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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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2일 월요일
청룡 영화제 후보작 상영제가 시작되고, 작년도 수상자들의 핸드프린팅 기념행사가 열리는 날이었다. 깔끔하고 댄디한 차림의 수빈이 포토존에 서 있었다
- 파바바박
플래시가 눈부시게 터졌다. 사진 기자들의 고함 소리가 빗발치고 있었다.
- 여기를 봐주세요!
- 옆으로 살짝 서주세요.
- 강감독님. 여기요! 여기!
- 이쪽 보고 웃어주세요.
수빈이 기자들의 요구에 방향과 포즈를 이리저리 바꾸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촬영이 끝난 수빈이 행사가 열리는 여의도 BGV 안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안전 요원의 호위를 받으며 이동하는 수빈의 눈에, 안전선 밖에서 자신을 향해 악을 쓰고 있는 낯이 익은 여성 리포터가 잡혔다.
"강감독님! 본격이에요. 본격. 인터뷰 좀 해주세요."
수빈이 방향을 틀어 여성 리포터에게 다가갔다.
"본격연예 한밤에서 나오셨죠? 제가 시간이 없어서 길게는 못 해드려요. 3가지 질문에 대해서 짧게 인터뷰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많이 바쁘신 걸로 아는데 청룡 영화제 핸드프린팅 행사에 오시게 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전년도 청룡 수상자들이 핸드프린팅을 하기 때문에, 사실 제가 꼭 올 필요는 없었습니다만.. 저도 이제는 영화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영화인들의 축제를 즐기기 위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잘 아는 성강호 배우께서 작년도 수상자로서 오늘 핸드프린팅을 하신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축하도 해드릴 겸 해서 참석했습니다. 다음 질문요"
"강감독님이 올해 태종상 수상에 실패.."
수빈이 손을 들었다.
"그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다음 질문요."
"그걸 꼭 물어봐야 하는데.. 그럼 올해 열리는 청룡 영화제에서는 라이프가 상을 휩쓸 거라는 전망이 지배적인데요. 몇 개 부분에서 수상을 할 거로 생각하시나요?"
"그건 제가 심사위원이 아니라서 모르죠. 그리고 청룡 영화상은 무대 뒤에서 트로피에 수상자 이름을 실시간으로 새긴다고 들었습니다. 그만큼 보안이 철저하고 공정한 심사를 한다는 소리겠죠? 뭐 저도 사람인지라.. 많이 받으면 당연히 좋지 않겠습니까? 마지막 질문요."
"신작 영화를 찍고 계신다고 들었어요. 언제쯤 개봉이 가능할까요?"
"현재로서는 12월 6일쯤으로 잡고 있습니다."
"연말연시와 크리스마스 대목을 노리시는군요?"
"그런 것도 있지만.. 12월 5일이 수능 점수 발표날입니다. 시험 성적표를 받기 전에는 다들 안절부절해서 마음이 불안하지 않습니까? 저도 올해 수능을 보기 때문에.. 성적표를 받은 다음에 개봉할 생각입니다. 그래야 편한 마음으로 무대 인사를 다닐 수 있을 거 같아서요."
"그러시군요. 강감독님도 좋은 결과 있길 바랍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시청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릴게요."
"시청자 여러분. 곧 개봉할 영화 '헤이즈'에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올해 수능을 치는 수험생 여러분. 수능이 어느덧 사흘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다들 마무리 정리 잘하시고, 아무쪼록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수빈이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파이팅!"
수빈은 인터뷰를 끝마치고 성강호가 있는 대기실로 이동했다. 수빈을 발견한 성강호가 손을 치켜들며 말했다.
"여어~. 강감독. 편집하느라 정신없이 바쁠 텐데.. 피곤한 자리에 불려 다니느라 고생이 많아."
"괜찮습니다. 그리고.. 축하드립니다. 핸드프린팅도 다 하시고 말입니다."
"이봐. 강감독. 내가 청룡에서만 벌써 네 번째로 하는 핸드프린팅이야. 축하는 무슨.."
은근슬쩍 자기 자랑을 하는 성강호를 보며 수빈이 피식 웃었다.
"그래요? 너무 많이 하셔서 지문이 다 닳으면 어떡하죠? 걱정스럽네요."
수빈의 농에 껄껄 웃던 성강호가 옆에 놓인 상자 하나를 집어 들어 수빈에게 건넸다.
"엿이나 먹어라."
"네?"
"오늘 강감독 만난다고 하니까 와이프가 챙겨주더라. 시험 잘 치라고.."
"아.. 수능 때문에 챙겨주신 거군요. 형수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그러지. 대학은 어디로 갈지 정한 거야?"
"네. 정했습니다. S대 경제과를 갈 생각입니다."
"거길 간다고? 왜?"
"자본주의 세상에서 큰 뜻을 펼치려면, 결국은 돈이 핵심이지 않겠습니까? 그런 차원에서.. 현대 경제학에 대해서 제대로 공부를 좀 해볼까 합니다."
"그래? 뭐 본인이 원한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거기는 커트라인이 상당히 높은 걸로 아는데?"
"뭐 점수가 안 나오면 당연히 지원을 못하겠죠. 그때는 다른 대학을 알아봐야죠."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꾸하는 수빈을 보며, 성강호가 뭔가 깨달았다는 둣 손으로 이마를 탁 치며 말했다.
"이런.. 요 근래 내가 강감독과 가깝게 지내다 보니 깜박했군. 강감독이 천재라는 걸 말이야."
그때 대기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을 열고 스태프가 들어왔다.
- 성강호 배우님. 행사 장소로 이동하시겠습니다.
성강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빈도 덩달아 일어나며 말했다.
"강호 형님. 행사 잘하세요. 얼굴 비췄으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강감독. 그럼 언제 또 보는 거야?"
"최종 편집이 다 끝나면, 제가 출연 배우분들에게 따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정식 시사회를 하기 전에, 배우들과 관계자들만 모아서 비공개 시사회를 할 겁니다. 일종의 블라인드 시사회가 되겠죠. 아마 11월 20일 근처쯤에 연락이 갈 거 같아요."
"알았어. 얼마나 멋진 영화가 나왔을지.. 벌써부터 가슴이 뛰는군."
수빈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보시면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장담하죠."
잠시 후 여의도 BGV를 나온 수빈은 밴을 타고 편집실로 이동했다.
11월 15일 목요일
수빈은 수능 시험을 보았다.
11월 22일 목요일
소설(小雪)을 맞아 서울 시내에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오후 5시경. 일주일째 편집실에 처박혀 숙식을 해결하고 있는 수빈이 최종 편집본을 감상하고 있었다. 영상이 끝이 나자,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뚫어질 듯 영상을 보고 있던 수빈이 스르르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조금 전 감상한 최종본을 면밀히 분석하며 평가를 하였다. 평가를 끝마친 수빈이, 본인 스스로도 만족스러운지 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눈을 뜬 수빈이 호기로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좋아.. 이런 수준이라면 어떤 관객이 보더라도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거야. 애초에 영화를 기획하며서 상상했던 것보다, 최종본이 오히려 더 잘 빠졌어. 액션 장면이 특히 더 그렇고.. 아무래도 에비스 효과를 톡톡히 본 것 같군."
잠시 후 편집실 밖으로 나간 수빈은 휴게실에 있는 백성철을 찾았다.
"수빈아. 드디어 다 끝난 거야?"
"네. 형. 다 끝났어요. 오상무에게 연락해서 빨리 블라인드 시사회를 열수 있.. 가만. 오늘이 며칠이죠? 편집실 안에만 있었더니 날짜 감각이 없네요.."
"22일 목요일."
"음. 그럼 이번 주는 무리겠군요. 주말에 청룡 영화제가 있으니.. 오상무에게 말해서 다음 주 월요일에 시사회를 열수 있도록 준비를 하라고 하세요. 그렇게 전달하면 알 거예요."
"그래. 알았다. 넌 어떡 할 거냐? 지금 바로 집으로 갈 거야?"
"가긴 가야 하는데.. 일단 잠깐이라도 눈 좀 붙이고 일어날게요."
"그래. 난 오상무에게 연락할 테니까, 넌 급한 데로 좀 자고 일어나라. 얼굴이 말이 아니다. 밥때 되면 내가 깨워줄 테니 걱정 말고.."
"네. 형."
다시 편집실로 들어간 수빈이 간이침대에 눕더니, 까무러치듯 곧바로 곯아떨어져 버렸다.
11월 23일 금요일
수빈은 액션 스쿨에서 팽석상과 대련을 하고 있었다.
- 창창차창.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격렬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 퍼버벅.
경쾌한 타격음이 들려오더니, 이를 악문 팽석상이 비명을 참으며 바닥을 데굴데굴 뒹굴기 시작했다.
"제법 많이 늘었군요. 고통을 참는 것도 익숙해지셨고.."
격통에 가쁜 숨을 쉬던 팽석상이 겨우 호흡을 추스르며 일어나 공손히 대답했다.
"잘 가르쳐주신 덕분입니다만.. 아직은 많이 모자랍니다."
"그렇지 않아요. 생각했던 것보다 진도가 상당히 빠른 편입니다. 오늘 보니 더 이상 약수(藥水)를 먹을 필요가 없겠네요. 이제는 몸 안에 있는 기운을 다스려 소주천을 완성시켜야 합니다. 과유불급. 이 상태에서 내공을 더 키우겠다고 먹어봐야 소용없습니다. 오히려 위험성만 증대할 뿐. 아시겠습니까?"
"네. 잘 알겠습니다."
"1년 정도 꾸준히 노력하시면 소주천이 가능해질 겁니다. 그리고.. 잘 알고 있죠?"
"네. 본가에 비밀로 해야 한다는것. 하시라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영화도 끝났으니 다음 주에 중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세요. 돌아가시면 소주천 완성에 집중하시고요. 그런 다음 저에게 다시 연락을 주세요."
"잘 알겠습니다."
수빈이 팽석상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였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덕분에 영화도 잘 나왔고요."
팽석상이 고개를 숙이며 수빈의 손을 맞잡고서 대꾸했다.
"그동안 귀중한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제가 팽가의 가주에 등극하는 날이 오면,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반드시 갚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믿어 보겠습니다."
잠시 후 수빈은 밴을 타고 YK로 이동하고 있었다.
"준비가 다 되었다고 하던가요?"
수빈의 물음에 백성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코디 말로는 회심의 역작을 준비해 놨다고 하더라. 본인 말로는 청룡 영화제를 발칵 뒤집을 계획이라던데.."
"후. 그쪽 분들은 적당히란 게 없어서.. 가기가 좀 두렵네요."
"수빈아. 지금도 많이 늦은 거야. 오늘이라도 입어보고 핏이 맞는지 체크를 해봐야 할거 아냐? 그래야 내일 영화제에 입고 가지. 그나마 코디가 너 치수를 환히 꿰고 있어서, 크게 손볼 필요 없을 거라고 자신을 하니까 가능한 거지. 보통은 일주일 전부터 준비를 해야 된다고.."
"그렇긴 한데.."
그때 수빈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뜬 발신자를 확인한 수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양반이 전화를 갑자기 왜 한 거지?'
전화를 받은 수빈이 영어로 말했다.
"뱅상 회장님.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신 겁니까?"
[오랜만이야. 강감독. 영화 제작은 잘 되고 있는 건가?]
"이런.. 절 닦달하시려고 전화를 주셨나 보군요?"
[그럴 리가.. 받아서 배급이나 하는 주제에 제작사 대표 겸 감독인 자네를 뭔 재주로 닦달 하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래요? 아무튼.. 영화는 제작이 다 끝났습니다. 며칠 후에 시사회를 할 계획입니다."
화들짝 놀란 뱅상 회장의 목소리가 핸드폰을 통해 들려왔다.
[벌써? 사실인가? 예상보다 보름 이상은 빠른 거 같은데.. 역시 강감독이야. 대단해.]
"생각보다 편집이 빨리 끝나서요. 근데.. 무슨 일로 전화하신 겁니까?"
[일전에 자네가 말한 거 있지? 공정한 기회와 평가 그리고 명예 말일세. 내가 그걸 위해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녔다네. 현재까지는 아주 잘 진행되고 있어. 그 바닥 쪽은 내가 영향력이 그렇게 큰 편이 아니라서.. 나름 힘들었다고.]
"그래요? 고생이 많았겠네요. 감사드립니다."
[공치사를 받으려고 한 소리는 아니고.. 잘 진행되고 있긴 한데 말이야. 문제가 하나 있어.]
"어떤 문제 말입니까?"
[미국에서 강감독의 지명도가 아직 좀 떨어진다는 점. 영화 관계자들이야 강감독을 잘 알지만, 미국의 일반 대중들은 아직까지 강감독을 잘 몰라. 그래서 내가 깜짝 선물을 하나 준비했다네.]
"선물요?"
[엄밀히 말하면 선물은 아니지. 어디까지나 강감독의 능력으로 쟁취한 거니까.. 하지만 내가 나름 힘을 많이 쓴 건 틀림없다고.]
"도대체 그게 뭡니까?"
[어디 보자.. 30분 남았군. 30분 뒤면 알 수 있을 걸세. 그럼 또 통화하자고.]
통화를 끝낸 수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양반이 갑자기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네. 선물이라.. 한국에 택배를 보냈을 리는 없을 테고. 아무튼 30분 뒤라니 금방 확인이 가능하겠군.'
부지런히 달린 밴이 YK에 도착할 즈음이었다. 백성철과 수빈의 핸드폰이 갑자기 미친 듯이 울어대기 시작했고, 문자와 카톡이 당도했다는 메시지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수빈이 핸드폰의 수신 목록에서 YK 박사장이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 강이사. 기사를 빨리 확인해 보게나.
문자에 첨부된 링크를 눌러보았다. 짧은 기사 하나가 보였다.
[속보] 강수빈 영화감독. 한국인 최초로 제61회 그래미 어워드 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됨.
'선물이란 게 그래미를 말한 거였군. 미국 대중들에게 내 지명도를 올리기에 적합하긴 하지.'
그 순간에도 수빈과 백성철의 핸드폰이 끊임없이 울어대고 있었다.