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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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급 리무진을 타고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도착하니, 수많은 내외신 기자들이 진을 치고 취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수빈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부터 시작해서 레드 카펫을 걸어가는 내내, 플래시가 연신 터지며 수빈의 일거수일투족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잠시 후 포토존에 도착한 수빈이 포즈를 취하자, 기자들이 폭풍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한꺼번에 워낙 많은 질문이 쏟아지자, 난감해하던 수빈은 중복되는 비슷한 유형의 몇 가지 질문에 간단하게 답변을 해주었다.
- 미국에서의 방송 출연 이후로 강감독이 천재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강감독처럼 머리가 좋아지거나 암기력이 비상해지는 약 같은 게 있나요?
수빈이 어이가 없다는 듯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없습니다. 그런 약이 있으면 제가 벌써 제약회사를 차려서 떼돈을 벌고 있겠죠. 다음 질문?"
- 그래미가 여태껏 백인들에게 편파적으로 상을 준다고 해서 화이트 그래미라고 악명이 높은데요. 강수빈 감독 본인도 동양인이시잖아요? 그래미에서 본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하나요?
"제가 심사위원이 아니라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네요. 하지만 요 근래 그래미가 많은 부문에서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름 기대는 하고 있습니다. 다음 질문?"
- 얼마 전 스크린에서 내린 헤이즈가 결국 역대 흥행성적 1위인 아바타의 아성을 넘지 못했는데요. 거기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헤이즈가 비록 아바타는 넘지 못했지만, 2위였던 타이타닉은 넘어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걸로도 충분히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보다 좋은 작품으로 1위를 노려보겠습니다. 마지막 질문 하나만 더 받겠습니다."
- 한국으로 돌아가시면 군대에 입대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한창 잘나가고 있는 중이잖습니까? 군 입대를 뒤로 미룰 생각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제가 최근 몇 년간 좀 이것저것 여러 개를 한꺼번에 하느라 무리를 많이 했습니다. 저 스스로도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중으로 입대할 겁니다."
수빈은 기자들의 질문 세례를 벗어나기 위해 포토존에서 빠져나와 스퀘어 가든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자신의 자리에 착석한 수빈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젠 미국에서도 함부로 돌아다니기가 힘들겠군. 얼굴이 너무 팔렸어."
잠시 자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으니 본격적인 그래미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작년 제60회 그래미의 본상을 모조리 휩쓴 브루노 마스의 축하 공연을 시작으로, 제61회 그래미 시상식의 화려한 막이 올랐다.
다양한 부문의 수상과 기념 공연들이 줄줄이 진행되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올해의 노래, 올해의 앨범과 함께 그래미의 본상 중 하나로 꼽히는 올해의 레코드(Record of Year) 상 수상자를 발표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무대 뒤에서 제임스 코든과 아델이 모습을 보이더니, 다정하게 손을 잡고 단상으로 걸어 나왔다.
스탠딩 마이크 앞에 선 아델이 옆에 있는 코든을 바라보며 물었다.
"코든. 작년 그래미에서는 객석에서 열심히 중계를 하더니, 어쩐 일로 올해는 단상 위에 올라와 계시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런 추세라면, 아마 내년에는 제가 그래미에서 상이라도 하나 받을 모양입니다."
관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올때, 코든이 아델에게 물었다.
"재작년에 상을 쪼개니 마니 하도 난리를 쳐서, 다시는 그래미에서 못 볼 줄 알았는데.. 어떻게 다시 나오시게 된 건가요?"
"올해는 제가 노미네이트된 부문이 하나도 없어서, 사고 칠 위험성이 없다고 그래미에서 판단을 했나 보죠. 그리고 얼마 전부터 제 아들과 제가 동시에 열성팬이 된 아티스트가 한 명 있어요. 그 사람이 그래미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들었죠. 그래서 제가 아들 몫까지 사인을 받아 가기 위해 나왔어요."
"그렇군요. 잘 하셨습니다. 근데.. 그 아티스트가 누구죠? 혹시 얼마 전 제가 팬이 돼버린 사람과 동일 인물 아닌가요?"
"비밀이에요."
"알겠습니다. 레이디의 비밀은 지켜드려야죠. 그럼.. 지금부터 올해의 레코드 후보들을 화면으로 만나보시겠습니다."
수빈을 포함한 다섯 명의 후보가 화면으로 소개되었다. 수상자의 이름이 적혀 있는 봉투를 매만지며 코든이 물었다.
"아델. 어제 아마존에서 재밌는 뉴스를 발표했었는데요. 혹시 보셨나요?"
"아뇨. 못 봤어요. 무슨 뉴스가 나왔죠?"
"최근 열흘 사이에 아마존에서 마크 트웨인의 작품 판매량이 열 배나 증가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올해의 레코드 후보에 올라와 있군요."
"흥미로운 뉴스네요. 그래서요? 올해의 레코드는 누가 받게 되는 거죠?"
"그 친구의 이름은 앞으로 그래미 시상식에서 숱하게 불리게 될 겁니다. 그런 친구의 이름을 오늘 이 자리에서 최초로, 제 입으로 부르게 되어서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올해의 레코드는.. 라이프의 수빈~강에게 돌아갔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아델이 하이톤으로 소리를 질렀다.
"축하 드려요! 수빈! 잊지 말고 사인 꼭 해주세요."
수상자로 호명 받은 수빈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까만 광택이 감도는 클래식 슈트를 멋지게 차려입고, 검은색 보타이를 단정하게 맨 수빈이 단상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자,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조그맣게 축소된 그래머폰(축음기) 형상의 그래미상을 들고 있는 수빈이, 마이크 앞에 우뚝 서서 수상 소감을 말하기 시작했다.
"저에게 이 상을 주신 전미레코드예술과학아카데미(Nation Academy of Recording Arts & Science)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명칭이 좀 길어서.. 외우느라 힘들었습니다. 제가 암기력이 신통치 않아서요."
관객석 여기저기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혹시 집에 있는 TV가 오래되었거나 흑백으로 보고 계시는 분이 계시다면, 제가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굳이 색상 조절을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 피부색은 블랙도 화이트도 아니니까요. 귀하의 TV 수상기는 지극히 정상이니, 손대지 마시길 바랍니다."
또다시 터져 나온 관객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수빈이 말을 이었다.
"라이프를 처음 발표했을 때, 주변에서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내용이 너무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게 아니냐는 질문을 말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라이프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지극히 상식적인 진리를 모티브로 해서 만든 곡입니다. 모든 사람의 인생은 유한(有限) 하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런 유한한 인생이기에, 우리들의 삶은 더욱 소중하고 고귀할 수밖에 없겠죠."
잠시 객석을 훑어보며 수빈이 말을 이었다.
"그런 소중한 인생을 살아가는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은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죠.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합니다. 전혀 행복하지 않은 인생을 살고 있죠."
잠시 호흡을 고른 수빈이 입을 열었다.
"스페로 스페라(spero spera). 숨 쉬는 한 희망은 있다는 라틴어 명언입니다. 절대 포기하지 마시고, 소중한 인생의 행복을 찾기를 간절히 빌어봅니다. 행복을 찾기 위한 과정이 힘들고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쉽지만은 않겠죠. 그런 분들에게 제가 만든 곡이 잠시라도 위로가 되고, 잠시나마 안식을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노래를 만들 수 있도록, 제 생이 끝나는 날까지 멈추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수빈이 그래미 상을 공중으로 높이 치켜들며 큰 소리로 말했다.
"다들 행복한 인생을 사시기를! 감사합니다!"
기립한 관객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서, 수빈이 천천히 단상을 걸어 내려갔다. 수많은 뮤지션과 관객들이 내민 손을 힘차게 하이파이브를 하며 수빈은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날의 주인공은 단연코 수빈이었다.
1월 22일 화요일
축하연과 인터뷰로 인해 하루를 미국에서 더 보낸 수빈은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1워 23일 수요일
한국으로 귀국한 수빈은 각종 매체에서 밀려드는 인터뷰를 하느라 정신없는 나날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1월 25일 금요일
그래미 여파가 조금은 진정이 되자, 수빈은 본격적인 우영무 방송 촬영과 단편 영화 촬영을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헤이즈 영화의 프리퀄 형태로 단편을 찍기로 결정한 수빈은, 자신의 집에서 며칠째 작업하고 있던 단편 영화의 콘티를 마무리하기 위해 몰두하고 있었다.
저녁 무렵 콘티 작업을 어느 정도 마무리 지은 수빈은 백성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수빈아. 무슨 일이야?]
"내일 제작부서 간부들을 대상으로 회의를 좀 소집시켜 주세요. 안건은 우영무와 관련된 단편 영화 제작과 방송 출연 건입니다."
[알았어. 그럼 다른 부서의 간부들은 필요 없고?]
"네. 제작부서 인원들만 있으면 돼요. 특히 단편 출품하는 네 명의 감독들은 반드시 참석하라고 전해주세요. 내일 회의에서 어지간한 안건들은 다 결정을 지어야 해요. 그런 다음 바로 곧바로 제작에 들어가야 방송에 내보낼 수 있습니다. 지금 일정이 너무 많이 딜레이 되어서 곤란한 상황이에요. 이제부터는 스피드를 내야 합니다. 자칫 더 늦어졌다간 뮤지컬 제작과 기간이 겹쳐질 수도 있어요. 그랬다간 제가 또 죽어납니다."
[그래. 내가 그렇게 전달할게. 그럼 본사 건물 말고 제작부서 건물로 오라고 하면 되겠네?]
"네. 형. 전원 아침 8시까지 나오라고 전해주세요. 아침 일찍 회의를 해서, 최대한 빨리 결정을 지어야겠어요. 그래야 예비 감독들도 하루를 공치지 않고 촬영에 임하죠."
[알았어. 한 명도 빠짐없이 전할게. 그럼 내가 내일 아침 일찍 데리러 가마.]
"그래요. 형. 내일 봐요."
전화를 끊은 수빈은 비로소 여유를 가지고 저녁을 차리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은 후 간단하게 차를 한잔 마시며 TV를 감상하고 있을 때였다.
밤 10시가 가까운 시각에 수빈의 핸드폰이 맹렬하게 울어대며 문자가 도착했음을 알려줬다.
- 5분 남았다고 하더군. 미리 축하하네.
수빈은 심호흡을 깊게 하며 마음을 안정시킨 뒤, 뱅상 회장이 보낸 문자에 첨부된 아카데미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하였다.
잠시 후 수빈은 아카데미 공식 홈페이지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 최종 후보들이 발표되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영상을 지켜보며, 수빈은 마음속으로 하나씩 꼽기 시작했다.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편집상, 음향편집상..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군. 이 정도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선전했는걸? 가장 핵심인 작품상과 감독상에 다 노미네이트되었으니.. 뱅상 회장이 기뻐할만 했군.'
스트리밍 서비스를 다 본 수빈은 핸드폰의 달력을 보며 일정을 정리했다.
'3월 3일 일요일에 LA 코닥 극장에서 시상식이.. 아니지. 코닥이 망해서 돌비로 넘어간지 좀 되었지. 돌비 극장에서 시상식이 거행되니까, 아무리 늦어도 삼일절에는 출국을 해야 하겠군. 빨리 돌아온다고 해도 3월 5일이나 6일쯤 귀국할 거 같은데..'
수빈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3월 2일이면 개강인데 말이야. 이제 막 입학한 신입생이 개강 초기부터 결강을 해야 하겠는걸. 신입생 오리엔테이션도 그래미를 핑계로 빠졌었는데.. 선배들이나 교수들에게 제대로 찍히겠군."
수빈이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을 때였다. 수빈의 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어대며, 문자 도착 알람이 쉴 새 없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알아차린 모양이로군. 내일 하루도 정말 피곤하겠어."
수빈은 망설임 없이 핸드폰을 꺼버리고선, 내일 아침에 있을 회의를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