습니다."

박사장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수빈을 보았다.

"그럼 청텐은? 그쪽은 왜 안 부른 거야? 청톈도 같이 컨소시엄을 하겠다면서 이 자리에 안 부른 이유가 있나?"

"제가 원하는 정도의 성과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최소한 10년 정도의 시간이 걸릴 거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10년이라.. 근데 그거랑 청톈과 무슨 관계가 있나?"

"당장은 청톈과 컨소시엄을 하지 않을 겁니다. 그쪽의 권력구조가 우리와 컨소시엄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욕심이 너무 과해요."

"그럼 언제 하겠다는 건가?"

"3년. 3년 이내에 그쪽 최고 권력자가 바뀔 거라고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때쯤 제가 바라는 사람이 최고 권력자가 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요. 그렇게 되고 난 다음 청톈을 컨소시엄에 끼워 넣을 생각입니다. 지금은 시기상조입니다. 더 이상 자세한 건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이런.. 강이사가 미래도 내다보는줄은 몰랐군."

수빈이 쓰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 제가 죽는 날도 맞추지 못하는 놈입니다. 하지만.. 90이 다 된 노친네가 언제쯤 세상을 뜰지 정도는 대충 예상할 수 있죠."

뱅상 회장이 고개를 흔들며 끼어들었다.

"강감독이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군. 청톈 회장이 아직 나이가 중년인 걸로 아는데.. 아무튼 당분간은 수박 프로덕션, YK, UMG, LVMH. 이렇게 컨소시엄을 형성하자는 거지? 청톈은 몇 년 후에 끼워 넣기로 하는 거고. 맞지?"

"정확합니다."

"그럼 이 자리에서 개략적이나마 장기적인 목표와 계획을 정리해 보자고. 다들 바쁜 사람들이라 언제 또 이렇게 모일지 모르니 말이야. LVMH의 델핀 아르노는 나와 같이 행동을 하기로 했으니까, 회의 결과를 내가 따로 전달해 주겠네."

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일단 제 목표는 10년 이내에 훌루와 유니버설 스튜디오 그리고 디즈니를 먹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OTT 시장과 영화 시장 그리고 애니메이션 시장을 우리가 장악하는 거죠. 뭐 100 프로야 불가능하겠지만, 우리가 시장의 흐름을 주도하는 역할은 충분히 가능해 질겁니다."

뱅상 회장이 감탄을 터뜨렸다.

"호오. 목표가 어마어마하군. 내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거창한데.. 계획은 있나?"

"당연히 있죠. 일단은...."

세 사람의 비밀스러운 회담이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회의를 다 끝내고 방을 나가려던 뱅상 회장이 수빈을 보며 물었다.

"일전에 내게 부탁했던 일 말일세. 내일 언급할 생각인가?"

"상을 받으면 당연히 언급을 해야죠. 그게 도리 아니겠습니까? 도움을 받았으면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죠. 뭐 상을 못 받으면 못 하겠죠."

"그래. 잘 생각했네. 그러는 게 미래를 위해서도 좋을 거야. 올해는 그쪽에서 어찌어찌 조용히 넘어가 줬지만, 또 이런 일이 있으면 그쪽에서도 가만있지 않을 걸세. 원래 기자라는 인간들은 성격들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고. 자존심도 세고, 고집도 세단 말일세. 조금이라도 달래줄 필요가 있어."

"알고 있습니다. 제 의견을 그쪽에 오해 없이 잘 전달해준 회장님께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그럴 필요 없네. 나와 자네는 같은 편이지 않은가."

뱅상 회장이 수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후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다음 날 수빈은 일행들과 함께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해서, LA 돌비 극장 좌석 앞쪽에 앉아 있었다.

수빈과 김샛별, 성강호, 정도연 이렇게 네 명이 한줄에 앉아 있었고, 그 뒤쪽에는 박수종 영상감독, 박형성 음향감독, 오상무 이렇게 3명이 앉아 있었다. 하이유는 미리 잡힌 콘서트 일정 때문에 참석을 하지 못했다.

저 멀리 뒤쪽에 앉아 있는 박사장과 제작 부서 직원들을 바라보며 수빈이 중얼거렸다.

"작품상을 받아야 다들 단상에 올라가 볼 텐데 말이야."

주먹을 불끈 쥔 샛별이 단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빠. 우리가 꼭 받을 거예요. 라이프 보다 훌륭한 영화는 없다고요."

수빈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거야 우리 생각이지. 아무튼 받았으면 좋겠다. 이제 슬슬 시작하나 보다."

화려한 개막 공연과 함께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흘러 남우조연상을 시작으로 분장상, 의상상이 발표되었고, 다큐멘터리 작품상 수상자가 소감을 말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수빈이 긴장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시작이로군."

"뭐가요?"

"작년하고 순서가 똑같다면, 다음이 사운드 쪽 관련 수상이야. 에디팅 분야랑 믹싱 분야."

"아. 그럼 음향편집상이 다음에 발표되는군요?"

"그래. 제발 하나라도 받아 가야 할 텐데 말이야."

잠시 후 무대에서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올해의 사운드 에디팅 상은.. 라이프의 박형석에게 돌아갔습니다. 축하드립니다."

- 우와아아아!

- 대애박! 오스카다!

- 받았어! 받았다고!

- 한국 최초라고!

수빈을 비롯한 라이프 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환희에 찬 괴성을 지를 때, 수빈은 자신에게 다가와 포총을 청하는 박형석 음향팀장과 깊은 포옹을 하며 소곤거렸다.

"울지 마세요. 환갑이 다 된 분이 울면 집에 있는 손자들이 흉봅니다. 당당하게 하고 오세요,"

잠시 후 무대 위에서 필름 릴 위에 칼을 짚고 서 있는 기사 모양의 오스카를 거머쥔 박형석 팀장이, 눈가가 벌게진 채 여러 사람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그런 후 짧게 한숨을 내쉰 다음 차분하게 수상 소감을 말했다.

"한류라는 이름의 한국의 아이돌 시스템에 대해서 아시는 분들이 제법 계실 겁니다. 그들을 볼 때마다 전 항상 매미가 떠오릅니다. 몇 년을 땅속에서 날아오를 때를 기다리다, 지상에 올라와서 보름 남짓 살고 세상을 떠나는 매미 말입니다. 몇 년을 연습생 생활을 하다 잠깐 반짝 빛을 내고 사라지는 아이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바쁩니다.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수익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하루에도 수많은 무대에 서야 하기 때문이죠.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그런 젊은 친구들에게 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음악적인 소양을 기대하는 건 사실상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근데.."

잠시 말을 끊은 박팀장이 감정을 추스르며 말을 이었다.

"그건 제게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음향감독을 맡고 있는 한 무대에서, 한 젊은 아이돌 친구가 제게 다가와서 말을 건네더군요. 음향 상태가 너무 형편없다고요. 전 속으로 그 젊은 친구를 비웃었습니다. 네까짓 게 음향이 뭔지 알기나 해? 내가 나름 노력해서 최선의 상태로 만든 음향 상태야. 아이돌 주제에 감히 말이야..라고 하면서요. 그래서 하나도 변경하지 않은 채, 똑같은 사운드를 다시 들려줬습니다. 수정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요. 그때 그 친구가 절 빤히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박팀장이 마치 성대모사를 하던 말했다.

"음향감독님. 아까랑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데요?라고 말입니다. 그때 바로 깨달았습니다. 내가 무시한 이 아이돌 출신의 청년이 진짜배기라는 걸 말입니다. 그리고 기대감에 설레며 같이 작업을 하기 시작했죠. 즐겁고.. 흥겹고.. 신이 나는 작업이었죠. 참으로 뛰어나고 천재성이 번뜩거리는 청년이었습니다."

박팀장이 수빈이 앉은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제게 연락을 해오더군요. 본인이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영화사를 차린다고 말이죠. 그리고 저랑 같이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제의를 해왔습니다. 그 친구는 아직도 모를 겁니다. 그날 제가 와이프에게 얼마나 혼이 났는지를 말입니다. 제가 너무 기뻐서 어린아이처럼 집안을 마구마구 뛰어다녔거든요.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같이 일을 시작하고 영화를 제작했는데.. 설마 제가 이 자리에서 오스카를 받을 줄이야.. 이제는 아이돌보다는 영화감독으로 더 유명하죠. 강수빈 감독에게 진심으로 감사와 존경을 보냅니다. 덕분에 손자들에게 자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박팀장이 오스카를 힘차게 치켜들더니 목이 메인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얘들아! 이 할애비가 오스카를 받았다!"

관객석에서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고, 무대에서 자리로 돌아가던 박팀장이 수빈에게 정중하게 악수를 청하였다. 수빈이 박팀장의 손을 힘차게 부여잡으며 축하의 말과 포옹을 해주었다.

옆에서 훌쩍거리고 있는 샛별에게 조용히 말했다.

"뭘 그렇게 우냐? 카메라가 자꾸 우리 쪽을 잡는데 울면 어떡해."

"그냥 계속해서 눈물이 나네요."

"그만 울어. 아직 상은 많이 남았으니까.."

"알았어요. 오빠."

시간이 흘러 특수효과, 애니메이션 단편과 장편, 시각효과 상의 발표가 끝났다. 무대 위에서 필름 에디팅 상이 발표되고 있었다. 아쉽게도 라이프가 수상에 실패했다. 한숨을 길게 내쉰 수빈은, 뒷좌석으로 몸을 틀어 박수종 감독에게 악수를 청하였다.

"박팀장님. 아쉽지만.. 내년을 기대합시다. 사실 라이프는 영상이 화려한 게 아니라서요. 헤이즈 때는 꼭 받으실 겁니다."

수빈의 손을 꼭 잡은 박수종 감독이 대답했다.

"노미네이트 만으로도 영광입니다. 그리고 내년에 못 받아도 전 상관없습니다. 계속해서 대표님과 같이 일만 할 수 있다면, 상 따위는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전 영어 울렁증이 있어서요. 안 받으니 오히려 맘이 편하네요,"

"그래도 받는 게 좋죠. 내년에 두고 보자고요."

이윽고 여우조연상을 시작으로 다큐멘터리상, 각색상, 각본상, 촬영상, 음악상 등의 수상이 줄줄이 진행되었다. 샛별이 조심스럽게 수빈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오빠. 이제 뭐가 남은 건가요?"

샛별의 물음에 수빈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아카데미의 본상이라고 할 수 있는 상들만 남았지.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작품상. 이렇게 네 개 남았어. 진정한 아카데미는 지금부터 시작이야."

긴장한 티가 역력한 샛별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우리가 노미네이트된 것 중에 감독상, 남우주연상, 작품상이 남은 거죠?"

"그렇지."

"우리가 다 받을 수 있겠죠? 특히 남우주연상은 오빠가 확실할 거예요. 오빠 연기는 정말 사람의 연기가 아니었다고요."

수빈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샛별아. 여긴 미국 할리우드야. 텃세와 인종차별이 심하기로 유명한 곳이라고. 그리고 신인배우에게 아카데미가 남우주연상을 쉽게 줄 거 같아? 아카데미 회원들이라는 작자들이 얼마나 보수적이고 고루한지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인데.. 경력이 어느 정도 쌓이기 전에는 배우 취급도 잘 안 하는 사람들이라고. 내가 보기에는 남은 3개 중에 1개만 수상해도 성공한 거다."

"너무해요!"

"그래서 아까 박형석 팀장이 받은 게 중요한 거야. 하나라도 건졌으니 우리도 체면치레는 했으니까. 난 하나도 못 받고 돌아갈 확률이 50 프로 이상이라고 생각했어."

"혹시.. 둘이 사귀냐?"

옆에 앉아 있던 성강호가 놀랍다는 표정으로 물어보자, 수빈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형님."

"근데 아까부터 둘이서 뭘 그렇게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거야? 남들이 보면 연인인 줄 알겠다. 곧 있으면 감독상 발표라고."

"네. 알겠습니다. 형님."

잠시 후 무대 위에서 감독상 발표가 있었다.

- 올해의 감독상은.. 두구 두구 두구.. 라이프의 강수빈! 축하드려요!

- 꺄아아악!

- 우와아아.

- 축하합니다.

- 짝짝짝짝.

사람들의 비명과도 같은 환호성과 기립박수 속에, 이제야 한숨 돌렸다는 표정의 수빈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행들과 순서대로 포옹을 한 수빈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무대 위로 걸어갔다.

- 강이사. 최고다!

- 대표님. 짱짱짱!

- 사랑합니다!

저 멀리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박사장과 제작 부서 직원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수빈은 보무도 당당하게 무대로 올라가 감독상을 받았다.

무대의 마이크 앞에 선 수빈이 입을 열었다.

"제가 노미네이트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제가 제일 먼저 한건 랩을 열심히 연습하는 거였습니다."

객석의 사람들이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을 지을 때, 수빈이 마치 속사포 랩을 하듯 빠른 속도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먼저 상을 주신 아카데미 회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수상 소감이 짧은 사람에게 제트 스키를 준다고 해서 열심히 연습을 하고 왔는데 올해는 그 제도가 폐지가 되었나 보군요. 진정으로 아쉽습니다. 개인적으로 제트 스키가 정말 탐났었는데 말입니다."

- 와하하하.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수빈이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 기회에 한 단체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 둣 합니다.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지인에게 아카데미 전초전이라고 불리는 골든글로브에 제가 노미네이트될 확률이 높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근데 불행히도 그때가 제가 헤이즈 영화를 개봉하는 시기와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할리우드 권력자들의 간섭을 배제하고, 상업성보다는 작품성을 최우선으로 해서 수상을 한다는 골든글로브의 취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행여나 저의 골든글로브 노미네이트가, 헤이즈를 선전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과 우려가 제게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제 작품을 심사에서 빼주십사 정중히 부탁을 드렸습니다. 오해 없이 제 뜻을 이해해주신 그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고개 숙여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잠시 호흡을 고르던 수빈이 오스카 트로피를 물끄러미 쳐다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또 한 분께 사과의 말씀을 드려야 하겠군요. 라라랜드를 감독하신 다미엔 차젤레 감독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다미엔 감독의 팬입니다. 라라랜드와 위플래시는 제게 수많은 영감을 준 훌륭한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저 때문에 아카데미 최연소 수상자라는 타이틀을 잃어버리게 되셔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수빈이 관객석을 바라보며, 초여름 햇살처럼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카데미 역사상 최연소 감독상 수상자는 이제 저 강수빈이 되었으니까요."

- 짝짝짝짝.

- 휘이이익!

- 멋지다!

사람들의 박수와 휘파람 속에 수빈이 마지막 소감을 말했다.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직업 중에서, 영화감독이라는 멋진 직업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신 어딘가에 있을 신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제게는 신보다 더 소중한 캐나다에 있는 어머님께 감사드립니다."

수빈이 오스카 트로피를 공중으로 높이 치켜들며 우렁차게 외쳤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뜨거운 박수 속에 무대에서 내려온 수빈은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결국 수빈은 남우주연상 수상에 실패했고, 라이프는 작품상 수상을 받지 못했다. 내년을 노려보자며 일행들을 다독인 수빈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

인천 국제공항에서부터 시작된 환영 인사가 일주일이 넘게 진행되었다. 겨우 좀 진정이 되자, 수빈은 학업과 뮤지컬 완성에 전력투구하며 시간을 보냈다.

5월 24일 금요일

뉴욕 브로드웨이에 무대에 올라간 수빈이 관객들의 기립박수를 받고 있었다. 성공적으로 뮤지컬을 론칭시킨 수빈은 한국으로 돌아와 현역으로 자원해서 군 입대 신청을 하였다.

8월 1일 목요일

사람들의 배웅 속에 훈련소로 들어가는 수빈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대주천이 생각보다 너무 오래 걸리는군. 결국 전방으로 가야겠어.'

전방 철책 근무를 서는 부대에 배치받은 수빈은, 열심히 군 복무를 하며 대주천 완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는 한편, 틈나는 대로 복귀 후 있을 영화제작과 음반 제작을 위해 새로운 각본 집필과 작곡 작업을 하며 지냈다.

2020년 3월 1일 일요일

어느덧 해가 바뀌고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렸다. 사람들의 예상대로 골든글로브에서 6개 부문을 수상한 헤이즈가, 아카데미에서도 6개 부문을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분장상, 특수 과상, 촬영상, 남우주연상, 감독상 그리고 작품상을 수상했지만 군 복무  인 수빈은 시상식에 참석을 할 수가 없었다. 수빈을 신해서 상을 수상한 오상무가 눈물을 흘리며 수빈을 그리워하는 수상 소감이 잠시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2021년 1월 4일 월요일

새로운 한 해를 맞아 수빈은 마침내 대주천에 성공하였다.

2021년 4월 30일 금요일

수빈이 길었던 군 복무를 끝마치고 제대를 하였다.

그리고 빠르게 8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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