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227화 (227/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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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김샛별이 마이크 앞에 서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분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런 영광스러운 상을 처음으로 받다 보니 감사드려야 할 분들이 너무 많네요. 혹시라도 빠진 분들은 제가 직접 만나서 감사의 인사를 드릴게요."

김샛별이 잠시 호흡을 고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런 후 MC석에 서있는 김해수를 바라보았다.

"보잘것없던 저의 연기력을 이렇게 큰상을 받을 수 있게 끌어올려 준 고마운 분이 두 분 계세요. 한 분은 당연히 강수빈 감독님이시죠. 그리고 나머지 한 분이.. 저기 서 계신 김해수 선배님이십니다. 영화 찍기 전부터 시작해서 영화가 끝날 때까지.. 같은 소속사 배우랍시고, 바쁜 시간을 쪼개어 저에게 아낌없이 연기지도를 해주신 김해수 선배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화면에 잡힌 김해수가 가볍게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연기가 잘 안 풀려서 힘들고 괴로워할 때, 해수 선배님께서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샛별이가 김해수의 흉내를 내려는 듯 목을 살짝 가다듬었다.

"복받은 줄 알아 이년아. 강수빈 감독 작품에 출연하고 싶어 하는 여배우가 대한민국에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나조차도 까였어. 도연이 걔는 연기 좀 잘하는 것 말고는 볼 것도 없는데. 걔는 쓰면서 난 까였다고. 알기나 해? 행복한 줄 알아야지. 하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관둬. 내가 병원 가서 보톡스를 왕창 맞고서라도 너 대신 출연할 테니까.."

관객석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순간적으로 화면에 잡힌 김해수가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선배님의 그 말씀을 듣고서, 제가 얼마나 복에 겨운 투정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어요. 그다음부터는 정말로 물불을 안 가리고 연기했던 것 같아요. 오늘의 상은 김해수 선배님이 제 옆에 계셔서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영화 속에서 제 연인이었던 수빈 오빠가 죽는 신을 촬영하기 전날.. 너무 마음이 아파서 도저히 연기를 못할 것만 같을 때.. 서로 부둥켜 앉고 하루 종일 같이 울어줬던 하이유 언니. 그날 이후로 정말 친자매처럼 친해졌는데, 이렇게 같이 수상을 하니 정말 좋아요. 앞으로도 열심히 연기하는 여배우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짝짝짝짝.

사람들의 박수 속에 김해수가 멘트를 날렸다.

"네. 신인 여배우인 김샛별양의 수상 소감이었습니다. 신인이라서 그런지, 굳이 안 해도 될 말까지 다 하시는군요. 김샛별양. 이따 회사 가서 잠깐 봐요. 그럼 다음으로는.. 여우주연상을 공동 수상 한 하이유양의 수상 소감을 들어보겠습니다."

마이크 앞에선 하이유도 김샛별처럼 고마움을 표시할 사람들의 이름을 호명했다. 그런 다음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연기를 할 때마다 항상 2프로가 부족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왔습니다. 어쩌면 이번 영화도 그랬을지도 모르죠. 근데.. 어느 날 갑자기 강감독님이 사전에 아무런 말도 없이 절 눈 내리는 겨울산으로 데리고 갔어요. 매니저나 영화 관계자 없이.. 정말 아무도 없이 단둘이서 말이죠. 산을 올라갈 때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제 연기가 맘에 안 든 강감독님이 화가 잔뜩 나서, 아무도 없는 겨울산에서 절 소리 소문 없이 묻어버리려고 그러는구나..라고 말이죠."

하이유의 말에 이번에는 수빈이 이마를 짚는 장면이 잡혔다.

"그날 산행을 하며 강감독님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깨닫게 되었죠. 진정한 연기란 건 호소력 있는 목소리, 다채로운 표정. 다양한 몸짓 따위로 하는 게 결코 아니라는 걸 말입니다. 그런 건 다 부차적인 것들에 불과할 뿐이죠,"

하이유가 별빛처럼 빛이 나는 눈빛으로 객석에 앉아 있는 수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진솔한 마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내면이 발가벗겨져서 부끄럽고 창피하고 죽을 만큼 괴롭지만.. 진솔한 자신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지 않으면, 그 어떤 잘나빠진 연기로도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없다,. 하얀 눈이 가득 쌓여 흩날리던 그날의 겨울산에서, 강감독님으로부터 확실하게 배웠습니다."

수빈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잠시 감정을 추스른 하이유가 끝맺음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연기가 뭔지, 사랑이란 게 뭔지, 여배우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를 알려주신 강감독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라이프 영화에서도 샛별이에게 뺏겼고, 얼마 전 끝난 모 예능에서도 샛별에게 밀렸지만, 다음번에는 제가 꼭 이길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짝짝짝짝.

묘한 여운을 남긴 하이유의 수상 소감이 끝나자, 사람들의 힘찬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감독상을 수상한 수빈이 황금색 머플러를 휘날리며 단상에 있는 마이크 앞에 서 있었다.

"청룡 영화제를 보고 계시는 전국의 남성 시청자 여러분. 네. 저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같은 남자가 보기에 얼마나 재수 없어 보이는지를 말입니다. 어린놈이 먹고살려고 발버둥 치나 보다..라고 생각하셔서 양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저 내년에 군대 갑니다. 그러니 제발 좀 봐주세요."

잠시 우스갯소리를 한 수빈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한민국 영화계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화려하고 빛나 보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수상식처럼 말입니다. 속된 말로 삐까번쩍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실상은 어떨까요? 밤샘을 밥 먹듯이 하는 말도 안 되는 노동시간, 결혼 따위는 꿈도 못 꾸는 낮은 보수, 그 누구도 보장해주지 않는 불확실한 미래.. 굳이 머나먼 아프리카까지 찾아갈 필요도 없는, 그야말로 최악의 노동 환경입니다. 예술을 한다는 빌미로 극악의 노동착취가 행해지고 있는 현장이 바로 우리들 곁에 있습니다."

잠시 짬을 둔 수빈이 말을 이었다.

"제가 설립한 영화사의 팀장급들은 어지간한 대기업 과장 정도의 월급을 받습니다. 팀원들도 나름 섭섭지 않게 받는 편이고요. 설립 초기에 가끔씩 절 찾아오는 직원들로부터  듣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 정도로만 벌면 돈 모아서 결혼도 할 수 있을 거 같다.. 비로소 사랑하는 연인과의 결혼을 꿈꾸게 되었다..라고 제게 울먹이면서 말합디다. 다 큰 어른들이 어린 절 붙들고 말입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진리들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중에 하나를 강조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투자 없이는 그 어떤 좋은 결과도 기대할 수 없다. 만고불변의 진리 아니겠습니까? 배우이기도 하고 제작 현장에 몸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영화계에 종사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처우 개선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관객석에서 열기 가득한 환호성과 함께 뜨거운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지막으로.. 제가 이번 청룡 영화제에서 감독상은 받았지만, 신인감독상은 못 받았습니다. 상은커녕 후보에도 못 들었죠."

수빈의 말을 듣고서야 그 사실을 깨달은 듯, 관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까 1부가 끝나고 영화제 관계자분에게 들었습니다. 네티즌분들이 절 신인감독상 후보로 거의 아무도 추천해주지 않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고 말입니다. 아마 그분들 눈에는 제가 신인 감독으로 보이지 않나 본데.. 제가 이래 봬도 데뷔한지 얼마 안 되는 파릇파릇한 신인 감독입니다. 네티즌 여러분들. 다들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싱긋 웃은 수빈이 감독상을 높이 치켜들며 말했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신인감독상을 탈 수 있도록 더욱더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관객들의 기립박수와 열렬한 환호성 속에서, 수빈이 단상 아래로 보무도 당당하게 내려가고 있었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천장 곳곳에 걸려있고, 뷔페식으로 차려진 고급 음식들이 기다란 테이블에 가득 올려져 있었다.

고가의 샴페인 병들이 각각의 원탁형 테이 마다 올려져 있는 리셉션장에서, 수상식이 끝난 배우들과 영화 관계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년 청룡영화제에서는 강감독과 같이 핸드프린팅을 할 수 있겠는걸."

기대에 찬 성강호의 말에, 수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군인이 무슨 핸드프린팅입니까? 전 나라를 지켜야죠."

"응? 사회복무요원으로 가는 거 아니었나? 잠깐 시간 내서 참석하면 되는 거 아냐?"

"아직 확실하게 정하지는 않았습니다. 현역으로 입대를 하면 복무 기간이 3개월가량 단축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고생을 좀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일찍 제대를 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

"그래? 뭐 알아서 잘 선택하겠지. 근데.. 굳이 이렇게 일찍 갈 필요가 있나? 대학에 들어가면 군 입대가 자동으로 미뤄질 건데.. 한창 잘나가는 시점에 입대하면 좀 그렇지 않을까?"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 수빈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게 아니라, 제자리에 멈춰 서서 점검을 해야 하는 시점입니다. 짧은 시간에 너무나도 많은 일을 벌였어요. 한 번쯤 재정비를 해줄 시점이 되었습니다. 여태까지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면, 이제부터는 그 발판이 흔들리지 않도록 다지는 작업을 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제가 제대를 한 후, 그 단단한 발판을 밟고서 다시 재도약을 할 수 있겠죠. 그리고.. 제가 없더라도 2편의 영화가 영화사에서 제작될 겁니다. 2년 정도야 금방 지나가죠."

"그렇긴 하지. 2년이면 영화 한편 제작하는 시간에 불과하니.. 강감독. 이틀 후에 시사회지?"

"네. 월요일에 우리끼리 간단하게 하고, 30일쯤 정식 시사회를 열 생각입니다. 그런 다음 12월 6일에 개봉할 예정입니다."

"기대되는군. 강감독이 촬영한 필름을 통 보여주지 않아서. 영화가 어떤지 감을 영 못 잡겠단 말이야."

"보시면 재미있을 겁니다. 말 나온 김에 전 편집실로 슬슬 가봐야겠는데요. 시사회 전에 이것저것 확인해봐야 할 것들이 아직 좀 많이 남아서요."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 지금 사람들이 강감독이랑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환장하고 있는 게 안 보요?"

"그래서 제가 형님을 방패로 내세운 거 아닙니까. 천하의 성강호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감히 형님을 제치고 올 간 큰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대로 살살 입구 쪽으로 나가주시죠."

"거 참.. 이해가 안 된다니까. 내가 그 나이라면 사람들 앞에서 자랑도 좀 하고, 폼도 좀 잡고 그럴 건데 말이야."

"다 귀찮습니다. 그러려고 영화를 제작하는 것도 아니고요."

"하여간 애 늙은이 같다니까.."

잠시 후 수빈은 성강호를 앞에 내세워 리셉션장을 빠져나왔다. 그런 후 곧바로 편집실로 향했다.

11월 26일 월요일

관계자들만이 참석할 수 있는 비공개 시사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친숙한 얼굴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시사회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잠시 후 사람들 앞에 선 수빈이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

"신작 영화 헤이즈(Haze)의 첫 시사회입니다. 다들 아시는 분들이라서 설문조사지 따위는 돌리지 않았습니다. 개봉일이 얼마 남지 않은 관계로, 보시는 분들이 맘에 안 드는 게 있다고 해도 대대적으로 뜯어고칠 시간 따위는 없습니다. 그럴 만큼 허술하게 만들지 않았다고 저 스스로 자부합니다. 부디 다들 즐겨주시고.. 행여 제가 미처 발견 못한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시사회가 끝나고 난 뒤 있을 다과회장에서 말씀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럼 시사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와 함께 시사회가 시작되었다.

어둠컴컴한 화면 속에서 헤이즈라는 영화 제목처럼 희뿌연 안개가 스산하게 이리저리 흐르고 있었다. 멀리서 어린 소녀가 엄마를 조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Mommy. Mommy. Can I play the violin?"

이윽고 부드러운 바이올린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왈츠가 관객들의 귀를 감미롭게 사로잡을 때, 어두운 화면 속에서 갑작스럽게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 꺄악! 뭐야?

- 어머나. 놀래라.

- 깜짝 놀랐네.

사람들의 비명 속에, 액션 영화 역사에 있어서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두 남자의 처절하면서도 리얼하기 짝이 없는 명품 격투 신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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