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229화 (229/236)

# 229

70 - 2

12월 18일 화요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스키폴 국제공항.

원래의 일정보다 하루 늦어진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 유럽 쪽 일정을 끝마친 수빈이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기 위해 대한민국 국적의 비행기에 탑승하고 있었다.

퍼스트 클래스를 끊은 수빈이 일반 승객들보다 먼저 비행기 입구에 들어서자, 일렬로 줄지어 도열해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쯧.. 보통 때보다 숫자가 많은 거 보니 또 시작인 모양이로군.'

요 며칠 새 비슷한 경우를 많이 겪었던 수빈은 속으로 혀를 차며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맨 앞에 서있던 중년의 남자가 정중하게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건넸다.

"이 비행기의 운항을 책임지고 있는 정민호 기장입니다. 한국을 빛낸 세계적인 영화감독인 강수빈 감독님을 모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강수빈입니다. 이렇게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까지 안전하게 모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비행기 승무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 수빈이 피곤한 얼굴로 자리에 착석했다. 곧바로 사무장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사무장 박동호입니다. 한국까지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혹시라도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저나 다른 승무원들에게 언제든지 말씀해 주시죠. 바로 준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나친 환대를 참다못한 수빈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사무장님. 이렇게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다른 승객들과 똑같이 대해주시면 됩니다."

단호한 표정의 사무장이 대꾸했다.

"절대 그럴 수는 없죠. 강감독님께서 저희 항공을 이용해주셨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저희 회사 입장에서는 공짜로 광고를 찍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도 강감독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직업이 이렇다 보니 외국인 친구들이 많습니다만, 요 며칠 동안 제가 그 외국인 친구들 사이에서 제대로 목에 힘을 주고 있습니다. 한국이 도대체 어디쯤에 붙어 있는 나라냐며 매번 무시하던 놈들이었는데 말입니다. 이게 다 강감독님 덕분이죠.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어떤 거라도 상관없으니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기내에 비치되어 있지 않는 거라면, 제가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려서라도 구해 오겠습니다."

수빈이 쓰게 웃으며 대꾸했다.

"유머 감각이 뛰어나시군요. 알겠습니다. 일단 하나 부탁드릴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제가 내리기 전까지는 제가 탑승하고 있다는 걸 SNS 같은 곳에 올리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그랬다가는 제가 공항을 빠져나가기 힘들어져서요. 한국 도착 후에 올리는 건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승무원분들 중에 제 사인이 필요하신 분이 있으시면 제가 내리기 전에 해드리겠습니다. 사진도 원하시면 같이 찍어드릴 테니, 아무쪼록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사무장이 물러나고 비로소 혼자만의 시간이 찾아오자, 수빈은 핸드폰으로 그동안 여유가 없어서 찾아보지 못했던 한국발 기사를 검색했다.

[인간 vs 컴퓨터 그리고 헤이즈 vs 아바타]

- 10일 전 개봉한 순수한 한국산 영화 '헤이즈'가 전 세계적으로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말 그대로 돌풍과도 같은 기세로 전 세계 영화 시장을 집어삼키며, 기록적인 흥행몰이에 나서고 있는 중이다.

- 헤이즈의 개봉 첫날은 의외로 잠잠했다. 역대 부동의 흥행 1위인 아바타의 첫날 관객 동원 수의 절반에도 못 미쳤던 걸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의 입소문이 돌기 시작한 다음날 그리고 진정한 흥행몰이가 시작된 개봉 이틀 후부터, 헤이즈는 무서운 기세로 아바타의 기록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열흘이 지난 현재 아바타와 비슷한 추세로 관객 동원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헤이즈가 과연 아바타의 기록을 깰 수 있을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 헤이즈의 흥행 돌풍의 원인은 뭘까? 영화를 관람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잘 만들어진 오락영화입니다. 그리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뛰어난 액션 신이 제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았어요. 보고 있으면 소름이 돋을 정도의 엄청난 액션 연기였어요."라고 말이다. 그리고 "여러 배우들의 연기가 살아 숨 쉬고 있었고, 휴머니티를 느낄 수 있어서 더욱 좋았어요."라고도 말한다. 오락 영화에서 난데없는 휴머니티라니? 헤이즈라는 영화는 제작자이자 감독이자 주연 배우인 강수빈 감독 본인이 직접 밝힌 대로, 철저하게 오락적인 재미와 즐거움을 주기 위해 제작된 영화이다. 근데 왜 관객들은 휴머니티를 언급할까? 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바타가 어떤 영화인지 설명이 필요하다.

- 아바타. 터미네이터와 타이타닉을 제작한 감독으로 유명한 제임스 카메룬 감독이 무려 4년에 걸쳐, 물경 3천억에 달하는 거액의 제작비를 투입하여 완성한 영화이다. 영화 한 편으로 올린 수익이 3조에 달하는 초대박 흥행작이다. 하지만 정밀한 고퀄리티의 CG가 총동원되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 이 영화는, 그 흥행 성적이 좋았던 만큼 비난 또한 거셌던 영화이다. 이게 만화의 실사판이지 영화야? 영화를 보고 나니 기억나는 배우가 단 한 명도 없는데?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이크란 아닌가?(익룡 비슷하게 생긴 괴수) 등등.. 수많은 영화인들에게 비난을 사기도 했었다. 그 증거로 영화 역사상 흥행 1위를 달성한 작품이 아카데미에서 조연, 주연, 감독, 작품상 같은 주요 부문의 상을 단 하나도 받지 못한 채, 촬영상, 미술상, 시각효과상만을 수상했다는 것만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럼 헤이즈라는 영화는 어떨까? 기획부터 개봉까지 총 제작기간이 1년이 채 안 되고(이게 과연 사실일까?), 600억 정도의 적은 제작비(아바타 제작비의 20프로에 불과하다)가 투입된 걸로 짐작되는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액션 영화다 보니 분명히 CG가 사용되었을게 틀림없을 건데, 과연 어디에 사용되었는지 발견하기가 힘들기 짝이 없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대립하고, 충돌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울부짖고, 좌절한다. 컴퓨터로 제작된 CG에서 느낄 수 없는, 순수한 인간적인 본연의 감성을 충만히 느낄 수 영화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휴머니티라는....

- 띵띵띵. 지금부터 모든 전자기기의 사용을 금지합니다. 승객 여러분들은 안전벨트를 매주시고...

이륙 준비 멘트가 흘러나오자 수빈은 핸드폰을 꺼버리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깊은 수면에 빠져들었다.

12월 19일 수요일

출장의 여독을 풀기 위해 아침까지 늦잠을 잔 수빈은, 핸드폰과 집안에 있는 인터폰이 미친 듯이 울어대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부스스 눈을 뜬 수빈은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있는 인터폰부터 받았다.

"여보세요?"

[여기 경비실인데요. 지금 아파트 입구에 기자와 방송국 카메라가 너무 많이 와 있어서 통행이 힘들 정도예요. 어떻게 조치를 좀 취해주셔야 하겠는데요.]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곧바로 내려가서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헝클어진 머리를 감추기 위해 모자를 눌러 쓴 수빈이 집 밖으로 나가며 중얼거렸다.

"공항을 용케 잘 빠져나왔다 했더니.. 다들 집으로 쳐들어 온 모양이로군."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입구에 도착한 수빈은 기함을 토하고 말았다.

'미쳤군. 대한민국의 기자란 기자는 다 모인 거 같은데..'

근 200여 명에 가까운 기자단을 바라보던 수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가갔다. 미친듯한 플래시와 기자들의 요란한 질문 속에 수빈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기자 여러분. 오늘 오후에 정식으로 기자 회견을 열겠습니다. 그때 기자분들에게 충분한 질의시간을 내어드리겠습니다. 다른 주민들도 계신데 여기까지 찾아오셔서 이러시면 제 입장이 곤란해요. 시간과 장소를 따로 통보해 드릴 테니, 다들 그만 물러가 주시길 바랍니다. 계속 남아 계시는 방송사나 기자분들은 기자회견장에 못 들어오게 할 거니 알아서 하세요."

기자단을 해산시킨 후 다시 집으로 올라간 수빈은 핸드폰을 들고 백성철에게 전화를 하였다.

[어, 수빈아. 일어났어?]

"네. 형. 저 이사 갈 집부터 좀 알아봐 주세요. 경비가 삼엄해서 기자들이 출입하기 힘든 곳으로 이사를 가야겠어요."

[난리가 났었나 보네. 알았다. 네가 일전에 말해서 알아본 게 있으니 금방 구할 거다.]

"네. 최대한 빨리 이사를 가야겠어요. 그리고 저 좀 데리로 오세요."

[어디 가게? 오늘 하루는 집에서 쉬는 거 아니었어? 원래 출장 다녀온 다음 날은 하루 휴식을 취하기로 했었잖아.]

"일정이 하루 늦어져서 쉴 시간이 없네요. 새로운 방송 프로 때문에 KBC에 가봐야겠어요."

시간이 흘러 여의도 KBC 신관에 위치한 수빈이 박피디와 작가들이 기다리고 있는 회의실로 들어섰다. 수빈을 발견한 박피디와 기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 짝짝짝짝.

- 축하합니다. 강감독님.

- 영화 대박 난 걸 축하드려요,

- 영화 너무 재밌게 잘 봤어요.

쑥스러운 듯 손을 든 수빈이 감사 표시를 한 후 자리에 착석했다. 건너편에서 방글방글 웃고 있는 박피디의 얼굴을 보며 수빈이 물었다.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으십니까?"

"강감독님이 너무 잘 나가시니 제가 덩달아 잘 나가네요. CP로도 진급을 했고.. 요즘 KBC에서 제 말 한마디면 뭐든지 다 이루어진다는 거 아세요? 제 말이 곧 법이에요. 강감독님 덕분에 말이죠."

"그래요? 축하드립니다. 그럼 새로운 방송 제작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겠군요?"

"우영무는 걱정 마세요. 이미 사장 결재까지 다 받아놨어요. 강감독님이 원하시는 모든 걸 다 들어드릴 생각이에요. 제작비? 제작 인원? 촬영 장소? 원하시는 MC? 뭐든 말만 하세요."

수빈이 뭔가를 깨달았다는 눈빛으로 박피디를 바라보았다.

"제가 눈치가 빠른 편입니다. 딱 보니 알겠네요. 제게 따로 원하는 게 있으시죠?"

"네. 있어요. 감독 후보 네 분의 단편 영화 말고도, 강감독님이 제작하신 단편 영화도 방송하길 원합니다. 세계적인 명감독의 작품을 뺀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겠어요? 물론 최종적으로 두 분을 뽑는 투표는, 강감독님을 제외한 네 분의 작품을 가지고 실시할 겁니다."

"흐음. 아무리 단편이라고 하지만 제가 시간이 없어서 힘든데요. 저에게 돌아오는 이득은?"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박피디가 막힘없이 답변을 하였다.

"앞으로 수박 프로덕션에서 제작하는 모든 영화들은, KBC 방송국에서 책임지고 홍보해 드릴 겁니다. 아시죠? KBC에서 영화를 소개하는 프로들이 제법 여러 개 있다는 걸 말이에요. 사장님께서 자신의 재임기간 내내 책임지고 해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어요. 참고로 사장님은 아직 5년의 재임기간이 남아있죠."

"우리 영화사에서 제작하는 영화를 공영 방송에서 5년 동안 적극적인 홍보를 해준다라.. 나쁜 조건은 아니군요."

"그렇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 시작해보는 게 어떨까요?"

"오늘? 느닷없이 갑자기 뭘 시작한다는 거죠? 아직 아무것도 찍은 게 없는데 말입니다."

"오늘 기자회견을 여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맞나요?"

"맞습니다."

"저희 KBC에서 기자회견을 하시는 게 어떨까요? 우영무 제작발표회를 겸해서 말이죠."

수빈이 감탄 어린 눈빛으로 박피디를 바라보다 툭 던졌다.

"머리가 잘 돌아가시는군요. 우리 영화사로 이적하실 생각은 아직도 없습니까? 최고 대우를 약속해 드리죠."

박피디가 말없이 빙긋 웃기만 하였다.

그날 오후 수빈의 기자회견이 KBC 신관에서 열렸다. 수빈과 박피디를 포함한 제작진이 기자회견장으로 들어서자, 눈이 부셔서 뜨지 못할 정도로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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