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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우리에게 영화란 무엇인가' 제작발표회가 끝이 나자, 수빈이 마이크를 들었다.
"기자님들께 약속드린 대로 지금부터는 제가 인터뷰를 하겠습니다. 한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건, 아무쪼록 기사를 쓰실 때 '우영무'에 관련해서도 꼭 언급해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질문받겠습니다."
- 전 세계적으로 헤이즈 흥행 돌풍이 장난이 아닙니다. 이렇게까지 성공할 거라는 걸 예상하셨습니까?
"제가 어떻게 미래를 알겠습니까? 미래에서 건너 온 사람도 아닌데 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저 나름대로 기대를 한건 사실입니다. 사람마다 자신만의 감이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편집실에서 최종 편집을 마친 후, 저 혼자 최종본을 감상해봤습니다. 최대한 관객의 입장이 되어서 보려고 노력했고요. 막상 보니.. 제가 봐도 나름 재미가 있더라고요. 그때 적어도 망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은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잘 될 거라고는 미처 예상 못 했죠."
- 감독 입장에서 헤이즈가 흥행에 성공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양한 이유가 있겠죠. 복잡하지 않고 간결한 스토리 전개, 잘 찍었다고 칭찬을 받고 있는 액션 신, 배우들의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 등등 말이죠. 거기에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헤이즈에서는 총격 신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요 근래 미국 내에서 총기로 인한 사건 사고들이 많이 발생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때를 잘 만난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 너무 두루뭉술합니다. 가장 주된 요인을 꼽으시면?
"이것 참.. 기자분이 절 몰아세우시는군요. 네. 제가 너무나 잘나서 그렇습니다. 잘난 제가 만든 영화라 흥행에 성공했고요. 이제 만족스러운 대답이 되셨나요?"
- 네. 만족스럽습니다.
"자극적인 기사를 쓰고 싶은 건 알겠습니다만.. 부탁인데 절 너무 이상한 놈으로 쓰지는 말아주세요. 다음 질문?"
- 흥행 수익이 어느 정도 날 거라고 보고 있나요?
"당장 섣불리 말하기는 힘들죠. 스크린에서 내려오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요. 하지만 조 단위는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조 단위라니. 상상조차 잘 안되는 돈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수익을 올린 영화라면, 헤이즈를 시리즈물로 만들 생각은 하고 있지 않으신가요? 영화 마지막에 주인공의 생사가 불분명한 게, 가능성은 충분해 보이는데요. 만약 생각 중이라면 후속작은 언제쯤 만나볼 수 있을까요?
"시리즈로 제작할 생각을 가지고는 있습니다만.. 제가 군대를 다녀와야 해서 최소한 3년은 지나야 속편을 보실 수 있을것 같습니다."
- 요즘 사람들의 관심사 중에 하나가 강감독님의 애인이 과연 누가 될 것인가 하는 겁니다. 얼마 전 끝난 여왕들의 게임에 나왔던 분들 중 한 명이 될 거라는 예측이 지배적인데요. 솔직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전 아직 군대도 안 다녀왔어요. 그리고 현재로는 특정인을 따로 만나고 있지 않습니다. 다음 질문?"
- 얼마 전 독일에서 최아림 피아니스트가 콘서트가 끝난 뒤, 연주에 감동받은 관객들의 기립 박수를 받아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독일 언론에 따르면 잠자던 공주가 드디어 눈을 떳다며 아주 칭찬이 자자한데요. 최아림의 인터뷰 내용 중에 그 원인이 강감독님과의 사랑 때문이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두 분 사이가 연인 사이인게 맞죠?
"기자님. 독일어 정도는 저도 할 줄 압니다. 그 기사는 저도 읽었고요. 정확하게 말하면, '각성한 공주'라고 표현이 되어 있죠. 그리고 인터뷰 내용 중에 저와의 합주 연습을 하며 깨달은 바가 있어, 좀 더 깊이 있는 연주를 하게 되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오역을 하셔서 유도 질문을 하시면 곤란하죠. 최아림과 전 친한 오빠 동생 사이일 뿐입니다. 다음 질문?"
- 휴전선 부근의 땅을 강감독님이 대량으로 매입하고 있다는...
- 강감독님의 엄청난 재산의 일부가 스위스 은행에 예치되어...
- 일설에 따르면 해외에 따로 아름다운 애인이 있다는 소문이...
- 연인이 없는 게 혹시 강감독이 게이라서 그런 게 아닌가라는 설이...
신변잡기부터 시작해서 개인적인 재산 내역까지, 시시콜콜 캐묻는 기자들에게 한참을 시달린 수빈이 발걸음을 재게 놀려 기자회견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급하게 옆으로 따라붙은 박피디가 빠르게 입을 놀렸다.
"너무 죄송하네요. 덕분에 프로 홍보는 잘 됐지만.. 제가 강감독님을 너무 힘들게 만든 것 같아요. 우영무만 아니었다면, 강감독님 성격상 지저분한 질문 따위는 깔끔하게 무시하셨을 건데.. 꾹 참고 일일이 다 답변을 해주시는 모습을 보니 제가 너무 많이 미안했어요."
약간의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수빈이 답했다.
"아니 다행이네요."
"강감독님이 그러셨잖아요. 제가 머리가 좋다고.. 그런데 모를 리가 있겠어요?"
"제가 박피디님께는 제법 많은 면에서 양보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왜 그런지도 아시죠?"
"일전에 제의하셨던 스카우트 때문 아닌가요?"
"맞습니다."
입술을 꼭 깨문 박피디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전 영화사는.."
수빈이 빠르게 놀리던 발걸음을 뚝 멈췄다. 박피디를 정면으로 바라본 수빈이 입을 열었다.
"일전에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박피디님이 영화사보다는 방송국을 더 선호한다는 걸 말입니다. 원래는 이번 프로가 다 끝난 다음 자리를 만들 생각이었는데.. 말 나온 김에 지금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2년 후에 제 친구가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한국에서 방송국 사장을 하게 될 놈이죠. 그 방송국에 박피디가 둥지를 틀었으면 합니다. 급여나 직급 같은 건 박피디가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제공될 겁니다. 제가 약속드리죠."
"친구라는 분이.. 마빈?"
"정확합니다."
"만약 제가 거절을 하면요?"
수빈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박피디님이 스카우트 제안을 거절한다고 해서, 제가 보복 같은 걸 할 그런 놈으로 보입니까? 인재를 아끼는 마음에 드린 제안일 뿐입니다. 거절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단, 이번 프로가 박피디와 저의 마지막 인연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제가 진지하게 고민해볼게요."
"잊지 마시길. 이번이 마지막 제안이란 걸 말입니다. 그리고 양보도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함께 미래를 할 동료가 아니라면, 박피디를 위해 제가 굳이 손해를 감수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명심할게요."
기자회견장을 빠져나온 수빈은 YK로 이동했다. 박사장을 만나기 위해 사장실 안으로 들어간 수빈은, 핸드폰을 보며 낄낄거리고 있는 박사장을 보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그리 재미있으십니까?"
"오. 왔나. 강이사. 유튜브를 보고 있었지."
"유튜브에 뭐 재밌는 거라도 올라왔나요?"
"올라왔지. 조금 전 강이사가 하던 인터뷰가 고스란히 올라왔다네. 기자들 질문이 가관이더군."
"빨리도 올라왔네요. 기자들이 어찌나 집요하게 파고드는지., 남의 사생활이나 재산 상태는 왜 또 그렇게 궁금해하는지.. 제 통장 비밀번호까지 물을 기세더군요. 고생 좀 했습니다."
"이제 영화도 한시름 놨고, 급한 건 다 끝났으니.. 미국 쪽 콘서트 때문에 온 거지?"
"네. 그 문제도 있고, MOU 체결 문제도 있어서 들렸습니다."
"MOU? YK와 수박 프로덕션은 이미 MOU를 체결한 걸로 기억하는데."
"외국 기업들과 MOU를 체결할 생각입니다. 회사 덩치가 잔뜩 커졌으니, 이제부터는 체급에 맞게 놀아야죠. 얼마 전 외국 출장을 갔을 때 청톈, 유쿠, 훌루, UMG, LVMH에서 비슷한 내용의 제안을 받았습니다. 거기에 네덜란드의 필립스까지..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정리를 해야 합니다. 제가 군 입대를 하기 전까지 계약을 다 끝마쳐야 하니까요."
"이전에 외국 기업에서 비슷한 제안이 왔을 때, 그때는 잡아먹힐 수도 있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더니.. 이제는 자신감이 생긴 모양이로군? 물론 그 자신감의 근거는 자금이겠지?"
"당연하죠. 3개월 이내에 순수한 캐시로만 3조 가까운 돈이 제 통장에 쌓일 겁니다. 그 정도의 자금이라면.. 세계 어떤 기업과 붙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이제는 큰 물에서 놀아야죠."
"좋아. 알겠네. MOU에는 주로 어떤 내용이 담기는 건가?"
"제가 제작한 영화나 드라마의 캐릭터 사용권, 음악 사용권, 디자인 사용권 등이 담길 겁니다. 큰 욕심부리지 않는다면, 서로가 윈윈할 수 있는 좋은 계약을 맺을 수 있을 겁니다."
"역시.. 내가 제대로 본 거야.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세계적인 기업들과 MOU라. 강이사와 함께라면 피 끓는 모험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나의 예상이 정확하게 적중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보니 나도 사람 보는 눈이 제법 좋은걸."
"네네. 그렇고말고요."
"이런.. 나의 안목을 못 믿겠다는 건가? 너무 그러지 말라고. 알았네. 법무팀에게 지시해서 최대한 빠르게 초안을 잡아서 올리라고 하겠네. 그건 그렇게 하고.. 미국 공연 건은 어떤가? 특별히 손볼 게 있던가?"
"공연 내용 자체는 훌륭합니다. 스케줄이 조금 빡빡하긴 한데.. 어차피 열흘이면 다 끝나는 거라 다들 버틸만 할 겁니다. 지금 문제는.. 바로 접니다."
"강이사가?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건가?"
"공연 기간 중에 제가 한국으로 한번 넘어와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왜? 무슨 일로?"
"면접을 봐야죠."
"면접? 영화사 사장이 무슨 면접을 봐? 아니면 어디 다른 감독 영화에 출연을 하기 위해서 오디션이라도 볼 게획인가?"
수빈이 고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대학 면접 말입니다. 매년 면접 보는 시기가 비슷하잖아요. 아마 공연 기간 중에 잡힐 거 같습니다. 며칠 후면 각 대학마다 입학원서 접수가 시작되니, 이제 면접도 준비를 해야죠."
"차라리.. 대학교에 사정 설명을 하고, 면접을 공연이 끝난 뒤로 미루면 안 될까?"
"한국에서는 말입니다. 연예인들이 저지른 범죄 중에, 시간이 지나도 대중들이 용서하지 않는 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꼼수를 써서 군대 면제를 받는 거고, 다른 하나는 부정한 방법으로 대학을 진학하는 거죠. 잘 아시지 않습니까? 도박을 해도 눈감아 주고, 차를 훔쳐도 이해하고, 음주운전을 해도 봐주지만.. 저 두 가지는 사람들이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걸.. 제가 굳이 사서 욕먹을 필요 있습니까?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제게는 그래미보다 정상적으로 면접을 보는 게 더 중요합니다."
아쉬운듯 입맛을 다신 강사장이 말했다.
"알겠네. 공연의 핵심인 자네가 빠지면 타격이 크겠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내가 어떻게 해주면 되겠나?"
"제가 교육계 쪽에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면접 일자가 언제인지 최대한 빨리 알아보셔서, 거기에 맞춰 제 스케줄을 조정해주시면 됩니다."
"알겠네. 내가 최대한 빨리 알아봐서 알려주도록 하지."
"부탁드리겠습니다."
12월 27일 목요일
본격적인 우영무 촬영을 하는 동안 크리스마스가 지났다. 수빈은 S대학 경제학과에 원서를 접수했다.
2019년 1월 2일 수요일
연말연시를 맞아 쏟아지는 방송국 출연 요청들을 다 고사한 수빈은, 며칠째 집에서 칩거를 하며 작업을 하고 있었다.
미국 공연과 그래미까지 당분간 정신없을 스케줄들을 고려해서, 3주 후면 개봉한지 근 두 달 만에 스크린에서 내려갈 헤이즈의 OTT 용 자막 작업을 미리 해두느라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헤이즈는 아직까지도 기세를 잃지 않은 채 관객 동원을 성공적으로 하고 있으며, 아바타와 비슷한 수준의 스코어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었다.
1월 3일 목요일
신년 벽두부터 미국에서 열릴 YK 패밀리 투어에 참가하기 위해서, 수빈은 밴을 타고 인천 국제공항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