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사 연예인이 되다-226화 (226/236)

# 226

69 - 3

- 위이이잉.

분장실에서 헤어드라이기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있었다.

의상에 적합한 헤어스타일을 찾아야 한다면서, 두 여인이 호들갑을 떨며 수빈의 머리를 지지고 볶고 있었다.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즐거워하고 있는 코디와 변검녀를 힐끗 쳐다본 수빈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기뻐 날뛰고 있는 두 여자를 말리기를 포기한 수빈이 핸드폰 화면에 다시 집중했다.

[종합 1보] 한국의 자랑인 세계적인 영화감독 강수빈. 그래미 어워드 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쾌거를 이루다.

- '라이프'라는 영화로 세계 영화제의 상이란 상을 모두 휩쓸고 있는 강수빈 영화감독이, 30분 전에 공식적으로 발표된 그래미 어워드에서 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기염을 토했다.

- 미국 굴지의 음반사인 UMG(Universal Music Group)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일 년 사이 강수빈 감독이 발매한 두 장의 앨범 중 '다크탬블러' 앨범은 미국 음반 시장에서 플래티넘 9(900만 장)을 기록 중이고, '라이프' 앨범은 다이아몬드(1,000만 장)를 넘어섰다고 한다. 세계 시장으로 확대하면 그 숫자가 더 올라갈 건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 두 장의 앨범 판매량을 합치게 되면, 올 한해 강수빈 감독이 미국 시장에서 팔아치운 앨범 숫자가 무려 1,900만 장에 달한다. 이들 앨범이 좁은 한국 시장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을 때, 전문 음악인들 사이에서는 강수빈 감독이 그래미 어워드에 노미네이트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이야기가 이전부터 돌았었다. 하지만 정작 놀라운 사실은 그게 아니다.

- 그래미 어워드는 매년 일반인들의 생각보다 훨씬 많은 수상자를 배출한다. 장르 제한 없이 70~100여 부문에 걸쳐 시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우리가 그래미에서 주목하는 상은 본상이라고 할 수 있는 4개 부문의 상이다. 올해의 레코드(record of the year), 올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 올해의 노래(song of the year), 신인가수상(best new artist). 이 4개의 상이 진정한 그래미 상이라고 불수 있을 것이다. 전문 음악인들이 진정으로 놀라고 있는 것은, 강수빈 감독이 본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4개 부문에서 신인가수상을 제외한 3개 부문에서 노미네이트되었다는 것이다.

- 한국은 세계 음반 시장에서 볼 때, 아시아라는 변방에 위치한 하찮은 소국에 불과하다. 이런 변방에서 제작된 앨범이 본상 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된다는 건, 1959년 이후로 60년이 넘어가는 그래미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어찌 보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볼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가까운 일본이 몇 명의 그래미 수상자를 보유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다들 뉴에이지 앨범상 같은 우리가 듣도 보도 못한 비쥬류 부문의 상을 수상한 것에 불과하다.

- 노미네이트를 넘어서서 정말로 본상까지 손에 거머쥘 수 있을지, 강수빈 감독과 같은 한국인으로서 이 기사를 작성하고 있는 기자조차도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다. 내년 1월 20일 일요일.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그래미 어워드 시상식은 LA가 아닌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리기로 결정되었다. 강수빈 감독이 수상하는 역사적인 장면을 보기 위해, 본 기자는 그래미 어워드 시상식에 반드시 참석할 계획이다.

LA 현지 특파원 주진호 기자.

기사를 다 읽은 수빈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사전에 기사를 미리 작성해둔 게 분명해. 애국심을 자극하는 기사 내용이나 적절한 타이밍에 기사가 올라오는 걸 보면.. 뱅상 회장이 미리 손을 쓴 게 확실하군. 뭐 나로서는 나쁠 게 없겠지.'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수빈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밥상을 차려줬으면 맛있게 먹어줘야 예의지.."

잠시 후 머리부터 시작해서 메이크업, 의상까지 풀 장착을 한 수빈이 거울 앞에서 넋이 나간 얼굴로 서 있었다.

거울 속의 수빈은 살짝 웨이브 진 헤어스타일에 티 하나 없는 순백의 슈트를 입고 있었다. 어깨에는 황금색 견장이 붙어 있었고, 목에도 황금색의 머플러 같은 걸 걸치고서는 반짝거리는 백구두를 신고 있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서로 손바닥을 마주치며 폴짝폴짝 뛰고 있는 두 여인을 바라보며, 수빈이 허탈한 표정으로 물었다.

"부산 국제영화제 때는 왕자 비슷하더니.. 이번 콘셉트는 또 뭔가요? 군 복무 중인 제비? 그게 아니면 정신병자?"

"무슨 소리예요? 우리 두 사람의 로망을 합쳐 놓은 거라고요."

변검녀의 대답에 수빈이 되물었다.

"뭔 놈의 로망이 그렇게나 많습니까? 그래서 뭔가요?"

변검녀가 코디를 가리키며 말했다.

"얘는 어린 왕자. 전 사관과 신사의 리처드 기어. 그 두 개를 합쳐놓은 거죠. 보면 볼수록 멋지지 않아요?"

"하아.."

내장을 토하는듯한 깊은 한숨을 쉰 수빈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11월 24일 토요일

토요일 오후 5시. 물밀듯이 밀려드는 인터뷰 요청을 다 거절하며, 시사회에 대비하여 하루를 차분하게 보낸 수빈은 청룡 영화제 시상식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었다.

회기동에 위치한 경대 평화의 전당으로 가는 밴 안에서, 수빈이 뒷좌석에 앉아 있는 김샛별과 하이유에게 물었다.

"정말로 괜찮아요?"

"멋져요. 오빠. 해군 장교 같기도 하고 아랍의 왕자 같기도 하고.. 암튼 멋져요. 그러니 그만 좀 걱정하세요."

김샛별에 이어 하이유도 대답했다.

"아무나 소화 못하는 옷인 건 맞지만, 강감독님이 입으니 멋있네요. 역시 몸이 좋고 얼굴이 잘생기면 뭘 입혀놔도 옷이 산다니까요."

"맞아요. 언니. 넓은 어깨, 날씬하고 탄탄한 복부, 긴 다리. 거기에 얼굴도 작죠. 오빠는 거적을 씌워놔도 빛이 난다니까요."

수빈이 쓰게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여자들은 모르겠지만.. 남자들에게는 욕을 바가지로 먹을 거야. 아마도 날 왕자병에 걸린 미친놈쯤으로 생각할 거다."

잠시 후 수상식장에 도착한 수빈 일행은 밴에서 내렸다. 왼쪽에는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김샛별을, 오른쪽에는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하이유를 대동한 수빈은 두 사람과 팔짱을 끼었다. 양팔을 묶인 수빈 대신 두 여인이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일행은 레드 카펫을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함성과 비명 소리를 들으며 포토존에 도착한 일행은, 근 20여 분 가까이를 사진 기자들에게 시달렸다.

잠시 후 대기실에 도착한 수빈이 지친 표정으로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후우.. 일찍 오셨네요. 형님."

미리 도착해서 소파에 앉아 있던 성강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야 별다른 스케줄도 없고, 꾸미는데 시간이 오래 안 걸리니 일찍 왔지. 보아하니 고생 좀 한 모양인데?"

"청룡 영화제에 한국에 있는 사진 기자란 사진 기자들은 다 모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긴 포토 타임은 처음이에요. 진이 다 빠지는 것 같아요."

"강감독이 얼굴도 잘생기고 옷발도 좋잖아. 사진 기자들이 찍는 보람이 있지. 워낙 핫하기도 하고.. 난 몇 장 찍지도 않고 금방 끝났다고. 어차피 찍어봐야 난 기사에 실리지도 않아. 베스트 드레서니 워스트 드레서니.. 난 그런데 아예 언급조차 안되는 사람이야."

"앞으로는 저도 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쓰나.. 점령군 나리께서 말이야.."

수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점령군? 그건 또 뭔 소립니까?"

성강호가 수빈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강감독 기사가 벌써 올라왔다고.."

수빈은 핸드폰에 떠 있는 기사를 살펴보았다.

[속보] 강수빈! 청룡 영화제를 접수하러 왔다!

- 청룡 영화제를 정복하기 위해 점령군 사령관 같은 복장을 한 강수빈 감독.

자신의 사진과 함께 올라온 짤막한 토막 기사를 본 수빈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제 복장을 가지고 이런 식으로 몰아갈 수도 있는 거군요? 하여간.. 기자들 잔머리는 참 대단한 거 같아요."

"그 친구들은 그걸로 밥 먹고 살잖아. 프로를 무시하면 안 되지.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니잖아? 라이프가 중요 부문의 상들 중에 반은 휩쓸걸? 청룡이 상을 비교적 여러 작품에 나눠주는 편이긴 하지만.. 아무리 못해도 대여섯 개는 받을 거야."

"그럴까요? 태종상을 보니 영화계 텃세가 만만치 않아 보이던데요."

"그쪽이랑은 다르지. 청룡은 심사 진행 전과정을 신문에 공개하기 때문에, 태종상처럼 심사위원들이 짝짜꿍을 해서 허튼짓을 하기가 힘들어. 나름 공정한 편이라고."

"그래요? 뭐 많이 받으면 좋은 거죠."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자신들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갈 거라는 걸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간단한 리허설 후에 본격적인 청룡 영화상 수상식이 시작되었다.

TV 중계 카메라가 수빈을 위시한 성강호, 정도연, 하이유, 김샛별이 줄지어 앉아 있는 좌석을 자주 비추어 주었다. 시상식이 진행될수록 사진 기자의 말이 예언처럼 들어맞았다. 라이프가 청룡 영화제의 진정한 점령군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신인여우상 - 김샛별

신인남우상 - 강수빈

남우조연상 - 성강호

여우조연상 - 정도연

남우주연상 - 강수빈

여우주연상 - 하이유, 김샛별 공동 수상

감독상 - 강수빈

최우수작품상 - 라이프

그 외에도 기술상, 음악상 그리고 한국 영화 최대관객상을 라이프가 수상하며, 거의 모든 상을 라이프가 독식해버렸다.

라이프가 무려 11개 부문의 상을 수상한 그날의 시상식에서, 사람들이 하이라이트라고 손꼽는 부분은 성강호의 남우조연상 수상 소감과 두 여배우의 여우주연상 수상 소감 그리고 수빈의 감독상 수상 소감이었다.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성강호가 단상에서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었다.

"에.. 제가 청룡 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을 받은 게 1997년쯤이었을 겁니다. 넘버 3가 그해 8월 정도에 개봉된 걸로 기억하니까요. 21년 만에 청룡 영화제에서 다시 남우조연상을 받으니 감회가 새롭네요."

잠시 말을 멈춘 성강호가 객석에 앉아 있는 수빈을 바라보았다.

"저쪽에 앉아 있는 강수빈 감독이 나이로 따지면 제 아들뻘입니다. 제 꿈을 무참히 짓밟은 장본인이기도 하죠."

난데없는 돌발 발언에 객석에 앉은 사람들이 웅성거릴 때, 성강호가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제가 달빛 속의 호위무사 이후에 라이프를 선택했을 때, 그것도 조연으로 말입니다. 제가 알고 있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저를 빈정거리며 욕을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제게 이런 말을 했었죠. 강감독이 돈 많이 준다더냐? 그래서 새파란 감독에게 머리 숙이고 들어가서 조연으로 출연하는 거냐? 그 나이 먹고서도 돈이 그렇게 좋냐? 네. 맞습니다. 라이프 영화 한 편으로 천만 영화 5편 찍은 정도의 거액의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니 그 말이 딱히 틀린 것도 아니죠. 하지만 제가 라이프에 조연으로 출연한 진정한 이유는.. 제가 남들보다 눈치가 빠르기 때문입니다. 강수빈 감독과 특수본이라는 드라마와 달빛 속의 호위무사를 같이 작업하면서 알아챘죠. 그 무시무시한 천재성을 말입니다."

아스라한 눈빛으로 허공을 잠시 응시 한 성강호가, 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작품을 해보지 않은 분들은 절대로 모를 겁니다. 강수빈이라는 감독의 위대함을 말입니다. 강감독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면.. 눈부시게 빛나는 그 천재성에 눈이 멀 지경이죠. 번뜩이는 감성,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치밀한 머리,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력, 삶에 대한 심도 있는 철학과 현장을 지배하는 카리스마까지.. 보고 있으면 질투를 뛰어넘어 정말로 화가 날 정돕니다. 얼굴도 잘생긴 게 몸까지도 좋아요. 빌어먹을.."

잠시 호흡을 고른 성강호가 소감을 마무리하였다.

"저도 언젠가는 영화감독을 한번 해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습니다만.. 저 같이 재능 없는 놈이 영화감독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절실히 깨닫게 해준 사람이 강감독이었죠. 제가 가진 헛된 꿈을 무참하게 짓밟은 강감독에게 이 자리를 빌려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앞으로 한눈팔지 않고, 죽을 때까지 배우로서 열심히 연기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성강호가 상을 높이 치켜들자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단상 위에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두 명의 아름다운 배우가 올라가 있었다. 벌써부터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두 사람이 수상 소감을 서로 미루고 있었다.

결국 나이가 어린 김샛별이 먼저 수상 소감을 말하기 위해 마이크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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